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50화
그렇게 사마정은 세상에 나설 수 있었고, 붉은 눈의 쥐 떼에게 들은 소식과 소문을 통해 흥미로운 구경을 많이 할 수 있었다. 때로는 호기심 삼아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너무나 원하는 누군가에게 귀띔해 주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방문한 밤손님에 불안해하던 이들은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깜짝 놀랐다. 그리고 필요할 때면 그를 찾기 시작했다.
사마정은 자신을 쥐의 왕, 서왕이라 칭했으며 그들의 부름에 응하고, 일했다.
대가도 받았다.
딱히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밝기만 해 보이는 바깥세상에도 지독한 어둠이 많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의 이야기를 원하는 이들 대부분의 마음속에 어둠이 숨어 산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덕분에 죽을 뻔한 경험도 많았다.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았고, 더욱 은밀해져야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조직을 만들었다.
붉은 눈의 쥐들이 전해 주는 소식과 그간 모아 온 황금을 합치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금 음지에 숨어 밝은 세상의 어둠에 관여하며 살아갔다.
어둠을 기는 쥐의 왕으로서 말이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어둠이 그를 불렀고, 백흑쌍흉이라는 또 다른 어둠을 끌어들여 계획을 세웠다.
드르륵-!
기관 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감겨 있던 사마정의 눈이 떠졌다.
냄새를 맡는 그의 코가 몇 번이고 벌렁거리더니 고개가 기울어졌다.
‘백흑쌍흉은 알겠는데, 다른 하나는 누구지?’
혹시 당한 것일까?
그랬다면 지상의 상황을 훔쳐보고 있던 붉은 눈의 쥐가 이미 그를 찾아왔을 것이다. 어서 도망가자고 졸랐겠지. 한데 아직 소식이 없다. 두 가지 경우다. 붉은 눈의 쥐도 당한 것일까? 아니면 생각보다 쥐의 걸음이 느린 것일까? 사마정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붉은 눈의 쥐는 그에게 있어 목숨과 같은 동료였다. 여차하면 급하게 달아날 수 있는 구멍도 있으니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구멍도 마음껏 헤집을 수 있었다.
‘빠르군.’
예상치 못한 것은 기관을 통해 다가오는 세 사람의 속도다. 이 상태면 기다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한 마리를 살리고자 나머지 모두를 죽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안 되겠다.”
눈을 몇 번 깜빡일 정도의 짧은 시간.
웅크리고 있던 몸을 더욱 오므린 사마정이 작게 읊조렸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
찍찍찍찍.
그의 주변에 자리 잡은 붉은 눈의 쥐들도 그의 심정에 동의한다는 듯 크게 울어 댔다. 위험하다. 붉은 눈의 쥐들이 이만큼이나 경고를 발한 적은 몇 없었다.
‘빨리 달아나자.’
결심한 사마정의 몸이 땅속을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그가 있던 동공의 반대쪽 벽이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생각보다 움직임이 빨랐다.
그의 작은 몸이 좁은 통로를 향해 빨려 들 듯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서왕.”
아슬아슬하게 발목이 잡혀 다시금 동공으로 뽑혀지듯 끌려 나온 사마정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그의 품에 숨겨져 있던 여덟 가지의 암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그의 전방이 암기의 빗살로 가득 채워졌다. 심지어 각 암기의 날 끝에는 사천 당문에서 자랑하는 다섯 가지 맹독이 가득 묻어 있었다. 피할 틈새가 쥐구멍만큼도 없는 완벽한 함정을 만든 사마정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놈,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이다.’
절정을 벗어난 초절정의 고수라 한들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상대를 던져 버린 사마정은 정문으로 다가오고 있는 두 고수에게 벗어날 생각에 다시 쥐구멍으로 몸을 던지려 했다. 지금쯤이면 그를 붙잡은 상대는 무수히 쏟아진 암기에 전신에 구멍이 뚫린 채 맥없이 죽어 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한데 그의 발목을 움켜쥔 손에는 힘이 풀리지 않는다.
현란한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제자리에 선 젊은 청년의 얼굴에는 웃음만이 가득했다.
“짜식, 재미있는 장난감이 많네. 선탄비연, 굉천마고, 화룡탄……. 아주 갖가지도 한다.”
타다다당-!
가볍게 말하는 청년의 주변으로 다가간 암기들이 무언가에 막혀 사방으로 비산하고 튀어 오르며 부러진다.
‘호신강기?’
사마정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고작 호신강기로 막을 수 있는 암기의 숫자가 아니다.
아무리 호신강기가 대단한 방어력을 자랑한다지만 결국 내력을 소모하고, 그 한계는 분명한 법이었다. 실상 일반적인 호신강기로는 황준우가 읊은 암기 중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특히 굉천마고는 내력을 흩어 버리는 효능까지 갖추고 있기에 고수를 죽이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암기로 유명했다.
“끝났나?”
암기의 빗속에 당당히 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던 황준우가 하품을 하며 굳은 얼굴의 사마정을 내려놓는다. 아무런 제재도 폭력도 없다. 그저 편안하게 지면에 떨어졌다. 사마정은 몸을 곧장 바닥에 붙여 눈을 흘겼다.
‘달아날 수 있을까?’
쥐구멍은 하나가 아니다.
당장 황준우가 가리고 선 길 말고도 셋은 더 있다.
하나 지금 그 밑천을 보인다 한들 도망갈 수 있을까?
“머리 굴러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서왕. 오랜만인데 너무 섭섭하게 구는 것 아니냐?”
황준우의 말과 함께 두텁게 쌓아 두었던 철문이 부서지며 지친 표정의 백흑쌍노가 나타났다.
“주인, 시키는 대로 최대한 난동 부리며 왔습니다.”
“덕분에 힘 빠져 죽는 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인해 더욱 위기에 몰린 사마정은 탈출을 포기했다. 대신하여 그들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주인?’
백흑쌍흉.
한때 무림오흉이라 불려 추살령이 떨어졌던 시절도 있는 그들이다. 권력자들 중 몇몇은 그런 그들의 목숨을 빌미로 수하로 들어올 것을 요구한 바 있었다. 절정의 무공보다, 뛰어난 주술과 강시술에 탐을 낸 이들이었다. 하나 백흑쌍흉은 한 가지 부탁을 들어줄 때는 있어도 누군가의 밑에 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애초부터 백흑쌍흉이 세력을 등에 업고자 했다면 전 무림을 상대로 쫓기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놈들이 주인을 찾았다.’
정황상 그 주인은 눈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젊은 청년.
‘누구지?’
기억을 뒤진다.
정보를 찾고 이야기를 배합한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지만 그 과정을 지나치며 상대의 정체에 대한 윤곽을 만들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측할 수가 없다. 누굴까? 사마정은 이제 정보의 배합을 포기했다. 대신하여 감각을 일으켰다.
짐승처럼 날카롭게 솟은 그의 감이 눈앞의 청년의 정체를 파헤치려 한다.
“음, 알아보기 쉬운 모습은 아니지?”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주먹 위로 푸른 강기가 솟아오른다.
감보다, 기억이 먼저 반응했다.
웃고 있는 얼굴, 들어 올린 주먹, 피어오르는 푸른 강기.
‘다음은?’
찌이익-! 꿍-!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뻗어진 주먹이 이마에 다가오는 순간 사마정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지면에 박아 버렸다. 이미 겪은 적 있던 경험이 그의 몸을 강제로 이끈 것이다.
갑작스럽게 바닥에 머리를 박아 핏물이 줄줄 흘렀지만 고통은 뒷전이었다.
이 정도 아픔은 그에게 있어 별 어색한 일도 아니다.
그보다 떠오르는 기억 끝에 그려지는 얼굴이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두근, 두근.
어둠조차도 편안하다고 느끼는 사마정의 뇌리에 공포라는 두 단어가 떠올랐다. 온몸의 근육이 바짝 긴장하고 자잘한 솜털마저 곤두섰다. 뒷목이 긴장으로 뻐근하게 굳어졌다.
“설마, 설마…….”
떠오르는 기억과 가정을 부정하는 사마정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뻗은 주먹을 거둬들이고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젊은 청년의 얼굴이 있다. 참 곱다. 그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사람과는 너무나도 대조될 정도다. 눈매는 닮았다. 날카롭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하다. 감히 오래 눈을 마주칠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 외에 냄새, 완전히 다르다. 새사람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반로환동을 해도 냄새는 지울 수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더욱 두려운 사실은 그 가정이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칠야무신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없었지.’
사마정은 믿지 않았다.
이십여 년 전, 불성 원공에게 당해 천지에 빠져 죽었다는 칠야무신.
그가 누군가에게 당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소식과 소문이 난무할 때에도 사마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진짜 죽을 리 없다. 돌아올 것이다. 언젠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전 천하를 호령(號令)할 것이다.
하지만 이십여 년.
긴 시간 동안 그의 이름이 조금도 들려오지 않으면서 조금쯤 의심했었다.
어쩌면, 진짜 죽었을 수도.
하지만 결국 가정일 뿐이었다.
어쩌면은 만약의 하나의 경우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하면 모든 것이 납득이 된다.
눈앞의 청년이 진짜 칠야무신 황준우라면, 반로환동을 하여 냄새를 바꾸든 뭘 하든 이상하지 않다. 그는 그런 사내였다.
홀로 강호 전체와 싸웠던 절대의 무신(武神).
가정은 확신이 되었다.
떨리는 몸은 멈출 줄은 몰랐다.
눈앞의 청년이 진짜 칠야무신이라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백흑쌍흉이 주인으로 모시는 것, 그의 비장의 암기가 모두 파훼된 것,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 모든 연유가 단숨에 납득되었다.
“서왕, 사마정.”
“아아……!!”
확신은 완벽한 현실이 되었다.
전 중원에서 그의 본명을 아는 사람은 유일하게 단 한 명, 칠야무신 황준우뿐이었다.
“무신이시여!”
두려움 섞인 감탄을 토하며 두 눈을 감은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목을 빼 내밀었다.
죽음을 각오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잊는 그편이 좋다고 생각했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완전히 조아린 사마정을 내려다보는 황준우의 웃고 있던 눈에 작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사마정. 원래 묻지 않으려 했는데 얼굴을 보니 그럴 수가 없네.”
“…….”
“왜 배신했냐?”
“…….”
“왜, 하필 너였냐?”
“무신이시여…….”
“너만은 믿었었는데, 어째서 네가…….”
“…….”
웃고 있는 황준우의 볼 위로 가는 물방울이 흘렀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사마정의 양 눈에서도 눈물이 마구 치솟았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있어 차라리 편안한 것은 진실로 죽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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