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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52화 (52/373)

학사재생 52화

“뭐 대충 짐작은 가. 우리가 비록 고우는 못 되었지만, 그 가까이 될 수도 있었던 사이였으니까. 너는 겁이 많고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둔한 것 같지만 여린 놈이지. 정확하게 말하면 여려서 그렇게 된 거겠지만. 어쨌든 그런 너니까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꼈겠지. 그래서 이렇게 나오는 걸 테고.”

사마정은 몸을 떨었다.

또 한 번 눈물을 쏟아 냈다.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했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태어났고 어둠과 함께 자랐다.

누구도 그를 이해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나?”

황준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난 널 죽일 생각이 아니야, 사마정. 진심으로 있는 힘껏 써 볼 생각이지.”

“…….”

“내 이름 알지?”

“칠야무신 황준우.”

내뱉는 사마정의 음성이 떨린다.

축축하게 늘어진다.

“혹시 만금장은 알고 있나?”

“소주대인의 천하제일장(天下第一場).”

천하제일상가가 아닌, 천하제일장이다.

황준우는 내심 미소 지었다.

‘제법 만금장을 잘 알고 있잖아?’

역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그가 필요로 하는 일에 사마정만한 적임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면 그 천하제일장의 주인, 소주대인의 자식들에 대해서도 잘 알겠네?”

“소장주 황준우, 차녀 황서연…….”

황준우가 씩 웃었다.

고개를 숙이고 여전히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마정은 결코 눈으로 보지 못할 표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그 이름을 연달아 내뱉는 순간 저도 모르게 전신에 소름이 돋아난 탓일지도 몰랐다.

“황준우…….”

“그래, 그게 바로 나야.”

“아아…….”

어찌 된 것일까?

죽은 줄 알았던 칠야무신 황준우가, 천하제일장의 다음 대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몸으로 태어났다. 세상이 이를 안다면 얼마나 몸서리칠까? 전 중원을 제 손에 넣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있는 욕심 많은 자들은 차라리 자결을 택하고 싶을 것이다. 하늘이 그를 돕지 않음에 삿대질하며 욕을 내뱉을 터였다.

“자. 똑똑한 편이니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지? 여전히 목숨을 걸어야 될 일인가?”

“…….”

사마정은 쉽사리 대답을 못 했다.

분명 여전히 위험하다.

그를 둘러싸고 지켜보고 있는 울타리 뒤편 시선들이 얼마나 많고, 예리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새로 지어진 만금장이라는 울타리 역시 못지않다. 천하 전체라고 아우를 수 있는 그 무서운 울타리만큼은 안 되지만, 그래도 만금장이라면 해볼 만하다. 아니, 그 안에 황준우가 함께하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울타리가 아니다.

성채가 지어질 것이다.

날카로운 검과 창, 화살로도 무너트릴 수 없는 높은 담벽이 일어나 강철의 방패가 되어 그를 지킬 터였다.

“이해했나 보군. 지금부터 네가 속죄하는 방법을 말해 줄게. 사마정, 살아라. 살아서 내가 억지로 쥐어 준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해내. 남은 평생을 죽을 때까지 나를 위해 사는 거다.”

“종이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뜻은 네 마음대로 해석해도 좋아.”

“종이 되겠습니다.”

“그러든지. 연락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서왕이 고개를 주억였고, 동시에 그의 품에서 튀어나온 혈안서(血眼鼠) 한 마리가 황준우의 몸을 한 바퀴 크게 돌더니 어깨 위로 자리 잡는다.

“좋아. 그러면 곧바로 일에 착수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만금장에 네 이름을 통해 사용하도록 하고. 만약 너무 큰일이라 안 될 때는 연락해. 그땐 또 알아서 할 테니까.”

“명을 따르겠습니다.”

“사마정.”

“예, 주인이시여.”

여전히 지면을 향해 머리를 내리박은 채 고개를 들지 않는 사마정을 향해 묘한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한마디 말을 더 흘렸다.

“거듭 말해, 나는 널 믿지 않아.”

“…….”

침묵이 흘렀다.

황준우가 떠나간 자리.

말없이 지면만을 바라보던 사마정의 몸이 더욱 급격히 떨리기 시작했다. 움켜쥔 두 주먹 사이로 붉은 핏물이 흘렀다. 눈과 코에서도 억누를 수 없는 무언가가 계속하여 넘쳐흐른다.

“끄흡…… 크흐흑.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핏물이 흐르는 두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친다.

좁은 지하가 울리다 못해 무너질 것 같이 두들기고, 두들긴다.

“다시는…… 다시는!”

끝내 그 앞에서는 하지 못한 말.

언젠가라도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말을 힘겹게 온힘을 모아 쏟아 낸다.

토해 낸다.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결단코…… 후회하며 살지 않겠습니다.”

사마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이 떠나가라 목 놓아 울었다. 그렇게라도 털어 내지 않는다면 참을 수 없는 감정 탓에 멈출 수가 없었다.

가슴을 두들기는 소리와, 눈물이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가 어두운 지하 동공을 감쌌다.

“심술궂어 보였지?”

사마정과 황준우.

두 사람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은 정신 연령이 어린 흑백쌍노라 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때문에 뒤에서 침묵했고, 말없이 눈치만 보았다. 혼자 남은 사마정을 뒤로한 채로 지상에 올라온 황준우가 뒷짐을 쥔 채 묵묵히 앞서 걸어 나갈 때에도 감히 말을 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황준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평소에는 너무 잘 뚫려 문제인 그 입이 열리지 않는다.

“음…….”

“크음…….”

침음하는 두 사람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피식 웃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맞아. 심술궂었지. 특히 마지막에 와서는 더욱더.”

“그, 그래 보였습니다.”

“심술궂었습니다.”

“왜 백노가 먼저 입을 열어? 내가 푸줏간에 들어가기 전에 한 말 잊었어? 질문할 때는 흑노만 대답한다.”

“…….”

기겁한 표정의 백노가 재빨리 입을 꼭 다물었다.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보니 제법 겁먹은 것 같았다. 아마 사마정의 태도를 보며 의심이 확신이 된 탓이 클 것이다. 눈앞의 어린 청년이, 과거의 칠야무신 황준우다.

그 시대를 겪었고 황준우를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백노처럼 행동할 것이다.

“농담이야, 농담. 이것도 짓궂은 장난.”

“…….”

“미안하다. 기분이 묘하다 보니까 괜히 둘까지 더 괴롭히게 되네.”

황준우의 작은 읊조림에 흑백쌍노가 서로를 바라보며 큰 눈을 껌뻑거린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미안하다고?’

자연스레 두 사람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얇아졌다.

‘진짜 칠야무신이 아닌가?’

‘그런데 서왕이 칠야무신이라고 했잖아.’

눈빛만으로 서로의 의중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머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직접 봐. 칠야무신 혹은 만금장 소장주. 그런 명패(名牌)따위보다 훨씬 알아보기 쉬운 게 눈앞에 있잖아?”

“…….”

황준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두 사람이 다시 한 번 큰 눈을 껌뻑거렸다.

“보이는 대로가 전부라는 거야. 보이는 대로. 예전의 내가 어땠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나야. 너희도 마찬가지고.”

“끙…….”

앓는 소리를 내는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계속해서 말을 건넨다.

“고민해 봐. 생각이란 것이 사람을 참 많이 변화시키니까. 아, 그리고 한동안 서왕 좀 돕고 있어.”

“서왕을 말입니까?”

“어떻게 돕습니까?”

“잘하는 거 해. 잘하는 거. 지키고 싸우는 거.”

“위험하지 않습니까?”

백노의 질문에 황준우가 피식 웃음을 흘린다.

“위험하면 나한테 연락해.”

그 말을 남기고 손을 휘휘 내저은 황준우가 북경의 상가 사이로 사라진다.

둘만 남은 흑백쌍노의 눈이 묘한 빛을 발했다.

“흑아, 흑아. 아무래도…… 진짜 칠야무신인 것 같지 않습니까?”

“칠야무신이 아니면 말도 안 됩니다. 솔직히 우리 둘이 어디서 맞고 다닐 실력은 아니지 않습니까?”

“서왕 놈은 어떻고. 그렇게 쉽게 잡힐 놈 같았으면 걱정도 안 했을 겁니다.”

의문이 제법 있었지만 결국 두 사람의 생각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만금장 소장주 황준우가 칠야무신이다.

“대박.”

“초대박입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동자를 한 두 사람의 입가로 함박웃음이 떠올랐다.

“우리 그러면 이번에 제대로 고른 것 아닙니까?”

“문상 따위가 문제겠습니까? 칠야무신이 옆에 있는데?”

“재밌을 것 같습니다, 백아!”

“저도 동감합니다, 흑아. 칠야무신 바로 옆에서 강호를 뛰어 나닐 수 있는 기회라니! 완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땡 잡았습니다. 흐흐.”

“최고입니다. 우흐흐.”

두 사람의 신이 난 웃음소리가 북경 거리 한복판에서 낮게 울려 퍼졌다.

서왕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폭발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사람이란 그런 거지.’

아무리 자신해도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처음 서왕의 얼굴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삼키려고 애써 봤지만 안 되는 걸 어쩌겠는가? 황준우는 마음 한편 어딘가에 쌓인 잔재를 억지로 털어 내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비워 보려 하여도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에야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사람인 것이다.

‘고생 좀 해 보라지.’

속 좁다고 욕해도 좋다.

지금 당장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걸 어쩌겠는가? 대신해서 그 이후, 언젠가 사마정이 잔재를 모두 털어 내면 그때는 많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속죄에 대한 감정도, 원한도 모두 잊어버린 채 진실로 바랐던 관계로 돌아가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 친구 사이가 깨지지 않는 한 언젠가 고우라고 불리는 날도 올 터였다.

“친구라고 하니 녀석이 걱정되긴 하는구먼.”

사마정에 대한 생각을 지운 황준우가 문득 멀리 보이는 자금성을 향해 시선을 둔다. 머릿속으로 새로 떠오른 얼굴은 역시 주연하였다.

여자, 심지어 어리지만 강하다. 빛나는 눈빛에 담긴 용기와 의지는 뭇 사내들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그런 흔들림 없는 눈빛을 가졌기에 그녀를 믿을 수 있다. 제법 마음에 드는 친구였다.

아니, 하나 더.

친구라는 단어를 의식한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우리가 친군가?’

나이 차이가 제법 많이 나고, 관계라는 것이 묘하게 성립되어 있지만 생각해 보면 현생에 있어 가족을 제외하고 그보다 가까운 이는 누구도 없다.

“도련님!”

“그래. 경호. 너 말이야, 너.”

멀리서 활짝 웃는 표정으로 손을 크게 흔들며 다가오는 경호를 바라본 황준우의 입가로도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우연입니다.”

가까이 뛰어온 경호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한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참 어울리지 않는 태도 같으면서도, 그런 경호가 좋다. 그만큼이나 황준우 앞에서 꾸밈이 없고 순수하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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