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79화
주유(周遊)를 하고자 마음먹었을 때는 사건이 끊이지를 않더니, 돌아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는 그야말로 평온 그 자체였다. 아무런 막힘도 없고 어려움도 없이, 편안하게 만금장에 도착한 황준우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내가 돌아왔다!”
“부끄럽습니다, 도련님.”
“…….”
경호는 솔직한 심경을 밝혔고, 홍산은 입을 여는 대신 얼굴을 붉히고는 딴청을 한다.
그러거나마 말거나 오랜만에 돌아온 집의 아늑함을 마음 가득 머금은 황준우는 만금장 장원의 넓은 입구에 들어선 순간부터 신나는 걸음과 함께 밝은 웃음으로 나아간다.
“여어! 취삼 안녕!”
“오셨습니까, 소장주님. 오래 안 보이셔서 그만 출가하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출가는 무슨, 그래 봐야 돌아올 곳이 집이지. 그나저나 그새 살 좀 찐 것 같다? 요즘 좋나 봐?”
“좋지요. 언제나 좋지요. 하하.”
“홍지도 안녕!”
“안녕하세요, 소장주님. 오랜만에 뵙는데 더 힘차 보이시네요. 바깥 생활이 제법 잘 맞으신가 봐요. 호호.”
“그래 보이나? 하하!”
지나다니는 식솔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잡담을 나누는 모습에 경호의 입가로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황준우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지만, 역시 그가 가장 빛나 보일 때는 만금장에 있을 때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이곳이 만금장…… 주공의 집인가.”
홍산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크게 놀라고, 감탄 어린 표정으로 그런 분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솔이라지만 따지자면 고용인.
그리고 황준우는 고용주에 속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어려움이 없고 불편함이 비추지 않는다. 사람 사는 곳이니 문제 하나야 없을 리 없다는 듯 때로는 힘든 표정으로 간신히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진심 담긴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아직 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서로 간에 이러한 관계를 갖추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쯤은 홍산 역시 잘 안다. 만금장이라는 거대한 단체 같은 경우는 더욱 그럴 터였다.
때문에 신기하고, 감탄이 나왔다.
‘소주대인께서는 듣던 대로 대기(大器)시겠구나.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놀라움 가득한 행보를 보여 주는 황준우의 곁에서, 큰 그릇인 만금장의 주인을 바라볼 수 있다. 홍산의 가슴 한편이 점점 더 크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하나 그런 홍산의 부푼 가슴과 상관없이 황준우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황석후의 집무실이 아닌 소향원이었다.
화사하게 꾸며진 밝은 정원의 모습에 다시 한 번 홍산의 시선이 돌아갈 무렵, 그 안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서시와 황서연을 발견한 황준우가 손을 여느 때보다 더 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 연아!”
“준우 왔구나.”
“오빠아-!”
서시의 작으면서도 귀에 쏙 박히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서연이 밝은 표정으로 뛰어와 황준우의 품에 와락 안긴다.
“오빠, 오빠, 오빠!”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마구잡이로 볼을 비비는 황서연의 격한 반가움의 표현에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속삭였다.
“다도(茶道) 배우는 게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조금. 그러니까 모른 척해 주라. 그리고 진짜 반갑기도 하거든!”
“알아, 알아. 하하.”
목소리를 높이며 괜히 눈초리를 세우는 황서연의 머리를 살짝 헝큰 황준우가 언제나와 같은 나른한 표정을 한 서시를 향해 다가갔다.
“요즘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던데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셨죠?”
“어때 보이니?”
양팔을 벌려 자신의 모습을 한껏 드러내며 몸을 반 바퀴 돌린 서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그건 당연한 거고. 이 옷에 대해 물은 거란다. 어떠니, 어울리니?”
그러고 보니 황준우가 떠나기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새 옷이다. 장식물이 하나 없어 화려하기보다는 단아한 듯 보이면서도 수놓아진 연꽃 문양이 잘 어우러져 있어 값싸 보이지도 않는다.
“예쁘네요. 잘 어울려요.”
“호호, 역시 그렇지? 네 아버지가 얼마 전에 선물해 준 거란다. 시장에 나갔다 보았는데 유독 눈에 띄었다면서. 호호호.”
“금술 자랑이셨습니까?”
서시의 즐거운 듯한 모습에 입가로 미소를 가득 품은 황준우가 되물었다.
“어머, 우리 아들이 눈치가 빨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직 장가 생각 없어요. 여행길에도 여자랑 엮인 일도 없었고요.”
“그건 조금 아쉽구나.”
“때가 되면 다 인연이 찾아오겠죠. 솔직히 막상 제가 일찍 장가간다고 해도 섭섭하실걸요?”
“음…… 부정은 못 하겠네.”
“솔직히 엄마는 뭘 입어도 예쁘지.”
두 모자간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 황서연이 말한다. 실제로 서시는 옷걸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는 소주의 대표 미인 중 하나였으니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호호, 말은 고맙구나. 근데 우리 연이는 갑자기 왜 심술이 났을까?”
“오빠가 빈손으로 왔으니까.”
서시의 질문에 대놓고 양 볼에 바람을 가득 집어넣고 있던 황서연이 빠르게 답한다.
“그럴 리가.”
물론 황준우가 이도 예상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빈손으로 왔다가 무슨 꼴을 당할라고.’
이미 소주에 오기 전부터 들르는 마을마다 서시와 황서연을 위한 선물이 없을까 눈에 불을 켰던 황준우였다. 덕분에 서시를 위해서 비취반지를, 황서연에게는 활동적이면서도 제법 밝은 색상에 예쁜 빛깔을 뽐내는 무복을 준비할 수 있었다.
황준우가 건네는 선물을 받은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음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아들에게 이렇게 선물도 받아 보고. 진짜 많이 컸네. 이 엄마는 너무 기쁘단다.”
“이 옷 엄청 마음에 들어! 바깥에 나갈 때 꼭 입어야지!”
두 사람 다 기뻐하는 모습에 활짝 미소 지은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조금 보는 눈이 있죠.”
그렇게 즐거워하는 두 모녀와의 재회 이후, 황준우의 걸음은 곧장 황석후의 집무실을 향했다.
“아버지, 아들 돌아왔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집무실 안, 예상치 못한 황석후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얼떨결에 반문한 황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언제나와 같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황석후가 황준우의 앞에 섰다.
“그 사이 키가 조금 더 큰 것 같구나.”
“아, 정말요?”
어느덧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아버지를 보며,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인다.
“들어오거라. 경 무사와 뒤에 있는 분도 함께 모시고.”
“아아, 네. 들어가자. 경호, 홍산.”
또다시 한마음이 된 듯 외치는 두 사람과 함께 황석후의 집무실에 들어간 황준우가 편안하게 제 의자를 찾아 엉덩이를 붙인다.
경호 역시 어수룩하지만 의자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어쩔 줄 몰라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이 자리에서 홍산 단 한 명뿐이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혹시 많이 불편하십니까?”
그런 홍산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은 황석후가 묻는다.
“아, 아닙니다. 단지 위명이 높은 소주대인을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본다는 게 너무 놀라워서…….”
“와, 우리 홍산 봐봐. 진짜 아버지가 보고 싶었긴 했나 보네.”
“처음에는 모시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주, 주공!”
놀란 홍산이 제자리에서 펄쩍 뒤며 얼굴을 붉힌다.
평소 볼 수 없는 그의 모습에 재미를 느낀 황준우는 곧장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마 이렇게 말했었지? 듣는 것만으로 무엇도 알 수 없으니, 소주대인이 듣던 대로 대기가 아니라면 나는 단호히 그를 버릴 것이다. 내가 모실 분은 오로지 진짜 큰 사람뿐이다!”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억합니다, 도련님.”
“아닙니다!”
“푸하하!”
세 사람의 모습을 지긋이 지켜보던 황석후가 이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이거. 시험 치라고 보냈더니 제법 즐거운 여정을 보내고 왔구나. 대충 소문은 들었다. 우선 거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장원은…… 장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그렇죠? 제가 좀 잘난 아들인 것 같긴 해요.”
“녀석.”
“어머니랑 연이한테는 아직 말씀 안 하신 것 같더라고요.”
“네 입으로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즐겁지 않겠느냐.”
“이따 저녁 식사 때쯤에 밝히죠. 따로 묻지 않으시던데 아마 혹시 제가 떨어졌을까 봐 걱정하시는 거겠죠?”
“알면서 묻는구나.”
“하하.”
“그래, 백 선생은 잘 모셨고?”
“제가 모실 게 없는 분이잖아요. 알아서 머물다, 때가 돼서 가셨습니다. 바람처럼요.”
“바람처럼이라……. 첫 만남 때도 그랬지.”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스승님을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바람처럼 만났다.”
“뭐 하시는 분인 줄은 알고 계시죠?”
“궁금하면 직접 묻지 그러느냐.”
“말씀을 안 해 주시니까 그러죠.”
“그럼 나도 말할 수 없겠지.”
“끙…….”
앓는 소리를 내는 황준우와 그를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는 황석후, 두 부자를 바라보는 홍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처음 서시와 황서연을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이제 와서는 정말로 그가 했던 착각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이렇게 단란한 가정을 두고 한 생각이 고작 그 수준이었다니. 모시는 주군 앞이라 생각해서인지 더 고개를 들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래, 홍 공자라고 하셨소?”
“예? 예! 편히 홍산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그럼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홍산. 듣자 하니 우리 아들을 따르기로 한 것 같은데, 힘든 결정을 하셨습니다.”
“첫 시작은 힘들었지만, 제 의지가 선택한 바. 하늘이 정해 준 운명이라 믿고 있습니다.”
“굳건하시군요. 보기 좋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혹시 해서 묻는 건데 무공을 사사받으셨습니까?”
“예! 형산(衡山)에 은거하셨던 스승님께서 마을에 내려오셨을 때, 어린 저를 발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인연이라 생각해서 손을 잡아 주셨다더군요. 사실 어린 시절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말을 길게 하면서도 횡설수설하는 홍산의 모습을 보며 황석후가 고개를 크게 주억인다.
“그런 게 운명이란 거지요. 혹시 해서 묻는데 스승님의 존함이 장 씨 성에…….”
“리 자 홍 자를 쓰십니다.”
“역시 그분이셨군요. 메고 계신 창이 참 익숙하다 생각했습니다.”
황석후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 어렸다.
“아는 사이예요?”
흔히 보지 못하는 그 표정에 황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네가 태어나기 전 표행에 나섰을 때 인연이 있었다. 당시 호남 일대에 출몰한 마적떼 때문에 제법 시끄러운 편이었는데, 저기 계신 홍산의 스승님 덕에 곤욕을 면한 적이 있었지.”
“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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