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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1화 (31/373)

학사재생 31화

사실 처음부터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의 규모가 엄청난 탓에 심장이 떨려 그간 입술을 달싹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글쎄, 많이 들겠지?”

“고작 많이 정도가 아닙니다.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라는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장주님도 하지 못하셨던 일이겠습니까!?”

“아버지는 못 하신 게 아니라 안 하신 거야.”

적지 않은 세월을 만금장에서 나고 자라면서 본 것이 제법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만금장이 가진 금력이었다. 어릴 때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보고, 또 보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만금장이 갖추고 있는 금력은 뭘 떠올리든 그 상상 이상이다. 세간에서 알고 있는 바는 초월한 지 오래. 실상 황준우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 끝을 알려고 하는 바를 그만두었다. 짐작하건대, 황석후 마저 만금장의 전 재산이 얼마인지 모를지도 몰랐다.

그런 황석후였지만 남궁세가의 정보는 단편적인 것들로만 추려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간이 없으셨겠지.’

정보란 것이 그저 받으면 끝이 아니다.

직접 확인하고 거르고 또 따로 분류를 나누어야 한다.

그 귀찮은 작업을, 남궁세가쯤 되는 거대한 세력을 대상으로 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심력을 필요로 하겠는가? 말도 못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중요한 작업을 남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 능력을 발휘해 처리해야만 되는 일이다.

때문에 황준우가 이번에 팔을 걷고 나선 것이다.

다시 말해 창천단주 따위는 애초부터 그의 시선 밖이었다.

중요한건 남궁세가 그 자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손을 쓴 이상 철저하게 해 낸다. 만금장이 가진 금력과 그가 가진 무공은 그러한 철저함을 만드는 데 있어 최고의 창과 방패라고 칭하여도 부족함이 없었다.

“걱정 마. 별일 없을 테니까.”

황준우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결국 또다시 할 말을 잃은 경호가 입을 닫았다.

‘대체 이런 무지막지한 일처리 어디가 믿음직하다 느끼는 건지.’

스스로의 생각이 어이없다고 느끼면서도 뒷짐을 진 채 걸어가는 황준우의 모습이 유독 크게 다가온다고 느끼는 경호였다.

삼 주야의 시간이 더 흐르고 철개가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들고 황준우를 찾아왔다. 남궁세가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며 조금은 과장된 눈빛을 빛낸 그는 그 대가로 금자로 십만 문을 요구했다. 하나의 도시가 아닌, 성 하나를 통째로 살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개방 같은 거대한 단체라고 하여도 향후 삼에서 오 년간은 돈 걱정 없이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 고작 정보의 가격이라고 생각하면 비싸다. 하지만 귀한 정보 값이라고 생각하면 결코 과하지 않다.

“그래도 제법 양심적이네.”

황준우는 선뜻, 어렵지 않게 금자 십만 문을 철개의 바로 눈앞에서 만금전장의 직인이 찍힌 전표로 발행해 주었다.

지켜보고 있던 경호의 눈이 또 한 번 뒤집힌 순간이었다.

‘장주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어쩌시려고…….’

물론 황석후는 그런 황준우의 동태와 행동을 모두 알고 있었다. 연달아 올라오는 보고의 정점을 찍은 금자 십만 문짜리 전표는 황석후마저 조금 놀라게 했으나 딱 그 정도였다. 오히려 흑표의 보고가 끝난 이후 큰 웃음마저 터트렸다.

“금자 십만 문에 앞으로 남궁세가에게 양보할 일이 없게 됐다면 남는 장사지. 남는 장사야, 하하!”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황준우는 노도하는 해일과 같이 막힘없이 손을 쓰고 일을 해 나갔다. 필요한 자금은 한 번에 금자 십만 문을 뿌려도 문제없을 정도로 가득했으며 그 엄청난 정보를 정리하는 능력은 황준우 본인이 갖추고 있었다. 전생이었다면 하려고 해도 못 할 일이었지만 새로 태어난 이후 나름대로 학문에 열을 쏟은 데다, 그를 받치기 위해 뇌력까지 키운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또다세 세 번의 밤과 낮.

그 시간 동안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않은 채 남궁세가의 자료 정리에만 열을 쏟던 황준우가 몸을 일으켰다.

“끝났다! 진짜 두 번 다신 안 해!”

칼을 뽑았으니 힘껏 휘둘렀지만 성향에 맞지 않는 일인 건 분명했음이다.

황준우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침실에 들러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내가 알던 도련님이 맞는 건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며칠을 훌쩍 보낸 황준우가 잠든 모습을 좁은 틈 너머로 바라보던 경호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는다. 지난 며칠간 보았던 황준우는 그가 알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때문에 더 마음이 든든했다.

‘집안일이라고 생각하신 거겠지.’

가족, 그리고 만금장의 식솔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일을 저렇게까지 힘내서 벌였을 것이다. 결과가 어떨지는 사실 경호가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정보에 대해 해박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조차 잘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황준우라면 잘해 낼 것이다. 믿음이 가득 차는 감정에 미소를 보이는 경호의 등 뒤로 조용한 기척이 다가왔다.

“이제야 잠들었나 보군요.”

“아, 백 선생님.”

경호가 재빨리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백교는 황준우가 창천단주를 상대로 남궁세가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한 이후로 굳이 그를 찾지 않았다.

본래 어떻게든 자리에 앉혀 강제로 공부를 시키는 편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저라도 소식을 전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쯤이야 눈치로 알아봐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후후.”

백교는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며 방금 전 닫힌 황준우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습.

그를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던 백교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어른이 되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황준우를 지켜봐 온 두 사람이었다. 그때부터 나이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번 일을 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진짜 다 컸다는 생각이 몇 번이고 들었다.

“정말 향시만 합격하면 놓아줘야겠습니다. 이미 제 품을 떠난 제자예요.”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경호의 물음에 방문을 닫은 백교가 고개를 내젓는다.

“오히려 기쁘지요. 여태껏 몇 명의 제자를 키웠지만, 소장주 만한 아이는 없었으니까요. 아, 재능을 말하는 건 결코 아니랍니다.”

“하면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건지……?”

“배워서 안다고 하여 전부가 아니지요. 알고 스스로 얼마나 행하느냐. 공, 맹의 말씀을 따른 효(孝)와 인정(人情), 그리고 도리를 소장주는 제가 가르친 제자 중 누구보다 훌륭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장차 큰 인물이 될 거예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제가 다 기쁘네요.”

어색하게 웃는 경호를 바라본 백교가 부채를 넓게 펼쳤다.

“옆에서 많이 도와주세요. 경 무사님 같은 분이 있기에 저 아이가 더 훌륭히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사람을 알려 주셨지요.”

“후훗.”

의문을 표하는 경호에게 기묘한 웃음을 보인 백교의 신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언제나 신출귀몰하시는구먼.”

붙잡을 새도 없이 백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경호의 얼굴 위로는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찌 됐든 그가 황준우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흡족하다.

때문에 조금 더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큰 힘이 되어 드려야지.’

매일매일 같은 다짐을 하는 경호였다.

황준우는 그동안 부족했던 잠을 한 번에 충족하듯 이 주야 내내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방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먹었다. 마찬가지로 여태껏 먹지 못했던 한을 풀어내듯 잔뜩 먹은 것이다. 보고 있던 경호가 또 한 번 질릴 만큼 음식을 가득 먹은 황준우가 자신의 배를 통통 두들기며 창밖을 바라본다. 점점 더 높이 떠오르는 해를 조금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어렸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경호가 의문을 표하기 무섭게, 시녀 하나가 다급한 걸음으로 황준우를 향해 뛰어왔다.

“남궁세가의 창천단주가 찾아왔습니다. 장주님을 찾아 가니 소장주님께 가라고…….”

“가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황준우가 뒷짐을 진 채 앞으로 걸어 나간다.

놀란 눈빛의 시녀와 경호가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삼 주야간 철개가 남궁세가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 정보를 정리한 후 황준우는 생각했었다. 진짜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것을 모아 왔다. 개방으로서도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금자 십만 문은 사실 조금 아까웠어.’

필요한 투자였다지만, 역시 남한테 주기에는 아까운 금액이다. 때문에 황준우는 단순히 정보를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획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까짓것, 정보 단체 하나 만들면 되겠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정보란 것이 그리 쉽게 모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를 관리할 사람을 찾는 건 몇 배나 어렵다. 하지만 황준우는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법이니까.’

물론 정보 단체를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그 정도로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제대로 된 조직을 만들려면 남궁세가 전체에 대한 정보를 사는 데 쓴 금자 십만 문쯤은 우스울 정도로 천문한적인 투자가 벌어져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 만금장에는 그만한 재력과 여유가 있다. 황준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다른 곳에 존재했다.

‘내가 직접 하기엔 너무 귀찮단 말이야.’

일을 지시하고 판을 벌리는 것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세세하게 파고들기 시작하면 너무나 복잡해지고 만다. 이번 남궁세가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확실히 굳힐 수 있었다.

“사람이 필요해, 사람. 똑똑한 녀석으로…….”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준우의 혼잣말에 경호가 되물어 온다.

“아아, 아니야. 그나저나 다 왔군.”

손을 휘휘 저어 경호와 함께 생각까지 떨쳐 낸 황준우가 접객당의 문고리를 잡았다. 내부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기세가 사뭇 흉흉하다. 여선위에게 말조차 꺼내 보지 못하고 쫓겨난 것에 대한 나름의 보복인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착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런 분위기란 말이지?’

흉흉하고 날카롭고, 끈적한 분위기.

황준우에게는 아주 익숙하다.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남궁장언의 눈을 본 순간 더욱 확신했다.

‘예상만큼이나 쉽겠네.’

황준우는 뒷짐 자세도 풀지 않은 채 하품을 하며 남궁장언의 맞은편에 앉았다.

“흐음…….”

그런 황준우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궁장언이 옅은 신음을 흘린다. 팔짱을 낀 채 그런 남궁장언을 바라보는 황준우는 지루한 시선을 보였다.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마치 여선위와 남궁호, 남궁혁 등이 만났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압박하며 기세를 일으키는 것은 남궁장언 쪽이라는 사실과, 그를 받아들이는 황준우가 여유롭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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