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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5화 (35/373)

학사재생 35화

“익히려면 검이 있어야겠네?”

“연무장에 걸린 것 아무거나 쓰면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지. 처음 검을 잡을 때일수록 검을 고르는 게 더 중요하단 말이야. 앞으로 평생 그 감각으로 살아갈 텐데 적당하게 해서는 안 되지.”

“언제는 도구 따위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면서!”

“기본이 우선이라는 뜻이야. 제 몸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도구에만 의존하는 건 분명 잘못되었으니까.”

전생에 비하자면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히 생각이 넓어진 황준우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천조칠무의 영향이 가장 컸다. 완전한 천조칠무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공이 향하는 방향 중 어느 쪽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무가 아닌 숲. 넓은 시야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주먹이 제일 편하긴 하지만…….’

근래 들어 다른 쪽에도 손을 뻗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많아졌다. 가깝다고 생각한 천조신공의 육단공조차 몇 년째 정체 중이란 사실도 한몫 거들었다.

‘천조칠무는 어째서 칠무로 만들어졌을까?’

스스로 창안할 당시에는 몰랐다.

한참 익히고 사용할 때에도 몰랐다.

단지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고, 그중 일부만을 사용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단지 그뿐으로도 황준우는 천하제일을 넘어 고금제일의 위명을 엿보았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둘러봤으면 진짜 고금제일이 됐을지도 모르지.’

어느 순간부터 여유를 가지자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조금 더 넓게 볼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검술……. 나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때가 됐어.’

천조칠무의 사무(四武)는 병장기술을 다루는 만병총례(萬病總例)다. 황서연이 검법을 말하며 황준우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좋아. 그럼 가 볼까?”

“어디를?”

“또 어딜 간단 말씀이십니까?”

두 사람의 상반된 반응에 헛웃음 지은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사고 치러 가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놀라지 말아 줄래, 경호? 일을 한다고 한 사람 확인차 가는 것뿐이야.”

“그거야 도련님이 하도 예측을 못 하게 행동하시니까…….”

경호의 시선에 두 눈을 얇게 뜬 황준우의 모습이 보였다. 더 이상 입을 놀리면 그 예측 못 할 행동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예감이 경호에게 찾아온 것 역시 동시였다.

“큼…… 그보다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흐음…….”

“하, 하하. 궁금합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무슨 일이야?”

황서연마저 눈을 반짝이며 묻자 그제야 얇은 눈을 거둔 황준우가 말했다.

“누구긴 누구겠어. 만총 영감 말하는 거지.”

이것저것 잡다한 상업 물품을 모두 취급하는 만금장의 철기 상업의 기반은 장원 입구 외곽에 위치한 만금철방(萬金鐵房)이었다. 상업의 대부분적인 면모에서 제일을 논하는 만금장이지만, 이 철기 사업만큼은 비교적 비주류에 속했다.

딱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단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앞다투는 철 기술을 가진 명장(名匠)들이 서로의 경험과 지혜, 지식을 나누며 최고의 장비를 이용하는 하남철상(河南鐵商)이 그 바닥을 워낙 강하게 휘어잡고 있는 탓이었다.

하남철상의 명장들이 가지고 있는 그 정신과 기술의 공유는 감히 따라 한다고 따라 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공식적으로 황석후가 그 부분에서만큼은 하남철상을 따를 수 없다고 밝힌 것 역시 제법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렇다고는 해서 만금철방의 대장장이들과 장비가 부족하냐고 하면 그 또한 결단코 아니었다.

하남철상에는 미치지 못한다지만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대장간의 이름에 만금철방의 이름은 꼭 들어갔다.

그러한 만금철방 내에 찾아온 손님인 만총은 첫날부터 시선을 끌어모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만금철방이 전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하지만 제일은 아니다. 하남철상이 대장간 중에서는 제일로 손에 뽑는다지만 그곳의 장(將)이 천하제일의 대장장이인 것 또한 아니다.

오로지 만총만이 천하제일 장인의 칭호 용장을 쓸 수 있다. 하남철상의 상표를 단 백 자루의 검보다 만총 홀로 만든 여덟 자루의 무기, 팔대용기가 더 귀한 취급을 받는 것은 직면한 사실이었다.

천하의 모든 철기 무기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팔대용기인 탓이다.

그런 그가 이십여 년에 가까운 세월 끝에 다시 망치를 들었다.

대장장이들의 시선은 두 가지로 엇갈렸다.

기대와 걱정.

그는 분명 최고였고, 아직까지도 최고라 불리지만 미래는 모른다. 오랜 시간 끝에 망치를 든 그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면 기껏 쌓은 명성에 흠이 갈 것이다. 그리고 그를 경쟁자라 여기는 이들은 그 작은 상처를 강제로 뜯어내고 녹여서 비집은 뒤 자신이 정상에 오를 기회만 보고 있을 터였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용장의 칭호란 그런 것이었다.

실상 만총을 이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망치를 들게 하지 못한 데에는 분명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그런 그가 다시 망치를 들었다.

주변 대장장이의 시선에 담겨 있듯, 그의 마음속에도 비슷한 감정이 있었다.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을까.

기껏 자랑해 놓고 볼품없는 꼴이나 보이지는 않을까.

그래도 결정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명성에 흠이 갈지라도, 실망시키게 된다고 하여도 당장 마음속에서 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그 감정을 쏟아 내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짐을 풀어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직해 왔던 보물을 푼 것은 그러한 감정의 폭발이 이끈 손길이었다.

그렇게 용장 만총은 아홉 번째, 그리고 열 번째 작품에 만년한철(萬年寒鐵)을 녹였다. 처음 그가 만년한철을 꺼내 들었을 때 주변의 장인들은 그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겉모습만 보자면 일반적인 강철과 다를 바 없으니 그렇게 생각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만총이 보름이 넘게끔 철을 다듬는 작업만 하고 있자 모두들 조금씩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뜨거운 화로에 들어가면 녹아서 흩어져야 할 철이 오히려 불을 꺼트리는 장면을 본 순간에는 깨달았다.

전설의 만년한철이 나타났다!

주변에 가득 찬 기대와 걱정은 더욱 불어났다.

그 속에서 만총은 계속해서 망치를 휘둘렀다.

그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열과 땀이 이끄는 대로 전력을 쏟아 냈다. 망치를 휘두르는 그 감각이, 철이 우는 소리가, 불길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지금의 너는 최고다.

‘최고의 실력으로, 최고를 만들 수 있어.’

탕-! 탕-!

철이 우는 소리에 맞춰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잊는다. 생각이 사라지고, 육체의 감각조차 잊었다. 그리고 시간조차 잊었다.

망치를 힘차게 내려친 만총의 볼은 어느덧 핼쑥하게 들어가 있었다. 눈 밑에 그려진 검은 그림자는 얼굴을 넘어 목 아래까지 쏟아져 내릴 듯했다.

하지만 두 눈빛만은 달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는 눈으로 동시에 완성한 두 무기를 바라보는 만총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열을 채웠다.

최고를 만들었다.

“정말 오래도 기다리게 하는군.”

그런 만총의 뒤편에서 조용하게 숨어 있던 기척이 말을 걸어왔다.

“와 계셨습니까?”

만총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누구보다 빨리 이 무기를 주인에게 자랑하고 싶었으니까, 그 기회가 이렇게 금방 찾아왔음을 즐겼다.

“예상한 시간보다 일 개월을 더 기다렸어. 어때, 그게 완성된 녀석들?”

팔짱을 풀며 아직도 모루 위에 올라 있는 두 자루의 검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예, 이 녀석들입니다. 좌측은 매영검(梅英劍). 아가씨의 것이고 우측은…….”

말을 하던 만총은 시선이 흐릿하다 느꼈다. 이후 세상이 한 바퀴 빙글 돈다는 생각도 했다. 넘어간다.

이 상태로 누워 눈을 감는다면 인생 최고의 자락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나 곁에 있던 황준우가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쓰러지는 만총을 재빨리 받쳐 들고 기운을 불어넣은 그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내 검의 이름은?”

“…….”

의식을 잃은 만총은 답이 없었다.

황준우의 입에서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식음을 모두 전폐하고 오로지 화로와 모루 앞에만 서 있었던 만총이었다. 아무리 지독한 대장장이라도 그렇게는 못 한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죽을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만총이 무공을 익히지 못했고, 뒤에 선 황준우가 틈틈이 기운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다면 분명 그리되었을지도 몰랐다.

“몸이 많이 쇠약해졌지만 다행히 큰 이상은 없습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시면 금방 쾌차하실 겁니다.”

젊은 의원의 짧은 소견에 걱정 가득하던 시선의 황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줄 알고…….”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황준우의 무심한 한마디에 황서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도 걱정이 될 수는 있는 거라고. 가끔 생각하지만 오빠는 너무 무심해.”

“내가? 무심하다고? 그럴 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이에게 그런 소리를 듣다니…… 이 오빠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구나.”

눈가 끝에 나오지도 않은 눈물을 찍은 황준우가 비련의 인물이 된 것처럼 고개를 꺾는다. 경호와 의원은 그 황당한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당사자인 황서연의 경우는 달랐다.

“아, 아니 그런 뜻은 절대 아니고! 그냥 조금 섭섭한 게 있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인데. 미안해!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런 의미가 아니었구나. 하지만 이미 한 번 생긴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되돌릴 수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꼬.”

“오빠아…….”

“큼, 큼.”

두 사람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던 경호가 짧은 헛기침을 흘렸다.

보고 있자면 그의 입장에서야 나름대로 즐겁기도 하지만, 이곳에는 시선이 더 있었다. 예를 들자면 소견을 말한 이후 어찌 해야 될지 모른 채 눈치만 보고 있는 의원이라든지 그런 사람 말이다.

“아, 맞다. 수고했어. 이만 가 봐도 좋아.”

“그, 그럼 이만. 또 일이 생기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손을 저어 후다닥 방 바깥을 빠져나가는 의원을 마중한 황준우가 다시금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이 오빠는…….”

“아니야아! 절대 아니라고! 연이는 오빠를 무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 우리 연이는 오빠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미안해, 오빠. 연이가 잘못했어. 응? 다시는 오빠한테 못된 소리 안 할게. 응?”

“정말?”

못 이긴 듯 눈을 얇게 뜬 황준우가 묻자 두 주먹을 꽉 움켜쥔 황서연이 고개를 크게 주억였다.

“정말!”

“믿어도 되겠지!?”

“오빠 걸고 약속!”

“정말이다!?”

“그렇다니까!”

“저…… 음음!”

두 사람이 떠드는 사이 방문 앞으로 다가온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헛기침을 흘렸다.

“장주님께서 소장주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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