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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9화 (29/373)

학사재생 29화

그런 그들을 묵묵한 눈빛으로 반 시진 동안 쳐다보던 여선위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시간이 제법 흘렀군. 할 말은 없는 것 같으니 이만하지. 돌아가도록.”

그 말과 함께 거대한 덩치의 여선위가 접객당 바깥을 나선다. 남궁호와 남궁혁, 할 말이 많은 두 사람 중 누구도 감히 그를 잡지 못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서 빨리 이 자리를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뿐이 없었으니 말이다.

“우선 돌아가지.”

“그게 좋겠어.”

물론 돌아가면 후회할 것이다.

이 주야나 기다려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자신들을 책망하겠지. 곧 있으면 도착할 창천단주의 불호령이 두려워 밤잠을 설치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당장은 먼 창천단주의 위협보다, 가까운 여선위의 눈빛이 더욱 무서운 것을.

결국 남궁호와 남궁혁은 각자가 이끄는 남궁세가의 무인들과 함께 빈손으로 만금장을 떠났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황석후의 작은 집무실 안, 그 안에 거대한 덩치의 여선위가 들어서니 더욱 비좁아 보인다. 하나 시선을 마주한 채 찻잔을 들어 올리는 두 사람의 눈에는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그래, 그냥 물러가시던가?”

“달리 할 말이 있겠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떨어지지 말아야지요.”

무시무시한 여선위의 말에 부드러운 웃음을 그린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고맙네. 수고했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따지자면 대표두가 해 줄 일은 아니었지. 내 개인적인 부탁이었으니.”

“제가 충심으로 믿고 따르는 이는 오로지 장주님뿐입니다. 하니 개인적이라는 말씀은 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개를 들어 충직한 눈을 빛내는 여선위를 마주한 황석후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고맙네.”

“……아마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이번에 찾아온 이들이 남궁호와 남궁혁이라고 했던가?”

“애송이들입니다. 하지만 창천단주는 다릅니다.”

여선위는 몇 번 마주한 적 있던 창천단주 남궁장언을 떠올렸다. 가는눈에 음험한 기운을 가득 두른 그는 정도의 대표 세력이라는 남궁세가의 대표 외부 무력 집단이라는 창천단주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모순적이게도 때문에 그가 창천단주로 선택되었다. 남궁세가 바깥에서의 일은 언제나 정의롭지만은 않다. 치열하고, 지독하고, 때론 비열하다. 때문에 남궁장언이 창천단주로 어울렸다. 그는 양심이나 명분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남궁세가를 위해서만 일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궁세가에 자리 잡은 자신을 위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남궁전혁의 인사는 훌륭했다.

무력으로 치자면 별것도 아닌 상대였지만, 교묘하게 명분을 파고들어 오는 남궁장언은 여선위로서는 상대하기 곤란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가장 전장에서 만나고 싶은 남궁세가의 인물이기도 했고 말이다.

“번거로운 인물인 건 사실이지. 그래도 목적이 뻔해서야…… 이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지 않나.”

“장주님은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알고 계셨습니까?”

질문을 한 여선위가 아차 하는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하긴, 장주님께서 모르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그리 보아 주니 참 부담되는구먼. 한낮 옹이구멍 눈으로 세상을 보는 입장이거늘…….”

“그래도 제가 보아 온 장주님은 여태껏 모르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없기는. 지금만 해도 모르는 것투성이네. 내 아들놈 속내라든지, 부인의 마음이라든지, 요즘엔 딸아이도 어려워. 하하!”

“그렇습니까.”

“모르겠으면 자네도 결혼을 해 보게. 이 심정 다 이해할 거야. 몰라도 마냥 좋은 게 있는, 그런 것 말일세. 후후.”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노력이 아니라 실천을 해 보게. 어쨌든 한 보름 후쯤에나 다시 찾아올 것 같으니 그 전까지는 신경 꺼 두도록 하지. 별 큰 문제도 아니고 말이야.”

“보름 후에도 제가 갑니까?”

“아니, 자네는 달리 할 일이 있어.”

황석후가 자연스럽게 손으로 날린 종이 한 장에는 황궁까지 향하는 표물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연왕께서 직접 부탁한 일이라, 자네에게 맡기고 싶네만.”

“이 주야 뒤에 곧바로 출발하는군요.”

“돌아온 지 고작 하룻밤 지났는데, 조금 가혹하지?”

돌아오자마자 남궁세가의 손님들을 맞이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표행에 나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선위의 얼굴에는 조금의 불만도 보이지 않았다.

“받은 만큼 일해야지요. 봉급도 적지 않은데.”

“하하, 그런가?”

“다녀올 때까지 건강히만 계시면 됩니다.”

“보시다시피 너무 건강해서 탈이네.”

“믿고 있습니다.”

“고마워.”

“저도 늘 감사합니다.”

서로를 향해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후, 여선위가 등을 돌려 바깥을 향했다. 이 주야 뒤에 또 다시 표행에 출발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착출해야 되는 인원은 더 많고 말이다.

“아, 녀석은 잘하고 있습니까?”

“누구? 아…… 흑표.”

여선위가 군을 떠날 당시, 유일하게 그 뒤를 따랐던 인물은 이제 황석후의 그림자가 되어 산다.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림자를 맡길 수 있다는 뜻은 그만큼 신의 있고 능력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최고지.”

“그러면 됐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가벼운 걸음의 여선위가 멀어진다.

혹시나 있을 만약의 사태에도, 흑표라면 믿을 수 있다.

여선위의 생각에 황석후 역시 크게 동감하는 바였다.

다만…….

“요즘엔 아들놈이 더 든든해서 말이지.”

때문에 이참에 한 번 일을 시켜 볼까도 싶었다.

“애초에 제 몫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한 번은 해 봐야지.”

그 첫 상대가 남궁세가라면 더욱 괜찮다.

소주에서 만금장의 식솔로 태어난 이상 어떻게든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대니 말이다.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기대가 더 되었다.

“남궁장언이 과연 우리 준우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서류를 훑어보는 황석후의 입가로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황준우와 황서연은 만금장에 있어 엄연하게도 어린 주인이었다. 가족을 비롯한 그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식솔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 당장에야 황석후가 건장한 만큼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또 아니었다. 권리를 가진 자리에 오르려면 그만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책임을 지는 데 능력이 필요한 것 또한 당연했다. 물론, 기왕이면 두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능력을 통한 업적이 있으면 더욱 좋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만금장의 피와 살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식솔들이 후대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을 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 남궁세가라는 상대는 적절했다.

남기에 자리 잡은 이상 여러모로 가장 많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대.

서로 직접 검을 뽑아 피를 볼 정도의 일은 없었지만 굳이 따져서 엄연한 적(敵)이다.

“눈치 볼 필요 없다고 하시는 의미겠지?”

전날 밤, 저녁 식사 시간에 갑작스럽게 전해진 황석후의 의견이었으나 황준우는 크게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그동안 충분히 놀고먹었지.”

실상 열일곱이면 가정을 차려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다. 오히려 늦다면 늦은 시기였다.

“조금쯤은 긴장하셔야 되지 않을까요?”

“내가? 왜?”

“상대가 그 남궁세가의 창천단주니까요.”

오히려 황준우의 여유에 머리를 싸매고 안절부절못하는 이는 경호였다.

“그게 왜?”

“동네 왈패나 삼류 흑도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럼 우리 집은 동네 왈패나 삼류 흑도쯤 되나?”

“무슨 그런 말씀을! 만금장은 소주를 벗어나 천하제일의 상단입니다. 지금의 장주님을 비롯한 선대께서 가장 밑바닥부터 쌓아 올린 그 기틀이 올곧고 정의로움을 역사가 증명할진대, 어찌 삼류 왈패 따위와 비교하신단 말이십니까!?”

놀란 표정의 경호가 얼굴을 붉히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황준우의 입가로는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걱정할 것 없네. 남궁세가니 뭐니 해도 우리가 더 대단하다는 것 아니야?”

“어, 그건…… 맞는 말씀이십니다만…….”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소리치던 경호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따지자면 남궁세가 역시 오랜 시간 남기에 군림한 무림 정도 문파 세력으로, 역사만 치자면 만금장보다 더 길었다. 이곳 소주에서는 그 입김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남기 전체를 따지자면 분명 만금장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가졌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옳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만금장이 남궁세가보다 못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경호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을 수 있었다. 황준우의 말마따나 만금장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언제나 말하지만 경호는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나이가 들수록 더 고지식해지는 것도 같고. 딱딱해, 딱딱해. 돌 같은 어른이 되어 가고 있어. 어서 우리 경호가 장가를 가야 조금 부드러워질 텐데.”

“도련님이 그렇게 여유로우시니 저라도 고지식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장가 이야기는 왜 나옵니까. 장가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니까 그렇지. 솔직히 올해로 경호 나이가 몇인데? 지금쯤이면 노총각도 벗어나서…… 헉. 설마 경호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지? 내가 여태껏 신경 써 주지 못했는데…….”

“아닙니다!”

“아니면 말고. 내가 미안해.”

황준우의 빠른 사과에 다시 한 번 핏대를 세우려던 경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화낸다고 먹힐 사람이었으면 애초부터 그가 걱정도 안 했다.

“……뭔가 굉장히 억울합니다.”

“억울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알아서 처리하라고 맡겨 놓으셔 놓고 아무것도 안 알려 주시다니.”

실제로 황석후는 황준우에게 조만간 창천단주가 찾아올 것이며, 그가 만금장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니 알아서 처리하라고만 하였다.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언제쯤 올지,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려 주지 않은 것이다.

‘분명히 다 알고 계실 텐데 말이지.’

묻지도 않았지만,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뻔했다.

황석후는 황준우가 이번 일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 있어 단서는 이미 충분히 던져 준 상태였다.

만금장의 소장주(小場主)로서 일을 하여라.

언뜻 듣자면 제 몫을 하라고 들리지만 조금 돌려 생각하면 다른 의미가 곧장 떠올랐다.

“경호, 물어볼 게 있는데.”

“어떤 것입니까?”

방금 전까지 노발대발한 주제에, 곧장 얼굴을 펴고 물어오는 경호를 향해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물었다.

“만금장 소장주의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

“글쎄요……, 장주님의 인계에 따라 다르지만 아마 어마어마하지 않겠습니까. 한데 그건 왜?”

“왜긴, 필요하니까 그러지. 어쨌든 경호도 잘 모른다는 말이지? 그럼 아버지가 말릴 때까지 막 해 보지, 뭐.”

피식 웃은 황준우가 뒷짐을 진 채 앞으로 걸어 나간다.

조금 멍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경호의 시선에 다시 한 번 걱정이 어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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