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63화
자연스레 합공을 가하던 다섯 남궁세가의 무인들 사이에서도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경호가 기세를 잡고 몰아붙이기 시작한 것 역시 그 순간이었다.
“어엇!”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이는가 싶더니, 헛 신음이 터져 나오고 허공으로 세 자루 검이 떠오른다.
다섯 중 셋.
틈을 노린 경호의 일격으로 검을 놓친 남궁세가 무인의 숫자다. 자연스럽게 제 검을 사수한 두 무인의 눈에도 긴장감이 어렸다. 상대의 실력이 예상을 훨씬 상회한 탓이었다. 경호가 그 틈을 놓칠 이유는 없었다.
“그만하시지요. 우리는 방금 전 달아난 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입니다.”
“한데 어찌하여 놈을 도왔단 말이냐?”
경호의 말에 검을 놓친 청년 하나가 분노로 목소리를 높인다. 자연스레 경호의 표정에는 황당함이 어렸다.
“내가 언제 도우려고 했습니까? 그쪽이 먼저 공격해서 방어한 것뿐입니다.”
“뭣이!? 분명 네가 문을 열고 놈을 맞아 주려고…….”
마찬가지로 어이가 없다는 듯 외치던 남궁세가 무인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오해할 일도 아니었다.
만약 진짜 같은 편이었다면 먼저 달아난 쪽은 집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합류하는 방법을 택했을 테니 말이다.
그저 흥분한 마음에 부족한 경험이 더하여져 시야가 가려졌고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그를 뒤따른 나머지 넷 역시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얼굴이 붉어진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쉰 경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만금장 소속의 무사인 제가 굳이 여러분이 악적이라 말하는 자와 손을 잡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만금장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섯 사내의 인상이 크게 찌푸려졌다.
사칭이 아니라면 정말 제대로 잘못 짚은 셈이다.
출신 성분조차 알 수 없는 정체 모를 악적과 만금장.
괜히 붙여 놓아서 그들이 이득 볼 것이 없다.
가문 전체에 괜한 누를 끼칠 수도 있는 수준의 일인 것이다.
“여기 만금장 징표요.”
경호가 품속에서 꺼내 든 여덟 마리의 황금말이 달려 있는 패를 확인한 순간부터는 더 이상 의심할 바도 없었다.
“컴, 컴. 이거 실례했소. 본인은 남궁오래(南宮五來)의 맏형인 남궁진위라고 하오. 아무래도 너무 급하다 보니 결례를 범하게 되었소. 달리 사과를 하기는 쫓아야 하는 자가 있어 그만 물러나야 하는 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오.”
말은 그리했지만, 남궁세가의 입장에서 만금장을 향해 머리를 숙이기 싫다는 뜻이다. 남궁세가의 미래라고 불리는 남궁오래의 입장이라면 더욱 그럴 터였다. 경호 역시 굳이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었고 말이다. 때문에 곧장 떠나려는 그들을 잡지 않으려 했다.
“왜 쫓아오지 않나 했더니 여기 숨어 있었군.”
지붕을 넘어 모습을 감추었던 정체 모를 신형의 주인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남궁오래 역시 깔끔하게 자리를 뜰 수 있었을 것이다.
“네놈이 감히!”
“남궁세가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그게 제힘인 줄 아는 애송이들이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늘 그 정도뿐이구나.”
차갑게 말하는 청년이 한 자루 창을 빼 들며 상대를 도발한다. 남궁오래가 참지 못하고 또다시 몸을 날리는 것이야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채채챙-!
창과 검이 또다시 부딪치며 불꽃을 튀긴다.
작은 마을에 연속된 소란이 일자 곳곳에서 얼굴을 빼 내미는 주민들 역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무서워 달아난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
남궁진위의 외침에 사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하여 입가 가득 조롱을 머금은 조소(嘲笑)를 비췄을 뿐이다. 그러한 행동이 더욱 남궁오래의 마음을 불타게 만들었다.
“죽여 버리겠다!”
채채챙-!
검과 창이 계속해서 부딪치고, 소란이 점점 커져만 간다.
호기심에 고개를 내밀었던 주민들은 행여 무림인들의 싸움에 휘말릴까 곧장 집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저 녀석 제법인데?”
그러는 사이 흥미로운 눈으로 싸움을 구경하던 황준우가 뒷짐을 쥔 채 경호에게로 다가가 말한다.
“이제야 움직이시는 겁니까?”
“귀찮았거든. 자다 깼잖아.”
“끙…….”
“어쨌든 경호도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저 양반도 젊은 나이에 제법이야. 남궁세가를 상대로 도발을 걸다니 뚝심도 있어 보이고.”
“악적이라고 하더군요.”
경호의 말에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시선을 마주친다. 곧장 양팔을 하늘 높이 든 경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예. 직접 듣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지요. 또 성급했습니다, 도련님.”
“흐흐.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음흉하게 웃지 마십시오.”
“난 하하, 라고 시원하게 웃었는데?”
“거짓말쟁이.”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는 사이에도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만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승부가 갈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청년에 이어서 경호와 상대했고, 다시 한 번 싸움을 시작한 남궁오래는 지쳐 있었다. 또한 도발에 못 이겨 흥분한 상태였다. 전력을 펼치지 못하는 젊은 남궁오래의 패색이 점점 짙어져 갔다.
“도, 도와주시오!”
결국 청년의 창기(槍氣)에 밀려 뒷걸음질 치게 된 남궁진위가 경호를 바라보며 구원을 요청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이대로는 당하게 된다.
남궁가의 미래라는 남궁오래가 고작 한 명을 상대로 패배했다는 것보다는 만금장의 도움을 받는 측이 나았다.
물론, 상대가 도와준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돕습니까?”
경호의 물음에 황준우가 고개를 내젓는다.
“우리가 왜?”
너무나 깔끔한 대답에 남궁진위의 얼굴이 붉어지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같은 남기의 명가(名家) 아니오!? 저 악적이 이대로 우리를 죽이는 꼴을 두고 볼 셈이오?”
“죽이진 않을 것 같은데? 만약 저쪽이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면 네가 제일 먼저 죽었을걸.”
“네놈은 대체 누구냐! 어린놈이 건방지게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니다!”
남궁진위의 외침에 어이없는 표정이 된 황준우가 자신을 검지로 가리킨다.
“나? 만금장 소장주.”
“뭣!?”
당황한 것은 남궁진위만이 아니었다.
싸움의 마무리를 위해 거칠게 창을 휘두르던 청년의 창끝 역시 짧게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한다. 그 모습을 확인한 황준우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흘렀다.
“만금장 소장주라고. 황준우. 몰라?”
모를 리가 있나.
얼마 전 소주대인 황석후에 이어 남궁세가에 지독한 손해를 안긴 어린 악마!
그 덕분에 남궁세가에서는 훌륭한 무인 셋을 잃었으며, 가계는 아직까지 제자리를 잡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때문에 남궁세가 내에서는 그의 초상화가 이곳저곳에 걸려 있기까지 했다.
그 얼굴을 보고, 분노를 잊지 말자는 의미다.
그런데 왜 몰랐을까?
어두워서?
‘아니, 뭔가 흐릿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선명히 보인다.
남궁세가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황준우의 초상화 그대로다.
“소, 소장주가 왜 이런 곳에!”
“유람 중이긴 한데. 계속 여기 신경 써도 돼?”
황준우의 의문이 채 끝을 맺기도 전 뱀처럼 휘듯 움직인 청년의 창이 단숨에 남궁진위의 목 끝에 겨누어졌다.
자연스레 공격을 이어 가던 나머지 남궁오래의 사인(四人)의 동작이 멈춘 것도 동시였다.
목 끝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안색을 창백하게 굳힌 남궁진위가 차가운 시선의 청년을 바라본다.
“묻겠다. 이곳이 남궁세가의 영역이라 하여 낭인들이 목숨 걸고 번 돈을 나누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어디에 있기는! 여태껏 모두가 그래 왔다! 남기 내에서 무인이 활동을 하여 수입을 얻었을 경우라면 당연히 정파 무림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 공경의 표시를 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내가 여태껏 천하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주장하는 어이없는 집단은 남궁세가밖에 보지 못했다.”
“네가 다닌 천하는 남기가 아니니까! 남기가 곧 남궁이고, 남궁이 곧 남기다! 남기에서는 남궁세가의 말이 곧 법이란 말이다!”
“호오……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나?”
남궁진위의 발악 같은 외침에 눈을 가늘게 뜬 청년의 시선이 황준우를 곁눈질한다.
동시에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린 남궁진위의 몸이 굳어진다.
“경호, 궁금해서 그러는데 우리 만금장도 남기 내에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도련님.”
“그러면 우리도 남궁세가의 말에 따라야 하나? 그들의 말이 곧 법이니까?”
“미친 헛소리죠. 영왕 전하께서도 그런 말씀은 안 하십니다.”
“대박이네. 남궁세가 놈들은 원래 다 저렇게 정신이 나갔나?”
“남궁세가를 모욕하지 마라! 남궁창천! 푸른 하늘 위에 오로지 남궁세가만이 있을지니, 만금장 네놈들이야말로……!”
에라 모르겠다는 듯, 모든 것을 포기한 남궁진위의 시야 앞으로 갑작스럽게 큰 별이 떠올랐다.
의식이 날아가고, 굳건히 버티고 있던 두 다리가 무너진 것도 곧장이었다.
“진위!”
“대형!”
그를 부르는 남은 남궁오래 사인의 외침에 피식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손을 털며 말한다.
“아, 나도 모르게 때려 버렸다.”
“이익!”
또다시 흥분한 듯, 그런 황준우를 노려보며 얼굴을 붉히던 남궁오래가 곧 고개를 숙인다.
두 주먹을 쥔 채 싱글벙글 웃고 있는 황준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오금이 오그라드는 듯한 공포를 느낀 탓이었다.
“다 떠들었으면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만 가라. 주민들 다 깰라.”
“꼭…… 이 보답은 꼭 받아 내겠소, 소장주.”
이를 으득 갈며 원한을 남긴 남궁오래가 황준우와 정체 모를 청년을 연달아 쏘아본 이후 멀어져 간다.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지도 않은 황준우의 시선은 대신하여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년을 향했다.
“아,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낭인 양반 도와준 것 아니야. 그냥 듣기 거슬려서 때려 준 것뿐이니까 오해는 하지 마.”
“…….”
“별개로 이야기가 좀 듣고 싶기는 하고. 그래서 말인데, 계속 낭인 양반이라고 부르기는 뭐하니까 통성명 정도는 하지? 나는 황준우. 이쪽은 경호. 댁은?”
“홍산.”
“이름 좋네.”
피식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판잣집 문을 연다.
“들어와. 내 집도 아니고 누추하지만 잠시 이야기 나누고 한숨 자고 가기에는 불편하지 않으니까.”
“…….”
고민하던 표정의 홍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문 안으로 들어간다.
경호는 잠시 멀어진 남궁오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저는 조금만 수련하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든지.”
그 작은 목소리에, 황준우의 대답이 돌아왔다.
판잣집은 성인 장정 둘만 앉아 있기에도 정말 좁았다.
애초부터 나무토막을 몇 모아 대충 끼워 구색만 맞춘 집이었으니 당연한 일일 터다. 그런 좁은 공간에 두 사람 모두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낭인이라더니, 이런 곳이 제법 익숙한가 봐?”
피식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홍산을 향해 물었다.
“…….”
“입이 무거운 편인가? 남궁오래를 향해 말할 때는 제법 잘 떠드는 편이던데.”
“할 말만 하고 싶을 뿐이다.”
“싫지 않아. 나름대로 뚝심이 있는 사람. 그리고 겁 없는 면도 좋고 말이야. 남궁세가가 개소리를 떠들기는 했지만, 이곳은 남기야. 그런데 이곳에서 남궁세가를 향해 정면으로 승부를 걸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죽음은 두렵지 않다.”
“생각보다 무서울지도 몰라. 막상 죽을 때가 되면 말이야.”
황준우 본인만 해도 그랬다.
무인이라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죽을 때는 두려웠다. 사람의 본능이란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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