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51화
1. 고우(古友)
새로운 삶에 만족하고, 충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전 삶에 대한 회한(悔恨)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면 거짓일 터다.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다 말하고 싶지만…….’
전부 다 털어 버릴 수는 없다.
깨끗하게 씻어 내듯 밀어내도 잔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인 듯했다. 황준우에게 있어 서왕 사마정이 바로 그런 잔재였다.
어쩌면, 아주 만약에 그가 끝까지 곁을 지켜 주었다면, 등을 돌리지 않았다면!
전생의 그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세상일이란 것이 확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중원인들은 치를 떨 정도로 지독했으며 불성 원공 대사의 기이한 힘은 아직까지도 미지(未知)라고 불릴 정도의 영역이다. 어쩌면 서왕이 끝까지 도왔다 한들 황준우는 여전히 극단적인 결과인 죽음에 도달했을지도 몰랐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말이다.
‘그래, 운명.’
차라리 그편은 납득하기가 쉽다.
우습고 이해 안 될 말이기도 하지만 사내, 특히 허리에 검을 차고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무인이란 존재는 그런 낭만을 믿는 경우가 많았다. 낭만 하나 없이 풍진강호(風塵江湖)를 견뎌 내는 일이란 꽤나 지독한 법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황준우도 그런 운명을 일부 믿었다. 낭만을 알고자 했다.
사마정이 그의 마음속에 몇 없는 잔재로 남은 이유도 그러한 탓이다.
전생의 황준우에게는 분명 친구란 존재가 없었다.
현생 역시 주연하가 없었다면 ‘아직까지’ 친구가 없었을 터다. 하나 친구가 생길 수 있던 기회도 몇 번은 있었다.
‘모두 엎어졌지만.’
이용해 먹으려고 하고, 속이려고 하고, 영 입맛에 쓰다 싶으면 잘 챙겨 주다가도 바로 뱉으려고 하는 그런 관계. 황준우는 그런 사이를 친구라는 단어로 묶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 있어 분명 사마정은 달랐다. 악연이 엮였던 탓에 첫 만남만큼은 좋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가히 친구라고 불릴 만한 관계 속에 위치해 있었다. 힘들고 지칠 때면 마음 놓고 술 한 잔 기울이고,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도 부른다. 서로의 웃는 모습이 좋아 미래를 응원하기도 했다. 비록 서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 하여도 등 뒤쯤은 맡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 어쩌면 사마정은 황준우가 없다고 부인하는, 전생의 유일한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관계가 이어졌다면 지금쯤은 고우(故友)라 불렸을 터였다.
한데 그 관계가 단 한 번에 무너졌다.
어둠 속에서 자란 사마정은 겁이 많았다.
제 목숨보다 귀한 것이 있다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순간 곧장 황준우에게서 등을 돌렸다. 목숨을 구걸하고 황준우를 팔았다. 덕분에 무림맹은 큰 노고 없이 황준우를 쫓을 수 있었다. 바로 뒤에 믿고 있던 동료가 비수(匕首)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나 뒤늦은 후였다.
화산파 전대 제일 고수들이라는 화산삼매(花山三梅)의 협공 와중에 사마정이 암수(暗手)를 뿌렸고, 그때 역시 정말로 죽을 뻔했다.
아마 그때 입은 부상 탓에 한동안 잠적하지만 않았더라면 전 무림연합군이 모이는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거운 엉덩이를 붙인 채 고민하던 원공이 나설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살아…… 계셨습니까?”
“덕분에 죽을 뻔은 했지만.”
아니, 실제로는 죽었다.
하나 그 말을 납득시키기는 어려울 터다.
아무리 칠야무신 황준우라고 하여도 죽었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제 목을 가지러 오신 겁니까? 그렇다면 드리겠습니다. 무신께서 원하신다면, 내놓겠습니다.”
사마정이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면서 낮은 음성을 흘렸다.
목숨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
사마정은 그리 믿었고, 실제로도 죽을 뻔한 위기에 망설임 없이 황준우를 팔았다. 하나 오랜 시간 그의 등 뒤를 따르는 동안, 한없이 자신을 믿어 주는 황준우를 보며 느꼈던 감정은 뭐라고 할까. 아팠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 한편이 아리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이었던 배신의 날 이후에야 그 감정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양심(良心)이라는 녀석이 일을 하고 있다.
의(義)와 리(理)가 화를 내고 있구나.
고개를 내저었다.
우정? 의리? 나쁘지 않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목숨보다 귀할 리는 없다. 그보다 소중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 잡았다. 잠적했던 황준우가 다시 나타나고 그 시간 동안 모인 전 중원연합군에게 쫓겨 끝내, 장백산 정상에서 불성 원공 대사의 동귀어진에 의하여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또 한 번 고개를 내저었다. 죽었을 리가 없다. 칠야무신 황준우다. 원공 대사가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는 인물이다.
부정하고, 부정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예전보다 그의 곁에는 사람이 많아졌다.
세상에 서왕의 이름이 알려지고 그의 능력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탓이다. 사마정은 그런 사람들의 부름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돈도 벌고 재밌는 구경도 할 수 있다. 또한 새로운 사람과 만나고 사귀게 된다. 황준우를 대신할 동료를 찾는다.
사마정은 그때부터 깨닫기 시작했다.
후회하고 있다.
그날의 일을, 너무나 후회하고 있었다.
황준우의 이름이 다시 들려오지 않은 지 십 년차 되던 해에는 눈물이 흘렀다.
그때 또 하나를 알게 되었다.
아, 목숨만큼이나 귀한 것이 세상에는 또 있었구나.
목숨보다 귀할 수는 없지만, 그 못지않은 가치를 가지는 빛나는 보석 같은 인연이 있다. 사람이 있다.
십오 년이 더 흐르고, 사마정은 짧지 않은 인생을 통틀어 오로지 황준우 하나만이 그러한 인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깊은 후회가 남지만 시간은 돌릴 수 없다. 속죄라도 한다면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르지만, 방법 역시 모르고 대상조차 이미 없다.
그리고 이십여 년.
드디어 그의 눈앞으로 무신이 돌아왔다.
그를 응징하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응당, 목숨을 내놓아야 타당하다.
목숨보다 귀한 의리라고 생각한 탓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황준우를 죽였으니, 유일한 속죄는 하나뿐이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래, 차라리 그편이 편했다.
평생을 마음 한편 어딘가가 아픈 채로 사느니 차라리 뒤끝 없는 죽음이 낫다.
“변했네, 사마정.”
“아닙니다.”
사마정은 짧게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단지 어리석은 선택이 가져오는 후회와 아픔을 깨달았을 뿐이다.
죽음이 더 편할 것 같은 그 지독한 아픔과 고통이 너무나 싫을 뿐이다.
“그러면 역시 괴롭긴 했었다는 건가.”
“…….”
사마정은 입을 닫았다.
백 번 말문을 열어도 무언가 바뀔 수가 없다.
황준우를 인식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인데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그래,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목숨이 아까웠겠지. 너는 겁쟁이였으니까.”
“…….”
“처음에는 너를 많이도 미워했었지. 원망도 하고, 나도 사람이니까. 이해하지?”
“…….”
“사마정.”
“무신이시여.”
“우린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다. 배웠거든. 나를 한 번이라도 배신한 사람은 믿지 말자. 이것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
사마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다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응당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모순(矛盾)이 하나 있어. 너를 믿지 않고, 믿을 생각도 없는데, 믿어야 되는 상황이야.”
“우매하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굳이 생각조차 안 하려 했고, 언젠가부터는 몇 번이고 떠올라도 외면했는데 역시 너밖에 없다. 내가 아는 녀석 중에 그런 일을 가장 잘할 사람이라고 떠올리면, 단연코 사마정 네가 최고야.”
“…….”
사마정은 스스로를 우매하다 하였지만 실상 멍청하지 않았다. 그는 감정에 서툴고 어색하지만 이성에 대해서만큼은 명확하게 인지하고 따르고 있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에서 자란 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황준우가 말하는 바를 단숨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 힘이 필요하신 겁니까?”
“그렇지. 네가 필요해, 사마정.”
“그렇다면 다시는…….”
무언가를 읊조리려던 사마정의 입이 꾹 닫혔다.
황준우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런 사마정을 내려다본다.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지만, 믿어 보겠다. 사마정.”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간단해. 여전히 네가 하던 일을 하면 될 뿐이야. 대신 판을 크게 벌여 줬으면 좋겠어. 개개인적인 일에 관련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음…… 천하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해 보겠습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안 하네?”
사마정 개인의 능력은 뛰어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상하게 그를 따르는 붉은 눈을 가진 쥐들의 능력이 신통(神通)하다 할 수 있을 터다. 마물(魔物)일까? 혹은 영물(靈物)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붉은 눈의 쥐를 통해 세상을 보고 듣는 사마정 개인의 능력은 중원천하 모두가 탐내는 최고의 첩보와 은신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천하곳곳의 모두가 군침을 질질 흘리며 원하고 있다.
그래서 사마정이 살아 있었다.
모두가 탐내서 오히려 안전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에 위치한 개인. 그런 사람이 사마정이다. 스스로가 드러나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탓에 몇몇 사람을 부리고는 하지만 고작해야 그것이 전부다.
한데 만약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누군가가 그의 힘을 훔치려 한다면? 주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사마정의 능력을 탐내던 경계의 눈빛들이 단숨에 먼저 뻗어 온 손을 잘라 내고 집어삼키고 찢어 버릴 터다.
다시 말해, 사마정의 능력을 탐내는 이들은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붉은 쥐들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꾸고자 한다면 단연코 고개를 내저을 사람들만 모여 탐을 부리니 중심에 선 사마정은 안전할 수밖에 없다.
마치 폭풍의 중심과 같다.
이 사실을 황준우는 잘 알고 있었다. 사마정 본인은 더욱 잘 알았다. 이미 누군가의 옆에서 그를 도와 본 적이 있고, 덕분에 죽을 뻔한 위기에까지 처하여 평생을 상처로 남을 후회를 남긴 기억이 있다.
여태껏 그를 지켜 주던 모든 명분과 울타리가 단숨에 무너지고 사방 곳곳에서 검과 창, 화살이 쏟아질 것이다. 사람이 견뎌 낼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공격으로 그의 몸에 큰 구멍을 수십 개 더 뚫어 버릴 것이다.
결국 사마정이 개인이라는 수준을 벗어나 집단을 이루고 큰 판을 만든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목숨을 버리겠다.
때문에 사마정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해 보겠다고 하였다.
황준우의 말마따나,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내젓지 않았다.
그것이 황준우가 원하는 속죄라면, 그의 복수라면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이미 그는 쏟아지는 화살비를 향해 몸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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