학사재생 82화
“고마워, 오빠! 효령이도 정말 좋아할 거야! 물론 오빠는 그럴 필요 없지만, 어쨌든 좋아할 거니까! 그럼 나 간다. 잘 자, 오빠. 사랑해!”
알 수 없는 말을 떠들던 황서연이 마지막으로 황준우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치며 방을 떠난다.
그 모습을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황준우는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당할 수가 없네.”
서시는 매일 황서연이 너무 제 오빠만 부른다며 걱정하지만, 그 역시 여동생 바보 입장에 취한 오빠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3. 홍산선보(弘山先步)
“그래서, 우리 경호와 홍산의 임금은 지금부터 내가 지불하기로 했다는 말씀.”
팔짱을 끼고 콧대를 높인 황준우의 말에 경호의 표정과 시선에 걱정이 가득 차올랐다.
“이제는 고용주의 횡포가 시작되는 건가요. 하아…….”
“횡포라니, 진짜 횡포가 뭔지 보여 줘?”
“고용주가 협박한다! 홍 공자, 보셨습니까?”
“…….”
팔짱을 낀 홍산은 그저 눈을 감을 뿐이다.
실상 그의 입장에서야 어차피 황준우를 따르기로 한 이상 임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이럴 때는 또 편 안 들어 주시네.”
“은공…….”
경호가 섭섭한 듯 입술을 빼 내밀고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 때였다.
“그럼 매일 맞장구만 쳐 주면 진짜 둘이 살림 차리게?”
황준우의 선제 공격이 이어졌고, 홍산의 입과 눈이 순식간에 다시 닫혔다.
그 짧은 순간을 모두 목격한 경호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인다.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제 막 도련님을 겪은 홍 공자 적응 안 되게!”
“내가 보기엔 오히려 경호보다 적응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크윽…….”
“왠지 맞는 말 같지?”
아닌 게 아니라, 처음에는 황준우의 괴이한 행보에 놀라움을 표현하던 홍산의 얼굴에 근래 들어 조금씩 무덤덤함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이십 년에 가깝게 그를 겪어 온 경호조차 자기도 모르게 한 번씩 발끈할 때가 많은데 말이다.
“어쨌든, 그래서 경호는 약속대로 임금 두 배로 올려서 줄 거야. 홍산도 섭섭지 않게는 챙겨 줄 생각이고.”
“그 두 배는 꼭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에헤이, 마음이야. 받아.”
“두 배로 부려 먹으실 생각은 아니지요?”
“흐흐…….”
황준우는 대답 대신 음흉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어찌 됐든 그렇게 임금 문제를 정리한 황준우는 곧장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경호의 말마따나 고용주의 횡포로써 선언할 게 있어.”
“역시 예정된 횡포가…….”
“어젯밤 진심으로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말이야. 둘 다, 강해질 필요가 있어.”
황준우는 경호의 말을 무시한 채 본인의 의견을 꺼내 놓았다.
“강해진다고요?”
“그래, 무공 말이야.”
“주공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경호의 의문에 황준우가 답하고, 홍산이 고개를 주억인다.
“언제는 충분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래서 강해지기 싫어?”
“아니요. 강해지고 싶습니다.”
단호하게, 이번만큼은 진지한 눈빛을 제대로 한 경호의 답에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당장 누구보다도 강해지고 싶은 것이 경호의 심경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어찌 됐든 강해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노력, 그에 수반되는 의지니까 말이야. 경호와 홍산 둘 다 분명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 참고로 내가 강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데는 기준이 있어.”
“기준이요?”
“그래, 기준. 뭐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무림에서 나누는 무공의 경지란 것이 있잖아? 그 수준에서 볼 때 일단 둘 모두 스스로가 절정의 경지라 불리는 건 알지?”
황준우의 말에 경호와 홍산이 고개를 주억였다.
“자, 그럼 보자. 절정을 나누는 경계가 뭐야?”
“강기를 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경호의 물음에 이번 역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일단은 그렇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아?”
“들리기로는 말이야. 강기란 것은 무엇이든 벨 수 있고,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들 하지.”
하나 실제 절정고수가 펼치는 강기는 강철을 베어 내는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막말로, 그보다 한 수 아래인 검기라고 하여도 단단하게 잘 응축되어 있다면 강기로 베지 못할 경우도 많았다.
“이유는 간단해. 절정 고수 때 펼치는 강기는 가짜거든.”
“가짜요?”
“흉내라고 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까?”
황준우의 말에 질문을 한 경호가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스스로 절정의 벽을 넘어선 후 무공의 진일보를 느끼고, 가끔 강기를 선보이고는 하지만 아쉽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 황준우의 말마따나 기껏해야 흉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던 탓이다.
“실제로 두 사람 모두, 괜히 힘을 넘치게 사용하는 강기 흉내보다는 검기상인을 펼칠 때가 더 많지?”
창을 사용하는 홍산의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를 테지만, 확실히 굳이 기운을 많이 쏟아 내는 강기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실전에서는 거의 사용 불가능하고, 자신의 무공을 뽐내는 힘자랑을 하는 순간에나 자랑할 만한 것이 절정고수의 강기인 것이다.
“그 수준을 벗어나는 게 우선 내 기준이야.”
“그 말씀은?”
“흔히 초절정이라고 하지. 그쯤 되면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짜 강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거든. 바로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뽑아 든 황준우의 수왕검에서 두텁고 찬란한 황금빛 기운 덩어리가 무섭게 솟아났다.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직접 눈앞에서 황준우가 강기를 펼치는 것을 본 적이 없던 경호의 눈에 자연스레 감탄이 어렸다.
“도련님…….”
“더 경지가 오르면 사실 이런 모습도 허세에 불과하고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어쨌든 그 전까지는 확실히 쓸 만한 편일 거야.”
자랑하던 강기를 거둔 황준우가 긴장한 표정의 두 사람을 바라본다.
“자, 그럼 더 설명할 필요 없겠지? 난 두 사람이 초절정 고수가 되기를 원해.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보름 정도 안에 말이야.”
“보름 내에요!?”
“가능합니까?”
경호의 경악과, 홍산의 질문이 동시에 쏟아졌다.
자그마치 초절정 고수다.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이는 엄청난 일이었다. 넘치는 삼류와 이류를 무인 취급도 안 한다면, 일류부터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인정받는다. 그리고 경지가 초절정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강호 전체가 인정하는 고수가 된다.
고수(高手).
흔히 일류부터 이런 말을 붙여 주기는 하지만, 이는 삼류에게도 무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경우였다.
강호에서 그런 고수 중 하나가 된다.
누구나 꿈꾸지만,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가 초절정은커녕 절정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힘겹게 절정에 올라도 초절정의 고수가 되는 일은 또 다르다.
고작 한 단계 차이지만, 그야말로 무인이 고수가 되는 과정.
이때부터는 노력을 벗어난 재능과 무공의 질을 따져야만 한다.
거기에 노력까지 더해져도 가능할지 모르는 경지가 초절정이다.
그래서 고수라 불리는 것이고, 강호 전체를 통틀어도 그 수가 적은 편에 속한다.
한데 황준우는 그 높은 벽을 고작 보름 내에 부수라 말하고 있었다.
“그래, 보름 내에.”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이다.
세 사람은 장소를 연무장으로 옮겼다.
직후 경호와 홍산은 빠르게 몸을 풀며 몸의 열기를 올렸다. 순식간에 무공 경지를 끌어올리는 만큼 꽤나 격한 수련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나쁘지는 않아.’
황준우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따지자면 홍산의 성장은 이미 빠른 편이었다.
아직 이립(而立)도 되지 않은 나이에 절정의 경지로써 물이 올랐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경호 역시 늦은 편은 아니었다.
둘 모두, 세상에 나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는 아니란 것이다.
‘그래도 내 사람이 또 어디 가서 맞고, 다치고 그런 건보기 싫어.’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쳐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덧 몸을 다 풀고 연무장에 서, 굳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경호와 홍산을 번갈아 본 황준우 역시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우선은 대련입니까?”
그 모습에 아직 수련 내용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한 경호가 물어왔다.
“우선은? 아니, 우리는 앞으로 보름 동안 대련만 할 건데?”
“대련만요?”
“두 사람 모두 익힌 무공에는 문제가 없어. 경호의 경우는 내가 맞춰 줬고, 홍산은 애초부터 운이 좋았지. 게다가 경호 때도 그랬지만 홍산도 새 무공을 익힐 생각 같은 건 없잖아?”
“스승님께서 물려주신 무공입니다.”
“경호도 같은 말 했었어.”
어찌 됐든 받은 것을 소중히 할 줄 안다는 자세는 좋다. 그리고 실상 지금부터 새로운 무공을 익힌다고 하여 보름 내에 초절정의 고수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신공절학을 익혀도 꾸준한 단련이 없다면 단숨에 경지를 뛰어넘을 수 없는 법. 결국 그런 경우는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익힌 것이나 제대로 한 번 단련해 보자고.”
“대련으로요? 도련님이 지켜보시고 조언을 해 주시거나 하는 쪽은 아닌 건가요?
“나쁘지 않은 방법인데, 오래 걸려. 문제는 우리 모두 시간이 얼마 없단 것 아니겠어?”
웃으면서 말하는 황준우를 바라보는 경호의 등 뒤로 갑작스럽게 불길한 예감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 근데 대련이란 게 뭐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딱 죽기 직전만큼 싸우는 거지.”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보통 그런 걸 대련이라 하던가요?”
“죽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경호 왜 이렇게 불만이 많아. 홍산은 말없이 잘 따라오는데. 군말 말고,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으니까 둘이 동시에 덤벼.”
“동시에 말입니까?”
“시간이 없다니까, 시간이.”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손을 까딱거린다.
“그러면 실례를 무릅쓰겠습니다, 주공.”
기다렸다는 듯 창을 뽑은 홍산이 투기(鬪氣)를 흘린다.
애초부터 황준우와 직접적으로 붙어 본 적이 없는 그는 나름대로 이런 순간을 기다리기도 했던 탓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도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불안한 느낌을 받아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리 생각한 경호 역시 검을 뽑아 들고 눈빛을 굳혔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 강해질 수만 있다면 조금쯤 고생해도 상관없다는 점은 경호 역시 통감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렇게 세 사람의 대련을 빙자한 지옥 수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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