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68화
“꼭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만…….”
“아냐, 결국 내 실수는 맞으니까. 끝까지 지켜 줘서 고마워, 경호.”
“아닙니다. 제 소임을 다했을 뿐이지요. 호위무사 아닙니까?”
“그래도 너무 고마워. 진심이야. 집에 도착하면 내가 봉급 두 배로 올려 줄게.”
“하하…… 지금도 돈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웃음을 터트린 경호가 조금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볼을 긁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정말로요.”
“그 말은 내 옆이 좋다는 뜻이지?”
“…….”
“그래도 내가 너무 고마워서 그런 거니까. 봉급은 받아 줘. 그리고…….”
끝까지 경호에 대한 감사함을 깊이 표현한 황준우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움직여 방 한 구석에 의식을 잃고 늘어진 남궁오래와 남궁문우에게로 향했다.
두 눈동자에서는 지옥에서 솟아난 것 같은 불길이 뜨겁게 피어올랐다.
“겁도 없이 우리 경호를 다치게 한 저놈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 볼까나.”
염라대왕보다도 더 스산한 목소리를 듣는 경호의 전신에 소름이 일어났다.
7. 계획 변경
그 소란이 일어날 동안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홍산이 눈을 뜬 것은 이른 새벽인 축시(丑時) 무렵이었다.
“……저건 또 뭐지?”
방 한 구석에 마치 생선 다발처럼 줄줄이 묶여 있는 남궁오래를 비롯한 여섯 사내를 바라본 홍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남궁세가 찌꺼기들.”
옆에 서 팔짱을 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암습?”
“뭐, 그런 셈이지.”
“내 탓인가?”
홍산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남궁세가와 척을 지고 있는 본인의 입장을 떠올린 탓이다.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그 습격 동안 의식을 잃고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군.”
충격이 큰 탓에, 절로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
자연스레 황준우의 입가로도 쓴웃음이 떠올랐다.
“동감이다. 아,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고마워할 거면 내가 아니라 우리 경호한테 하라고.”
“…….”
찌푸려졌던 홍산의 시선이 황준우를 스쳐 지나 멀뚱히 서 있는 경호를 향했다.
“고맙소.”
어쨌든, 암습이 있었고 그는 살아남았다.
황준우의 말대로 따르자면 경호가 없었다면 눈을 뜬 지금 저승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연스레 말투에도 공경이 묻어 나왔다.
“괜찮습니다. 그리 대단한 일 한 것도 아니고…….”
“구은(求恩)이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니겠소.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오.”
“…….”
어색하게 웃은 경호가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주억였다.
스스로의 약함에 자괴감도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을 지켰다. 호위무사라는 직책에 부족함이 없는 일을 해낸 것만은 분명했다.
뿌듯함이라는 감정이 가슴 한편을 가득 메우다 못해 꽉 눌러 채운다.
경호에게 공수(拱手)를 취하며 감사를 표하는 홍산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미소를 머금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나저나 저놈들은 어쩔까.”
“죽이는 게 좋겠지.”
황준우의 물음에 고개를 든 홍산이 차갑게 말했다.
“살려 주었다가는 괜한 뒤끝이 생길 수 있다.”
어쨌든 남궁세가.
그들이 암습을 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굉장한 부담일 것이다.
살려 보내 주었다가는 어떻게 해서든 황준우와 홍산 등에게 피해가 온다.
일반적이라면 분명 그러했다. 하나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무슨 소리야. 제깟 놈들이 무슨 뒤끝을 보여 준다고. 잊은 거야? 나 만금장 소장주야.”
황준우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리 남궁세가가 묻어 버리고 싶은 진실이 있다 하여도, 만금장이 상대라면 쉽지 않다.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뒤늦게나마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홍산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건가.”
“도련님 말씀대로입니다. 적이 남궁세가라면 우리는 만금장입니다.”
“명문(名門)의 위엄이란 건가.”
새삼스러운 현실의 고리를 깨달은 홍산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황준우 역시 이미 몇 번이고 감탄한 바 있던 사실이었다.
‘전생이었다면 분명 죽이지 않으면 꽤나 골치 아팠겠지.’
이 작은 일 하나가 부풀려지고 거짓으로 뒤바뀌고 섞여서 그를 향한 비수가 되어 돌아온다.
까다로운 일이다. 하나 이번 삶만큼은 다르다.
“그렇다고 꼭 살려 보내겠다는 건 아니고…….”
황준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쨌든 지금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암살 시도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들로 인해, 자신의 실수로 인해 경호가 다치고 위험했다는 사실이다.
어지간하게 용서를 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지, 이놈들 정도가 문제가 아니야. 이 상태로 계속 설치는 남궁세가 자체가 문제야.’
생각의 영역이 확대되고 물꼬를 틀기 시작했다.
이윽고는 점점 황준우의 입가에 떠오른 사악한 웃음이 짙어져 간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경호와 홍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이내 곧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저승보다야 이승이 낫지 않겠어?’
아니, 역시 저승이 더 좋았을 수도 있겠다.
커다란 마차에 밧줄로 말처럼 묶인 여섯 사람을 바라보는 경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네 이놈, 감히 이 몸을 이런 취급하고…….”
“어디서 말이 함부로 사람 말을 하고 지랄이야.”
“끄아아악-!”
마부 자리에 앉은 황준우가 채찍을 휘둘러 낮은 음성과 함께 살기를 흘리던 남궁문우의 머리를 두들긴다.
그렇게 강하게 휘두른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남궁문우는 제자리에서 쓰러지기까지 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분명 내공도 금제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된 걸까.
남궁문우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름 높은 구벽신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경호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경지가 초절정을 넘어 초인(超人)의 영역이라는 조화경을 엿보고 있다는 고수가 고작 채찍질 한 번에 아무런 힘도 못 쓰고 괴로워한다
심지어 달아날 생각조차 못 한 채 묶여 있었다. 생각해 보면 고작 밧줄 따위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끊어 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대체 정체가 뭐지?”
놀라는 경호 옆에, 그보다 경악한 홍산이 중얼거린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본 경호의 입가로는 작은 웃음이 감돌았다. 옆에서 늘 지켜본 자신이 너무 놀라 말이 안 나올 지경인데, 이제 막 옆에 선 홍산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자, 출발하자 말들아. 목표는 남궁세가다. 가는 길은 굳이 말 안 해 줘도 알지?”
“죽여 버릴 거…… 끄아악! 살려 줘!”
“자꾸 말들이 사람 말을 하네. 곱게 몸 관리 잘해서 집에 도착하고 싶은 심정은 없나 보지?”
황준우의 채찍질 한 번에 쓰러지며 남궁문우보다 괴로워하는 남궁진위를 바라보는 남궁사래의 두 눈에는 절로 음영이 깃들었다. 처참한 행색이지만 저만큼 괴롭고 싶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 자존심 높은 남궁문우조차 고통에서 벗어난 직후에는 말없이 앞으로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을 바로 뒤에서 바라보던 경호가 헛웃음만을 흘리고 있는 홍산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게 편할 겁니다.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요.”
“사람……이긴 한 게요?”
홍산의 물음에 경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사람이지요. 사람이니까 실수도 하고, 화도 내고, 웃고, 울고, 감동하고,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경호의 물음에, 그간 자신이 보아 왔던 황준우의 모습을 떠올린 홍산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건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계속 따라오실 예정인가요?”
본래 홍산의 목적지는 소주였다.
황석후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황준우 일행과 함께 움직여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아주 방금 전, 가는 길이 갈렸다.
황준우는 집으로 향하기 전 남궁세가로 가겠다고 선언했으니 말이다. 어이없고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뱉으신 이상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거겠지.’
새벽녘부터 무언가를 꾸미며 한참이나 음흉하게 웃어 대었으니 분명한 목표가 있을 터였다.
그러려니 하는 경호의 시선을 따라 채찍을 든 채 말들(?)을 조련하고 있는 황준우를 바라보던 홍산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소.”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셨지요.”
“마지막 승부를 제안해야겠소.”
결심을 굳힌 홍산이 뚜벅뚜벅 걸어 마부 역할에 충실한 황준우의 옆에 섰다.
“마지막 승부를 하자.”
갑작스러운 홍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황준우가 곧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하고 싶은 승부는?”
“…….”
“딱히 생각이 없구먼. 일단 급해서 무작정 찾아온 거고.”
“옳다.”
“큭큭,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자. 진인사 대천명. 일은 사람이 벌이지만 뜻은 하늘이 이룰지니.”
“무슨 말이지?”
“충권 알지?”
홍산은 고개를 주억였다. 도박판에서 승부를 가르기 힘들 때 쓰이기도 하며, 몇몇 어린아이들이 놀이 삼아 즐기는 것을 본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 둘, 셋 하면 내는 거다.”
주먹을 앞으로 내민 황준우의 말에, 굳은 얼굴의 홍산이 침을 삼켰다.
“하나.”
충권 승부라면 그야말로 행운의 승부.
하늘의 뜻이 황준우에게 있다면 질 것이고, 이긴다면 인연이 아닌 것이다.
‘그래, 단지 그뿐이다.’
결심하며 눈을 빛내는 홍산에게 황준우의 마지막 음성이 떨어졌다.
간단한 충권 승부답게 결과는 빠르게 드러났다.
황준우는 뱀을 뜻하는 검지, 홍산은 개구리에 속한 엄지를 내밀었다.
승부가 갈렸다.
“개구리는 달팽이를 먹지만, 뱀에게는 잡아먹히게 되어 있지. 내가 이겼네, 홍산.”
마지막 승부.
충권에서 가볍게 승리한 황준우가 웃음 지었다.
딱히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하늘의 운에 맡긴 승부였기에 더 기분이 좋았다.
그런 황준우를 향해, 끈끈한 시선을 보내던 홍산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부족한 놈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공.”
“응?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하늘의 뜻이 따르라고 하였으니, 평생을 모실 하나뿐인 주인인 바.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먹은 이상 진심으로 주공을 모시겠습니다.”
“뭐, 네가 그게 편하다면야.”
어색하지만 홍산이 원한다면 굳이 말릴 이유도 없었다.
저렇게 말한 이상 쉽게 등을 노리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고삐를 주시지요. 제가 말들을 몰겠습니다.”
태도를 바꾸자마자 곧장 손을 내민 홍산의 말에, 두 사람의 승부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던 말들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아무리 지금 이런 처지라지만 진짜 말 취급이라니! 그들은 남기제일 남궁세가의 식솔들이었다.
자존심에라도…….
갑작스럽게 바닥을 때리는 황준우의 채찍질에 저도 모르게 눈빛을 빠르게 거둔 여섯 사람이 정면만을 열심히 노려보았다.
부모의 원수가 정면에 존재하는 것 같은 열렬함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됐어. 이쪽은 내가 알아서 할게. 앞으로 부려먹을 일이 많을 테니까 이번에는 쉬라고. 말들이 보다시피 조금 거친 녀석들이라.”
“요령만 알려 주신다면…….”
“쉽게 되는 게 아니야. 일단 마차에 타. 까짓 거 평생 부려 먹을 거 기분으로 처음은 내가 한 번 모셔 드린다.”
“주공…….”
“경호, 여기 콱 막힌 애 좀 마차에 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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