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6화
1. 만총, 만금장에 들다
“조만간 향시를 치르셔야지요.”
백교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든 황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향시요?”
“예. 조금 이른 나이지만 학문에 대한 이해도 좋고 지혜도 깊으니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저 원시 치고 온 지 이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년 향시를 봐야지요.”
“…….”
황준우의 머릿속에 절로 작년 원시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시험을 눈앞에 둔 백교는 그야말로 악마와 같은 스승이었다.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게 하지 않았으며 밤에 잠자는 시간조차 줄일 수밖에 없게 과제를 내주었다. 그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는? 백교는 딱히 매를 들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았다. 단지 웃으며 그보다 곱절 많은 과제를 내주었을 뿐이다. 덕분에 원시에서 장원이라는 결과를 만들기는 했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황준우에게 눈곱만큼도 없었다.
“선생님…… 아직도 밤에 시험 생각만 하면 치를 떠는 게 저란 사람입니다. 한데 벌써 향시라니요? 거듭 말해 너무 이릅니다.”
“또 말해 이르지 않습니다.”
부채를 접은 백교가 가는눈으로 황준우를 바라본다.
몸에서는 보이지 않는 기세가 일어나는 것 같다.
‘…….’
자연스레 황준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맺혔다.
‘이젠 거의 반 본능적이네, 원.’
어린 시절도 아니고 이미 육체의 성장을 거의 이룬 데에다 전생의 무공을 넘어선 황준우의 눈에는 백교가 어떠한 수준까지 이른 무림인인지 훤히 보였다. 전생에 만났던 우내십존, 그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위치한 검선이나 불성과 동급에 속한 초고수다. 실력을 선보이기만 한다면 당장 강호 전체를 울릴 만큼 이름을 떨칠 정도. 하나 그는 손에 날카로운 날붙이를 드는 대신 책과 부채를 들었다. 굳이 실력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사실 그런 부분은 황준우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백교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고, 예상보다 조금 더 강하긴 했지만 그뿐이다.
전생의 황준우는 그 우내십존 전체를 상대로 싸워도 밀리지 않던 천하제일고수였다. 아무리 백교가 대단하다 하여도 당장 맞붙는다면 십수(十手) 안에 제압할 수 있을 터다. 한데도 여전히 백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만 보면 등 뒤로 식은땀이 난다. 굳이 움직이지 않은 내력이 일어나 기세를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부모님인 황석후와 서시를 상대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무력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고 스승이기 때문에 감히 엄두가 안 난다.
전생에서는 그 인연이 모두 얕거나 없었다.
때문에 알지 못했던 감정과 마음을 황준우는 이제야 배우고 있었다. 물론 때로는 반항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 실제로 그러기도 하였지만 결국 고개를 숙이게 되어 버린다.
“생각만 해 보겠습니다, 생각만.”
“우후후.”
그제야 웃음을 보인 백교가 다시 부채를 펼쳤다.
“제가 이렇게 억지로 시키는 것만 같지만 아무런 대가가 없는 건 아니랍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내년에 향시에 합격하시면 더 이상 이 시간에 필수적으로 공부를 하러 나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말에 황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주 어린 시절 백교를 만난 이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틀에 한 번 두 시진을 꼬박 책상 앞에 강제 공부를 해야만 했던 황준우였다. 처음에는 반발심과 불만만 있었지만 나중에 와서는 그조차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유학의 가르침 속에서 깨달음도 얻고 지적 충족감을 느껴 보기도 했다. 무공을 익히는 것과는 분명 또 다른 재미였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부가 좋아진 것은 역시 아니었다. 어찌 됐든 그런 시간이 너무나 당연하고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는데 향시만 합격하면 이제 끝이라고 한다. 이는 정말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이미 대인께도 동의를 받아 놓은 일입니다. 향시를 합격하면 공자께서는 거인(擧人)이 됩니다. 아십니까?”
“모를 리가 없지요.”
“거인이라 함은 한 사람의 문인(文人)으로서 스스로의 길을 세웠다고 볼 수 있지요. 비록 이립(而立)은 아니지만 어떻습니까. 대인께서도 그렇지만 저 역시 그 이후의 길은 공자 스스로가 결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승님.”
“자, 이쯤이면 조금 향시에 대한 의욕이 나실까요?”
백교의 물음에 입가로 미소를 그린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야 뭐, 최대한 열심히 해서 인정받아 보겠습니다.”
“우후후, 저는 늘 공자를 공경하고 인정하고 있답니다. 제가 가르친 분들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제 앞에 둘이나 있단 말입니까?”
백교가 자신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뛰어난 스승이었고, 신비롭기까지 하니 탐내는 사람이 많을 터다. 오히려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옆에 있어 준 것이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도 막상 백교의 입에서 다른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공자는 제법 영특하지만 학문에 관해 천재라고 보기는 힘든 편이니까요, 후후.”
“너무 솔직하신 것 아닙니까?”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끙, 어떤 사람들입니까?”
앓는 소리를 낸 황준우는 문득 백교의 다른 제자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배운 것은 아니나 한 스승을 모셨으니 사형제간이나 다름이 없다. 인연의 깊이를 느끼고 있는 새 삶이다 보니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 그건…… 비밀입니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또다시 웃음을 터트린 백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이 또 신비로운 맛이 있어야 되는 법이니까요. 누구 말마따나 인연이 있다면 어찌 만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자자, 그만하고 수업에 집중합시다. 오늘은 대학(大學)을 펼쳐 보기로 하였지요. 자, 봅시다.”
결국 황준우가 다른 질문을 하기도 전에 백교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궁금하네.”
“뭐가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경호의 물음에 턱을 가볍게 쓰다듬은 황준우가 뒤돌아섰다.
“경호는 혹시 사형제 있어?”
“사형제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입가로 웃음을 그린 경호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글과 무공 모두 장주님의 은덕으로 유 표두님께 배웠으니까요.”
“유영명 표두? 작년에 은퇴한?”
“맞습니다. 제게는 스승님이시지요.”
경호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고 보니 난 경호가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 누구한테 뭘 배웠는지도 여태껏 몰랐네. 유 표두가 그런 사람인 줄 알면 더 잘해 줄걸.”
“스승님께 도련님은 충분히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건네주셨고, 이름까지 외우고 다니셨지 않습니까.”
“애초에 난 이름을 외우지 않은 표사가 없다고.”
그 정도가 아니라 장원 내에 시종과 시녀들 이름마저 모두 알고 있었다. 뇌력이 상승해 한 번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외워지니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조만간 유 표두 한번 찾아가서 같이 밥이라도 먹어야겠네. 감사 표시라도 할 겸.”
엄연히 자신을 염두에 둔 말에 얼굴을 붉힌 경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진짜야. 내가 그렇게 표현은 잘 못 하지만, 경호를 얼마나 아끼는데. 옆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거든.”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비밀. 스승님이 그러던데, 사람은 조금 신비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경호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향해 밝은 미소를 보여 준 황준우가 뒷짐을 졌다. 아닌 말이 아니라, 공부가 끝난 이후 이렇게 여유롭게 걸으며 경호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황준우에게 있어 제법 즐거운 한때였다.
‘그때는 너무 여유를 몰랐지.’
그래서 다시 태어나고도 한동안은 여유 없이 살았다.
언제나 쫓겼고, 실제로 쫓기듯 살았으니까.
하나 지금의 삶은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천조신공의 완성에 있어서도 조급함만이 답은 아니다. 때문에 황준우는 근래 들어 익숙하지 않은 여유를 정말로 잔뜩 만끽하고 있었다.
“도련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런 황준우를 향해 다급히 다가온 시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손님?”
자랑은 아니지만 이 나이 때까지 외부의 친구를 사귄 적이 없는 황준우였다. 만금장 내에도 있을 것은 다 있고 굳이 다른 사람을 사귈 만큼 외롭지도 않다. 하니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만족하고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달리 찾아올 손님이 누가 있을까 싶었다.
“누구라는데?”
“만총이라고…….”
“만총?”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아아…… 그 양반.”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전생에도 그렇게 쫓아오더니, 현생에까지 따라왔다.
이쯤 되면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굳이 찾아가지는 않지만 쫓아온 인연을 내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어디에 있는데?”
“우선 접객당에 모셔 뒀습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 보자. 바쁠 것도 없고.”
“네, 그럼 저는 아가씨께 가 보겠습니다.”
“연이도 불렀어?”
“네…… 두 분을 같이 뵙고 싶다고.”
“흠…….”
황준우가 기억하는 만총은 대장장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는 젊은 시절의 그보다 열기가 많이 죽은 듯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몸 주변으로 불과 철의 냄새가 가득 밴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과 동생을 동시에 보고 싶어 한다. 갑자기 흥미가 더욱 당겼다.
“아냐, 내가 데리러 갈게. 어차피 우리 둘 모두를 보고 싶어 하는 거잖아? 함께 가지, 뭐. 고마워, 시현.”
시녀의 이름을 불러 주며 손을 흔든 황준우가 연무장을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홀로 남은 시녀, 시현은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볼을 붉혔다.
“도련님이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셔…….”
황서연이 말한 괴상한 소문의 근원지였다.
두 남매를 찾아 소주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소식을 모은 만총은 정말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만금장일 줄은 몰랐지.”
사실 지금도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돈 많은 소주에서도 가장 돈이 많은 만금장은 접객당에서부터 수준이 달랐다. 벽면을 메운 붉은 비단과 화려하게 새겨진 금장, 예술가가 손수 혼을 쏟아 만든 것 같은 탁상에 아름다운 찻잔. 심지어 나온 찻물 역시 그 귀하다는 용정차다. 누군지도 모를 손님을 위한 접대용치고는 드물다 못해 과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소주 대인의 배포가 주민들의 마음까지 닿는다더니 과연 범상치 않구나, 범상치 않아.’
놀라운 한편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두 남매와 같은 자식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참 고왔지.’
단편적인 기억에 보이는 모습조차 너무나 의가 좋아 보여 곱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을 불 앞에 선 대장장이로서 살아온 그에게 있어 그보다 부드러운 표현도 달리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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