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72화
“어이, 뚱땡이. 착각하지 마. 내 목숨이 위험했고, 경호가 다쳤다고. 사람 목숨이 눈앞에서 몇 번을 왔다 갔다거렸는데 고작 금자 오만이라고? 내가 죽일 수도 있는데 살려서 모셔다 준 남궁오래인가 뭔가 하는 놈들 목숨 값만 해도 그 배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일견 거침없어 보이는 언사이지만 틀린 말은 없다.
황준우의 말마따나 만금장으로 돌아간 그가 남궁오래의 목숨을 휘어잡고 남궁세가를 휘두르려 했다면 겁 많은 원로들은 그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제 혈족들을 구하고자 피를 뽑았을 터였다.
하나 남궁전혁이 그 사실을 바로 인정할 필요는 없었다.
“소문은 듣지 않았나? 그들은 이미 가문에서 쫓겨났던 몸이야. 욕심에 눈이 멀어 자네에게 위해를 가할 뻔했으나…….”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근원지는 눈앞에 있을 테고.”
입가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할 뻔했던 남궁전혁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것 참, 곤란하군. 협상이란 것도 어느 정도 대화가 돼야 하는 법인데. 그러면 먼저 말해 보게. 얼마를 원하나?”
“남궁오래 목숨 값으로 십만, 경호를 위험하게 한 값으로 십만, 치료비 삼십만, 경호가 입은 마음의 상처 위로금 오십만, 더해서 내가 입은 마음의 상처도 적지 않으니 또 오십만. 아, 물론 모두 금자로 계산해야겠지.”
도합 백오십만.
지금의 남궁세가를 통째로 팔아야지만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은 돈이다.
정말 상상치도 못한 말에 남궁전혁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러고 있어? 셈이 어렵나?”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긴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 조금 더 생각해 봐. 결정되면 찾아오고.”
그렇게 말한 황준우가 그대로 방을 떠나 버린다.
마치 제집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남궁세가를 휘저으며 사라지는 그 모습을 창문으로 바라보던 남궁전혁의 두 눈에는 차가운 살기가 흘렀다.
[지금이라도 죽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군.”
[남궁세가는 강합니다.]
“알아.”
그 누구보다 남궁전혁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만금장 역시 강하다.
소주대인은 이미 완성된 거인이다.
그런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 눈앞에 명분을 가져다 대주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었다. 어차피 싸워야 된다면, 최대한 유리한 고점에 위치해야 한다.
결국 남궁세가 한복판에서 황준우를 죽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선택은 없었다.
“저 어린놈이 그걸 알고 있어.”
남궁전혁은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장 위험해 보이지만, 또 가장 안전한 곳.
결국 남궁세가는 제집 안마당에서 눈앞의 적을 죽이지 못한 채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의도하였다면 무섭고, 또 놀랍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놈은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이 태풍의 눈에서 고립된 채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제 발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놈이 남궁세가에 사과에 대한 요구로 금자 백오십만 문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천하 곳곳에 퍼트려라.”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안휘성 내, 남기 정도라면 오랜 시간도 필요 없다.
기껏해야 보름.
빠르면 칠 주야면 충분하다.
남기 곳곳에 남궁세가의 이름이 뻗쳐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천하 전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괜찮아. 어차피 시간이 필요한 일이야.”
[소주대인이 가만히 있을까요?]
“움직여 봐야 제 발등 찍는 격이겠지.”
남궁전혁의 눈이 뱀처럼 길게 찢어진다.
어린 나이에 제법 잔머리를 잘 굴렸지만 하나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때문에 자신이 우리에 갇혔고 바깥을 향해 무엇도 할 수 없게 되었단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남궁전혁의 귓가에 아른거리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인근에 머물던 기척 여럿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늘이 높고도 맑으니, 그야말로 대창천(大蒼天)이로구나!”
그들의 움직임까지 느긋이 지켜보던 남궁전혁은 푸른 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청천원을 나섰다. 이후 그는 가는 길마다 마주치는 시녀와 시종 모두에게 같은 말을 쉼 없이 반복하였다.
“만금장 소장주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 주도록. 바깥에서 누가 보아도, 아 남궁세가가 정말로 극진히 모셨구나, 라는 이야기가 나오도록 말이다.”
황준우가 남궁전혁을 만난 지도 삼 주야가 흘렀다.
그동안 황준우와 경호, 홍산에게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 그들이 안내받았던 장소는 남궁세가를 찾는 빈객 대다수가 머문다는 하청원(下淸院)이었다. 방도 많고, 사람도 많다.
그만큼이나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적고 화장실도 공용(共用)이었다.
한데 고작 하루밤낮이 다 가기도 전에 세 사람의 거처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상청원(上淸院).
하청원이 별것 아닌 빈객들이 머물다 가는 장소라면 상청원은 나라의 권력자 혹은 오대세가나 구파일방의 수장격이 되는 인물이 찾아올 때나 내어 주는 고급 숙소였다.
방은 넓고 곁을 지키는 시녀와 시종들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사람 서넛이 함께 사용하여도 모자라지 않을 개인 욕실과 화장실도 딸려 있다.
뿐만이 아니라 무인을 위한 연무장과 학사를 위한 서재, 그리고 방문 앞을 빠져나가면 곧장 마주할 수 있는 잘 다듬어진 정원까지 존재했다.
그저 머물기만 하여도 기분이 좋고 정신이 맑아지는 것만 같은 상청원에 머물고 있음에,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하며 걱정만 가득하여 경계의 눈초리를 사방으로 보내던 경호마저 어느덧 적응해 버렸다.
제때 나오는 음식에 어디선가 꺼낸 은수저를 담가 보지도 않았으며, 마시는 물을 멀리 놓아 둔 채 성난 고양이처럼 머리털을 부풀려 세우는 일도 하지 않았다.
“편안하지?”
그쯤 돼서야, 경호에게 면박도 주지 않은 채 그러려니 지켜만 보던 황준우가 첫마디를 건넸다.
“예. 사실 아직도 조금 불안하지만요.”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 이제 곧 다 우리 것이 될 테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못 들었어? 바깥에는 제법 소문 돌고 있다던데?”
“전 못 들었는데요?”
경호는 오히려 황준우를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그들이 있는 장소는 남궁세가, 그 중심부에 가까이 위치한 상청원이다. 바깥의 소문은커녕 그런 세계가 있는지도 의심되는 거대한 장원 안. 마치 만금장의 소향원을 떠올리게끔 만드는 곳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보다 더 조용하고 편안했다.
누군가 경호에게 천하에서 신선놀음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면, 주저 않고 상청원을 말할지도 모를 정도로 안락한 장소가 바로 지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이런, 이런. 편안하다고 바깥 이야기에까지 눈과 귀를 닫아 버리다니. 우리 경호, 뒤통수 맞기 딱 좋은 성격이구나.”
“누가 편안하다고 합니까, 누가. 저 나름대로 엄청 긴장하고 있다고요.”
“그런 양반이 나랑 같이 침상에 누워서 이렇게 수다나 떨고 있어? 홍산은 지금도 혼자 수련한다고 바쁘구먼.”
“저도 수련하고 왔습니다.”
“홍산이랑 같이 시작하고 먼저 왔지.”
“……전 일단 호위무사지 않습니까.”
살짝 볼을 부풀린 경호가 투덜대듯 말했다.
“그런 거라면 괜찮아. 한동안은 정말 별일 없을 거거든. 이참에 경호도 수련에 전력을 쏟아 두는 게 좋을 거야. 강해지고 싶다며?”
“그래도 호위무사인데…….”
“지금은 괜찮다니까. 가서 일 봐. 어차피 나도 곧 나가봐야 될 것 같고 말이지.”
“나가신단 말입니까? 어디를요? 따르겠습니다!”
경호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멀리 안 가. 남궁세가 내에 있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그게 더 위험한 것 아닙니까.”
“여기서 주는 밥도 잘 받아먹는 놈이 말은 잘한다.”
“그야 처음에는…….”
“아이고, 걱정하지 말라니까. 어쨌든, 이제 슬슬 일할 때가 된 것 같으니 나간다. 따라오지 마.”
“지, 진짜 안 따라갑니다!?”
손을 휘휘 내젓고는 멀어지는 황준우를 향해 외쳐 보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다.
대신해서 경호의 눈에 보인 것은 언제인지도 모를 틈새에 황준우의 어깨 위에 내려앉아 있는 적안서였다.
천하의 상청원에서 쥐 잡이도 하지 않나?
의문은 들었지만 곧 사라졌다.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 하시겠지.”
이쯤 되면 경호도 자포자기였다.
그러니까 대중들에게 보이거나 들리는 언론(言論)을 지배하는 이들을 흔히 정치가라고 한다.
무지 기분 나쁜 이야기지만, 결국 천하 곳곳에 산재한 대다수의 국민 그러니까 대중들은 그러한 정치가가 어떠한 목적으로 알린 소문에 웃고, 울고, 떠든다.
그 내면에 감춘 진정한 목적을 눈치채는 이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아주 가끔, 올바른 정의와 진실을 위해 언론을 지배하는 진짜 정치인들도 나타나지만, 역시 너무 희귀한 이야기다.
결국 소문이란 것의 대다수가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필요에 의해, 목적을 위하여 알려진다는 것이다.
황준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몸소 겪었다.
“무림인이란 놈들도, 결국 권력을 잡고 있는 이상 하는 일이 정치가랑 다를 게 없다는 거지.”
첫날과 같은 장소에서, 마찬가지로 남궁전혁을 만난 황준우가 다리를 꼰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에는 활짝 핀 미소가 가득 펼쳐진 채였다.
반면 남궁전혁의 얼굴은 첫날과 많이 달랐다.
어둡고, 붉고, 눈매는 사납다.
당황스럽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어 보이던 그날과 달리, 지금의 남궁전혁은 분명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놀랄 정도로 쫓기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네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이를 아득 간 남궁전혁의 입에서 낮고도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 며칠간 자신의 꾀가 성공하리라 의심하고 있지 않던 그가 이런 위기에 몰릴 줄은 본인조차 몰랐다.
아니, 몰라서 당했다.
“뭘 되묻고 있는 거야? 그 정도쯤은 알아보지 않았어? 그 자랑하는 남기 내에서의 남궁세가의 영향력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심지어 합비인데?”
황준우가 조소를 띤 채 되물었다.
“알 수 없었다. 흔적도 남지 않았어.”
주먹을 꽉 쥐고, 당장에라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을 억누른 남궁전혁의 눈이 조금씩 차갑게 가라앉았다.
화를 내고, 분노를 토한다고 하여서 해결되는 일이 있고, 오히려 불리한 경우가 있다.
지금은 분명한 후자였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밝히는 이러한 자리에서 과한 흥분은 독이 될 뿐이다.
“그래도 많이들 놀라고 있을 거야. 남천뇌, 남기제일수재,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전혁이 몰래 염전(鹽田)을 일구고 암상(暗商)들과 거래를 트고 있었다. 심지어 가솔들을 밥 먹듯이 살해하고…… 시체랑 살 맞대며 노는 걸 좋아하는 변태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마지막 부분은 나도 진짜 놀랐단다, 뚱땡아.”
“이노옴-!”
“놈놈, 거리지 마. 나 네 자식 아니다.”
일갈을 토하며 기운을 쏘아 내는 남궁전혁을 향해 정색하며 얼굴을 굳힌 황준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때? 네가 눈과 귀를 모두 가렸다고 믿었던 쪽에게 오히려 역으로 당하는 기분은? 명분에서 이렇게 치열하게 밀려 본 적이 언제 있었나? 아니겠지. 넌 남천뇌고, 남기제일수재니까. 패배해 본 적 없지?”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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