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7화
“그나저나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게 아닐까…….”
제 이름을 밝히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팔대용기의 제작자 만총은 유명하지만, 그 이름이 또 드문 편은 아니다. 무엇보다 근래 들어서는 망치를 들어 무엇을 완성한 적이 없는 만큼, 아직 젊은 두 남녀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또 어이없게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허허허.”
만약 그렇다면 팔을 걷어붙이고 실력이라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그 팔대용기의 만총임을 증명하는 수는 직접 망치를 드는 방법 말고는 없었으니 말이다.
다행히 만총이 자신을 검증하기 위해서까지 실력을 보일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두 남매의 모습을 확인한 만총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탄성을 내질렀다.
“어, 할아버지?”
황준우의 부름에 따라 접객당까지 온 황서연이 먼저 의문을 표했다. 누군가 찾아오고, 그 이름까지 들었으나 얼마 전 골목길에서 본 그의 얼굴을 떠올리지는 못했던 탓이다.
“허허허, 이리 또 보게 되니 진심으로 반갑구려.”
“나도 반갑네.”
너털웃음을 흘리는 만총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이윽고 세 사람이 자리에 앉고 따뜻한 용정차 두 잔이 더 올라왔다.
“참 노망난 늙은이의 헛소리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두 분 모두 너무 많이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아,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오셨구나.”
대체 어떻게 된 사정일까?
눈치만 보고 있던 황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의문은 해소된 듯했고 별다른 감정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보고 싶어 찾아왔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을 찾는 데 있어 그보다 절박한 이유가 또 어디에 있을까? 황서연은 만총의 심정을 충분히 납득하고 있었다. 그 순수한 표정과 행동에 만총의 입가로는 또다시 웃음이 흘렀다.
“허허허…… 좋구나, 너무 좋아.”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순수한 아가씨의 모습이 너무 좋아 한 말입니다.”
“제가요?”
황서연이 자신을 가리키며 귀를 쫑긋 세웠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칭찬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제법 좋았다.
“이거 소개가 늦었구려. 이미 들으셔서 알겠지만 노부는 만총이라고 합니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철을 좀 다루는 편이지요.”
“대장장이 만총.”
“저를 아시는군요.”
만총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기꺼운 얼굴을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인다.
“조금 알지.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아닌 줄 알았는데…….”
조금은 아련한 감정으로 입을 연 황준우가 일전에 보았을 때에 비해 생기가 넘치는 만총을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여전히 힘이 넘쳐 보이는군.”
“허어…… 조금이 아니라 제법 아시는 것 같은데.”
만총도 황준우의 목소리에서 아련함을 읽었다.
다만 그 아련함의 연유를 알 수가 없기에 의문은 느껴졌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테고. 우리 둘을 찾아온 이유가 단지 보고 싶어서? 보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고?”
“단도직입적이시군요.”
“복잡한 건 별로 안 좋아해서.”
만총의 눈에 황준우는 확실히 황서연과 달랐다. 곱고 순수한 듯 보이지만 거칠다. 그리고 황서연과 달리 어린 나이에 제법 세상맛을 아는 것도 같았다. 다시 보아도 기묘한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안도도 되었다. 처음 느꼈던 감각 그대로였다.
“두 분을 보고 싶은 건 우선 진심입니다. 기왕이면 곁에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라고 있고요.”
“우리를요?”
황서연도 이쯤 되자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의문을 흘렸다. 보고 싶은 마음에 한 번쯤 집에 들를 수는 있다. 하나 곁에서 자주 보고 싶은 것은 또 다르다. 그만큼 깊은 감정, 혹은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예, 이미 말씀드린 바 있듯 노부는 대장장입니다. 그리고 처음 두 분을 본 순간부터 그 뭐랄까…….”
“설마, 사랑?”
참으로 소녀다운 질문을 던진 황서연이 혀를 쏙 빼 내밀었다.
“농담이에요.”
“허허…… 늙은이 놀리면 못쓴답니다, 아가씨.”
“죄송해요. 그래서 뒷이야기는 어떤 거예요. 궁금해요.”
“영감이라고 해야 할까, 운명을 느꼈습니다.”
“대장장이의 사랑 고백인가.”
“정말 그러실 겁니까?”
황준우마저 농담을 던지자 만총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받는다. 하나 두 눈과 입은 웃고 있는 채였다. 처음 보는 자신을 향해 자연스럽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어 주는 두 남매를 보고 있는 것 또한 그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어찌 됐든, 두 분 다 무공을 익히셨지요.”
황서연이 답하고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서 보잘것없는 재주나마 부려 두 분을 위한 무기를 만들어 드리고 싶은데 그게 잠깐 본다고 운명의 느낌이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서 말이지요. 허락만 하신다면 곁에 머물며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마침 장소는 만금장.
천하의 문물 중 취급하지 않는 것을 찾기 힘든 곳인 만큼 대장장이를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만총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무림 방파나 세가, 혹은 군가(軍家)보다 마음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무기를 만들어 주신다고요?”
본론이 끝나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황서연이 곧 무언가를 알아챘다는 듯 강하게 박수를 쳤다.
“아, 혹시 얼마 전 소주에 왔다는 이름난 장인이 할아버지? 황제 폐하께서도 인정하신?”
“그런 때도 있었지요.”
“와아-! 대박!”
감추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토로한 황서연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총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면 막 할아버지가 만든 물건에서는 빛이 나고 불도 뿜어져 나오고 그래요? 막막, 번개도 우르르 떨어지고. 그런 거예요?”
“……그러지는 않습니다. 저는 대장장이지 요술사(妖術士)나 주술사(呪術師)가 아니니까요.”
“에이, 아쉽다.”
“…….”
“노, 농담이에요.”
정말로 기대했던 것이 분명한 눈빛을 한 황서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큼, 어쨌든 불이 날아가고 번개를 쏟아 내지는 못하지만 훌륭하게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거듭 말해 허락만 해 주신다면…….”
“진짜 무인이라면 무기 따위는 상관없다고 생각해. 그런 도구에 의존하면 약해지는 법이니까.”
“…….”
갑작스럽게 끼어든 황준우의 말에 동그랗게 뜬 만총의 눈이 떨렸다. 다시 한 번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긴 머리카락, 야성적인 눈매, 자신만만하게 웃던 이십여 년 전의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한참을 연인처럼 찾아다녔던 인물이라 그럴까? 그저 떠올릴 수 있는 것만으로 눈가에 눈물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그래도, 영감의 실력이면 제법 믿을 만하다고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부탁할게. 좋은 무기를 만들어 줘. 나를 제쳐 놓고라도, 이 녀석에게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제 동생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황준우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이전과 같지만 또 다르다.
그때의 사내와 달리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은 황준우를 보며 감격에 젖은 만총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시면 됩니다. 저 만총, 아가씨뿐만 아니라 소장주님께도 도움이 될 정도로 훌륭한 무기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제 가슴의 영혼을 걸고요.”
한 손으로 제 왼쪽 가슴을 강하게 두들긴 만총이 말한다. 그 모습을 즐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기대할게.”
“저도요!”
황서연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그렇게 만총의 만금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2. 창천단
이런 말이 있다. 돈을 쓰기를 원하는 자들과, 그 돈을 얻기를 원하는 자, 소주로 가라. 천하만민(天下萬民) 중 대다수가 그 둘 중 하나에 속하니 소주에는 언제나 사람이 붐빌 수밖에 없다. 굳이 소주에 거주하는 이들이 아니더라도 외지인들의 방문이 잦았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무림인의 수는 더욱 많았다. 당장 내일 죽을지 모르는 그들은 무거운 주머니를 조금 더 고급스럽고, 강렬한 경험에 풀고자 한다. 소주와 항주, 수많은 유흥거리와 고급 문물이 들어선 두 곳은 칼 밥 먹는 무림인들의 천상과 다름없는 장소인 셈이었다.
때문에 소주의 주민과 상인들은 타지에 비해 무림인에 대해 꽤나 적응이 되어 있고 그들에 대한 인식도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말한 바 있듯, 무림인은 돈을 쓰러 온다. 가끔 배짱을 부리려는 정신 나간 녀석들도 있었지만 치안이 좋은 소주에서 허리춤에 검 좀 찼다고 난동 부렸다가는 곧장 관아행이다. 굳이 관아가 나서지 못할 때라고 하여도 도시 이곳저곳에 있는 만금장의 무인들이 가만히 두고 보는 경우도 없다. 덕분에 소주의 상인들은 별다른 위험이나 어둠 속 집단과의 타협 없이, 무림인들로부터 생계를 지키고 수입을 얻고 있었다.
제법 좋은 공생 관계이지만 소주의 주민들이라고 하여 모든 무림인을 좋아할 수 없는 경우 또한 존재하는 법이었다.
관과 만금장의 협력에 대다수의 무림인들은 무모한 난동을 자제하지만, 꼭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니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 말하자면 눈에 띄는 흰색 무복에 왼쪽 가슴 춤에 청색 실로 수놓은 검의 문양을 자랑하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바로 그 축에 속했다.
청학객점.
소주 내에서도 음식이 값싸고 맛나기로 소문난 객점의 입구로 남궁세가의 무인들 수십이 동시에 들어섰다.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던 주민들의 인상이 곱지 않게 일그러졌다.
“저 녀석들이 또 여긴 왜 온 거야.”
“많이도 왔군. 만금장에 싸움이라도 걸러 온 건가?”
“고작 저 숫자로?”
“시비 정도는 걸 만하지.”
“자자, 그만하지. 이런 이야기 하다가 괜히 우리까지 휘말리는 수가 있어.”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남궁세가 무인들의 귀를 간질였다.
소주만 들어서면 이 꼴이다.
이를 제외하자면 남기에 속한 땅 어디를 가든 그들은 최고다.
창천(蒼天)을 등에 업은 검인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거나 인상을 찌푸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심지어 이렇게 대놓고나 마찬가지인 뒷담을 까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됐든 대다수 남기 주민들은 그들의 비호(庇護) 아래 평화를 얻고 삶을 유지한다.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목숨과 생계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데 남궁세가의 영향력이 없는 소주에만 들어오면 꼭 이와 같은 일에 시달린다.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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