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55화
사내의 억울한 목소리가 제법 처절했던 탓일까? 무작정 주먹을 휘두를 것만 같던 황서연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친구 분과 함께 평하객점에 식사를 하러 오셨지 않소. 그곳에서 우리는 운명적인 첫 만남을 하였고, 그때 황 소저가 내 마음을 단숨에 훔쳐 가 버렸소. 기억하지 못하는 거요?”
“음…….”
미간을 찌푸린 황서연의 눈빛이 흔들린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사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은 탓이었다.
“그때라면 효령이랑 평하객점에 간 날이 맞기는 한데…….”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청년은 운명을 논하고 마음을 훔쳤다고 외치지만 황서연은 이미 그를 잊은 지 오래인 게 분명했다.
‘안쓰럽네. 제법 훤칠하게 생겼는데.’
사내다운 인상에 힘 있는 두 눈, 쭉 뻗은 코에 훤칠한 신장까지 처음 튀어나올 때는 평범한 취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제법 잘생겼다. 입고 있는 옷 역시 비단으로 이루어진 고급품이었는데 어딜 가서 무시당하고 살 인상은 역시 아니었다.
‘대충 왜 덤벼든지도 알겠구먼.’
청년이 처음 튀어나올 때 외쳤던 못 참겠다는 말을 떠올린 황준우의 고개가 절로 내저어졌다. 같은 사내로서 안타까움에 옅은 한숨도 흘러나왔다.
“내 이름은 초호서요!”
“미안. 진짜 모르겠는데.”
청년이 이름까지 외쳤지만 고민 끝에 황서연이 내린 결론은 너무나 냉정했다.
“보아하니까 나한테 반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렇게 숨어서 지켜볼 것 같으면 정식으로 청혼 신청이나 해 보지. 처연한 척 혼자 몰래 따라 다니기나 하고 뭐 하자는 짓이야?”
“했소! 비록 작은 일이 아니라 생각하여 가문을 통해 전달할 수밖에 없었으나 내 마음을 담은 서신과 함께 정식으로 성혼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소!”
황서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황석후에게 건네받았던 서신.
황석후가 엄숙한 표정으로 읽어 보아 주는 것이 도리라고 하여 읽기는 읽었다.
서신 봉투도 뜯지 않은 채로 그 위에 적힌 이름만을 보았지만 말이다.
“호서. 맞아. 당신이 그 사람이구나.”
“도독동지의 장남?”
듣고 있던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질문을 던졌다.
“네 이놈! 감히 우리 도독동지를 함부로 부르다니 정녕 죽고 싶어…… 억!”
목소리를 높이던 초호서의 눈앞에 별빛이 반짝였다. 황서연이 내지른 주먹이 이마를 두들긴 탓이다.
“아까는 주먹질하더니 이제는 이놈, 저놈 하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면 우리 오빠랑 척을 지면 안 되는 것 아니야?”
“우리 오빠?”
반짝이는 별빛을 뚫고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초호서가 떨리는 시선으로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만금장 소장주?”
“일단은 뭐. 임시로 그칠 수도 있지만.”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동의한다.
동시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황준우의 앞으로 네 발로 기어 달려간 초호서가 소리쳤다.
“처남!”
“누가 처남이야!”
황서연이 또다시 반응해 초호서를 밀어낸다.
“처나암!”
“시끄러워, 이 아저씨야! 오빠, 가자!”
아저씨라고 불리기에는 많이 어린 초호서를 향해 망설임 없이 일갈을 내뱉은 황서연이 황준우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간다.
“황 소저! 처나암! 나를 기억해 주시오. 나 초호서를……!”
안쓰럽게도 외치는 그를 어렵게 외면한 황준우가 내심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라도 그 이름을 잊지는 않아 주지. 초호서.’
한때 저리 절박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는 사실쯤 기억한다고 해서 크게 손해 보는 건 없었으니 말이다.
“정말 별꼴이야. 그렇지, 오빠?”
“…….”
화가 난 얼굴로 되묻는 황서연을 향해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황준우였다.
그렇게 시간이 또다시 흘러 향시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험장인 남경까지 소주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는 하지만 한 달 정도는 여유를 두고 가는 것이 옳은 바. 미리 떠날 채비를 마친 저녁에 침상에 누운 황준우를 향해 혈안서 한 마리가 입에 무언가를 문 채 달려왔다.
서신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 내용을 확인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쪽도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했나 보군.”
사마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 준비할 것이 많다고 하였던 그가 본격적으로 천하를 아우를 정보 단체를 섭렵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제법 많은 돈이 쓰였는데, 이제는 그보다 더 많은 황금이 필요할 것이다. 때문에 황석후에게도 미리 허락을 받아 놓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돈을 좀 쓰겠다는 간단한 말 하나에 황석후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기대한다고 했던가? 첫 준비의 시작부터 나간 돈을 알면서도 묵과하고 있었던 황석후는 그저 흥미로운 눈으로 황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실제로 지금 황준우가 벌이는 일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상계에 천하를 아우르는 거대한 정보 단체의 힘이 더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심지어 그 시작점이 이미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만금장이다. 돈을 쓰는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다. 천하가 이 사실을 안다면 뒤집어질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만금장을 견제하려는 세력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날 터였다.
하나 사람들은 서왕의 움직임을 아직 모른다.
곧 있으면 눈치챈다고 한들, 그 시작점이 만금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황준우가 그렇게 손을 썼다. 돈이 필요하면 만금장을 찾으라고 하였지만 그의 이름을 활용하게 하지는 않았다.
경호의 이름 앞에 막대한 예금을 쌓아 두고 사마정이 손쉽게 쓸 수 있게 수작을 조금 부려 놓았을 뿐이다.
황준우에게는 너무나 가깝고 소중한 존재인 경호이지만, 세상의 시선은 다르다.
대다수 경호를 모른다.
천하를 손에 넣고 좌지우지하려는 욕심 많은 이들 중에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누군가 눈치를 챌 수도 있을 터다.
‘시기가 언제쯤일지가 중요하지.’
그리고 그 전까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느냐.
양측 모두 사마정에게 달린 일이었다.
그가 얼마나 단단하고 매끈한 기반을 쌓아 두냐에 따라 이 일의 성패가 갈린다. 성공하면? 황석후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반면 실패한다면 조금 아쉬울 터였다. 이번 일에 들어갈 돈은 만금장이라고 하여도 우습게 볼 수 없을 정도의 큰 금액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되지.’
사마정을 사람으로서 믿지는 않지만, 능력은 신뢰한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황준우 본인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을 해보자.
만금장의 모두를 위한 일.
그를 위해서라면 꽤나 복잡한 생각도 충분히 감내할 자신이 있는 황준우였다.
3. 남경으로
오후면 향시를 치르기 위해 성도인 남경(南京)을 향해야 한다.
이른 오전.
잠을 포기하고 밤새도록 적은 세 권의 책을 들어 올린 황준우의 입가로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다 됐다.”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그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언제나와 같은 경호의 음성이 들려온다. 왈칵 문을 열고 문 밖으로 나간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일어난 지는 십이 시진쯤 됐고, 어서 아버지한테 가자.”
“예? 안 주무신 겁니까? 오늘 당장 남경으로 향하셔야 되는데……!”
“할 일이 많았거든.”
한 손에 든 책을 들어 올려 자랑한 황준우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자연스레 경호의 얼굴에는 긴장이 떠올랐다.
황준우가 저렇게 웃고 난 후에는 꼭 무슨 사건이 하나씩 터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리고 이건 뭡니까? 철야붕권, 호풍신각, 귀룡지박? 이름만 봐서는 무공서 같은데.”
“무공서 맞아.”
“설마 직접 만드신 겁니까?”
“그럴 수도 있고. 흐흐.”
영문을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앞장서 걸어 황석후의 방을 향했다. 문 앞에서 이제 막 일어난 황석후를 기다리던 시녀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소장주님?”
“아버지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기별을 넣어 드릴까요?”
“들어오거라.”
시녀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 잔잔한 황석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시녀가 열어 준 문 틈새로 보이는 황석후와 서시의 모습에 황준우는 밝은 미소를 보였다.
“아버지, 어머니. 잘 주무셨어요?”
“네가 향시에 합격하는 꿈을 꾸었단다.”
“우리 아들이 장원이던데?”
황석후와 서시가 동시에 내뱉은 말에 황준우의 신형이 살짝 비틀거렸다.
“두 분이 같은 꿈을 꾸신 건가요?”
“음…… 부부라서 그런가 보구나.”
“역시 부부라서 그렇겠죠.”
“아무리 두 분이 부부 사이셔도…… 아, 그나저나 이것 좀 보세요.”
황당한 시선을 보내던 황준우가 내민 다섯 권의 책자를 얼떨결에 받아 들어 펼친 황석후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무공서구나.”
“예, 무공서죠.”
“제법 훌륭해 보이는구나. 어쩌면 절학(絶學)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고작 앞에 몇 장을 훑어보았을 뿐인데 황준우가 건넨 무공의 진가를 알아본 황석후의 눈이 연신 책장을 넘겼다. 그러던 그가 문득 손을 멈춘 것은 책의 마지막 장에 도달해서였다.
무공서의 마지막 장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대신하여 발이 셋 달린 기묘한 검은 새의 그림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를 보는 순간 황석후는 곧장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칠야무신!”
“칠야무신이요?”
황석후의 외침에 서시 역시 놀란 음성을 흘렸다.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존했던 전설인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다. 무림이니 뭐니 관심이 없는 평범한 농민이라 하여도 언뜻이나마 칠야무신의 이름 정도는 들어 봤을 정도니, 만금장의 장주인 황석후가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잊을 수도 없다.
“이건 어디서 난 게냐?”
굳은 얼굴의 황석후가 황준우를 향해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충은 예상했던 반응인지라, 이미 변명거리를 생각해 두었던 황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문을 열었다.
“작년에 표행 나갔을 때 있잖아요?”
“공주마마를 호위했던 당시의 일을 말하는 거냐?”
“네. 그때 북경에 들렀을 때 우연치 않게 얻었어요.”
황석후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칠야무신.
그 이름의 무게감은 아직까지도 전 천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근 오백 년 이내 최강이자 최고의 무인이었고, 또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악마이기도 했다. 아주 가끔 그런 칠야무신의 진면목을 언급하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긴 하다.
하나 대다수가 아는 칠야무신은 천하에서 가장 악독하고 무서웠으며 강했던 무인일 뿐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양민이 아닌 무인의 기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강했다는 사실이다.
대체 젊은 나이에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강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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