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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40화 (40/373)

학사재생 40화

“…….”

맛있게 저녁을 먹던 중,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의문을 표하던 황준우의 눈에 점점 경악이 깃들었다.

“약속을 잊었던 건 아니겠지?”

“잊고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기억났겠구나.”

“네…….”

자신의 솔직함을 한탄하며 한숨을 내쉰 황준우가 황석후를 바라보았다.

방긋 미소 짓는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오빠, 어디 가?”

황서연의 물음에 대신 답을 한 것은 황석후였다.

“북경까지 보표를 맡아 나가게 되었다. 네 오빠도 성인이니 제 몫을 해야지.”

“우리 아들이라면 잘해 내리라 믿어, 후후.”

혹시나 하는 기대로 서시를 바라보았던 황준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보아하니 애초부터 이미 이야기를 끝내 놓은 게 분명했다.

‘그래, 원래 가기로 했던 거고…….’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다.

그간 놀고먹는 생활이 너무 좋아 잊고 있었지만 그의 집안은 엄연한 상가였다. 표국 일은 그중 제법 큰 사업채였고 말이다.

“그런데 북경까지나 가야 되는 건가요?”

“딱 좋은 일거리 아니더냐?”

“전혀요. 왕복하면 삼 개월은 우스울 텐데…….”

지난 한 달 동안 회복에 전념하느라 완전히 잊고 있던 사실이다. 덕분에 본래 계획했던 무공 수련과 공부 등 많은 것을 멀리할 수밖에 없던 날들. 그중 무공은 얼마 전 육단공의 벽을 허문만큼 어느 정도 여유를 두는 게 좋다지만 공부는 달랐다.

가을의 시작인 지금 출발해서 삼 개월의 북경 여정이 끝나면 향시까지 기껏해야 반년밖에 남지 않는다. 아무리 뇌력을 키우고, 상단전이 더욱 발달한 황준우라고는 하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선생님한테는 이미……?”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문물을 경험하고 겪는 것도 좋은 공부의 일환이 될 거라고 하시더구나.”

“……그런 분이셨죠.”

황석후는 만반의 준비를 끝내 둔 상태였다.

백교 역시 말로만 향시 이후에 놓아준다 했지 이미 반쯤은 놓아 버린 게 분명했다. 거듭 말해, 그조차도 다음 향시에서 떨어진다면 더욱 큰 반동으로 돌아올 테지만 말이다.

‘무서운 사람.’

백교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떤 황준우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어차피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깔끔하게 다녀오겠습니다. 언제 출발인가요?”

“내일 오후에 손님이 오시면 즉시 출발이다.”

“네……?”

“내일 오후라고 하였다.”

“아버지?”

각오는 했지만 당장 내일이라 하니 너무 뜬금없다.

반면 서시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롭게 웃음을 보이고 있었다.

“호호, 필요한 건 이미 다 챙겨 두었으니 마음 편히 다녀오렴. 이참에 참한 아가씨도 함께 데리고 돌아오면 더 좋고.”

“그건 안 돼!”

조금 고민하는 얼굴로 듣고 있던 황서연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친다.

여자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막상 여동생이 박차고 일어나 외치니 당황한 황준우가 물었다.

“그, 그, 그야 오빠는 아직 어리니까!”

“곧 약관이면 충분히 혼인할 나이도 되었단다.”

황석후가 그 광경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그, 그래도 안 돼요! 오빠 짝은 내가 직접 골라 줄 거야!!”

“너 친구도 몇 없잖아?”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제로 소주 내에서도 황서연과 친구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적었다.

심지어 성격 탓인지 그 대다수가 남자.

여자아이는 단 한 명으로 알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오빠가 굳이 여자를 데려오겠다면 내가 따라나서겠어!”

황서연의 다급한 외침을 막아선 것은 서시였다.

“미안하지만 우리 딸도 내일부터 바쁠 예정이란다.”

“무슨……?”

“백 선생에게 부탁해 네 공부도 함께 맡아 달라고 했단다. 깊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원시 정도는 합격한다면 좋겠지.”

“아빠!?”

황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황석후를 바라보았다.

“글공부가 끝난 이후에는 이 엄마와 원예와 다과에 대해 배워 보도록 하자꾸나.”

“워, 원예. 다과라니! 전 그런 것 못한다고요!”

“할 수 있어, 딸. 여자아이잖니.”

“겉모습만 여자아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제 속까지 여자아이가 되어 보자는 거란다.”

“아, 안 돼. 나 진짜 오빠 따라갈래. 오빠, 나 도와줘. 오빠?”

“잘 먹었습니다.”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부모님의 모습에 재빨리 젓가락을 내려놓은 황준우가 다급히 식탁에서 달아났다.

“오빠아! 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어!”

그 뒤를 황서연의 처절한 목소리가 잇따랐지만 어쩌겠는가? 세상 무엇으로부터라도 지켜 주겠노라 마음먹은 여동생이지만 부모님만큼은 무리였다.

‘저 두 사람이 저렇게 합심하면 나도 무섭다고. 힘내라, 내 동생.’

삼가 여동생의 명복을 비는 황준우였다.

다음 날 오전.

백교와의 간단한 오전 수업을 마친 황준우는 양손에 짐을 가득 쥔 채 장원 입구로 향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중 한 손은 모두 책으로 가득 찬 책 보따리였다. 보표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공부를 이어 나갈 생각으로 챙긴 것들이었다.

‘이 내가 책을 손에 들고 놓지 않을 줄이야.’

수불석권.

남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말이 황준우 본인에게 와 닿았다. 그만큼이나 이번 향시에 대한 위기감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크흡…….”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찍어 내는 척한 황준우가 뒤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장원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아 두겠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대신해서 보이는 것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경호와, 기둥 옆에 쭈그리고 숨어 기척을 감추고 있는 작은 소녀뿐이었다.

“연아……?”

황준우의 부름에 기둥 뒤에서 몸을 흠칫한 황서연이 말했다.

“저, 전 연이가 아닙니다.”

“몰래 도망치려고?”

“어머니, 아버지가 아시면 많이 혼날 텐데.”

“도, 도와줘, 오빠.”

“흠…….”

황준우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뒤돌아선 동생의 간절한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 부탁을 거절하기가 힘들다. 하나 저 멀리서 웃는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서시와 황석후를 이겨 내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오빠, 어제의 배신은 잊어 줄게. 오빠는 연이를 사랑하잖아? 그치? 난 오빠를 믿으니까 말이야.”

“연아…….”

황서연을 부르는 황준우의 시선은 저 멀리서 조금씩 달싹이는 서시의 입술로 향했다.

[잡으렴.]

느릿하지만 명확하게 전달된 그 의사를 외면하지 못한 황준우가 황서연의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오빠!”

그 행동을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의사로 받아들였는지 황서연의 두 눈에 감격이 깃들었다.

황준우로서는 해 줄 말이 하나뿐이었다.

“미안하다.”

“에……?”

“우리 연이가 아침부터 안 보인다 했더니, 여기 있었네.”

어느덧 바로 뒤로 다가온 서시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웃음을 흘린다. 분명 아름다운 모습일진대 어찌 이리 무서운지.

경악과 충격에 빠진 황서연의 눈동자를 외면한 황준우가 시선을 돌렸다.

“또 말해서, 미안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소리 없는 아우성을 휘저으며 서시의 손에 이끌려 가는 황서연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 못한 황준우의 시선이 저 먼 곳, 만금장의 정문을 향했다.

“서연이는 이제 해결된 듯하고, 너도 마음의 준비는 끝난 게냐?”

“어머니가 싸 주신 짐도 여기 있고.”

황준우가 책 보따리를 들고 있는 반대 쪽 손을 들어 올려 또 하나의 짐 꾸러미를 흔들었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비롯한 외부 활동에서 필요한 잡다한 작은 도구들이 그 안에 가득 있었다. 그 외의 큰 짐 등은 이미 짐말 위에 모두 실어 놓았다고 했으니 무언가 부족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책도 여기 가득 있습니다.”

“훌륭하구나. 공부에 대한 열의가 이토록 가득한데 정말 학문으로 이름을 높여 볼 생각은 없는 게냐?”

“단연코, 없습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 못 합니다. 차라리 가업을 물려받겠습니다.”

“네 생각보다 일거리가 많은데도?”

“평생 공자, 노자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황준우가 이렇게까지 할 정도면 말 다 한 셈. 그간 내심 반쯤은 포기하고 있던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도 약속대로 향시까진 치러 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장원은 못 되어도 합격은 해 보겠습니다.”

“그거면 됐다. 가자꾸나. 말 타는 법은 대충은 알고 있지?”

“……가르쳐 주신 적 없지 않습니까?”

“안 배워도 몸으로 하는 건 척척 해 내고는 했지 않느냐?”

“…….”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 허망하게 맞물렸다.

“설마…… 못 타는 건 아니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큼…… 믿는다.”

황석후가 당황한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앞장서 걸었다. 늘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황석후지만 빈틈은 있다. 황준우를 너무나 믿는 이러한 모습처럼 말이다.

그 모습을 조금은 귀엽다 느낀 황준우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물론 걱정은 있었다.

‘진짜 말 못 타면 어떻게 하지?’

까짓 거, 한 번 부딪쳐 보면 알 일이다.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입구에 도착해 화려한 마차를 둘러싼 표사와 금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을 본 황준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군요.”

“귀하신 분을 모시는 일이니까.”

“황족입니까?”

만금표국의 표사들을 제외한, 금색 무복을 입은 이들은 분명 금의위(錦衣衛)다. 황궁의 정예 병력으로 알려진 그들이 직접 보표에 나설 정도면 황족. 그것도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란 뜻이었다.

“왕족이시다.”

“왕족에 금의위까지 나섭니까?”

조금 의아했지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왕족이라 함은 황족의 핏줄에 속하는 바.

귀한 인물이면서도 금의위가 나설 수도 있는 환경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황준우의 입가로는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생각보단 편하겠는걸.’

만금표국의 표사들에 금의위까지 더해진 행렬이다.

어지간한 산적 떼는 물론 이름 좀 날린다는 마두(魔頭)도 함부로 들이대지 못할 게 분명했다. 여정은 길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가서 인사를 올리고 출발하도록 하자꾸나. 경호는 선두에 합류해 있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황석후의 말에 이번 황준우의 보표 활동을 따라나선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두를 향했다. 황준우의 호위무사란 직책 때문에 많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 역시 일류의 실력을 가진 표두급 무인이었다.

“근데 왕족이면 누굽니까? 이 근방이라고 하면 영왕 전하?”

경호가 앞서 나가고 황석후와 함께 마차를 향해 걷기 시작한 황준우가 물었다. 그런 황준우를 흘낏 바라보고는 살짝 웃음을 비춘 황석후가 말했다.

“보면 안다.”

“설마 보호해야 하는 대상까지 스스로 알아내야 되는 건 아니겠죠?”

“보면 안다니까.”

“정말 아버지도…….”

짧은 잡담을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의 걸음이 마차의 입구에 도착했다.

황준우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마차 안을 바라보았다.

‘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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