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4화
“아서라.”
헛생각이다.
이미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던 일이다. 이제는 포기하고 마음을 접자고 하였는데 또다시 마음을 돌린단 말인가? 지독히도 쓴 꽃밭보다는 달콤한 진흙탕이 낫다. 주먹을 움켜쥔 만총이 기루를 향해 다시 한 걸음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어깨에 생소한 감촉이 둘러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처음 보는 청년이 누런 이를 보이며 그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감, 웃어.”
“……?”
만총이 의구심 담긴 시선을 청년에게 보낸다.
그러자 반대편 어깨로 또 다른 팔이 하나 더 둘러졌다.
활짝 웃고 있는 청년에 비해 세 배는 험악한 인상을 한 또 다른 사내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웃으라고 영감. 걸음은 좌측으로 돌리고.”
“허허허…….”
그들의 행태에 만총의 입가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살아온 세월이 짧지 않거늘 이쯤 되어서도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였나?’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홀로 천하를 주유한 몸이다.
그것이 단순히 명성과 돈만 가지고 있다고 될 일인가? 아니 오히려 그 두 가지를 가지고 있기에 더욱 위험한 여정이었다. 한데 아직까지도 만총은 살아 있다. 그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만총 역시 무공을 익혔다. 어디 가서 나설 정도는 아니지만 어설픈 흑도의 불량배들에게 당할 정도로 우습지도 않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어깨에 둘러진 두 팔을 역으로 꺾어 줄 자신도 있었다.
“허허허…….”
연달아 허탈한 웃음을 흘린 만총의 시선이 문득 주름이 가득 진 제 두 손을 향했다. 무공을 익혔지만 이 두 손으로 상대를 직접 때린 적은 손에 꼽는다. 대장장이에게 있어 무엇보다 귀한 손인만큼 아끼고, 아낀 탓이다. 그 주름 진 손이 문득 너무나 미약하고 작게 느껴졌다. 우습기 그지없어 보이는 자신의 얼굴이 보이는 듯도 했다.
‘우스워 보일 만도 하구나.’
사내들의 이끌림을 따라 어두운 골목길 한편에 들어 선 만총의 입가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지금 그의 마음은 유리잔보다도 깨지기 쉬운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에도 이런 친구들이 많나?”
“곧 죽을지도 모르는 영감이 궁금한 건 많나 보네.”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일지도 모르지 않나.”
만총의 말에 비아냥대던 청년 하나가 고개를 살짝 주억였다.
“소주도 사람 사는 땅이야.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지.”
정말 죽기 직전 노인의 소원을 들어주듯 제법 친절하게 답해 준 청년이 천천히 어깨동무를 풀었다. 머지않은 곳에 그의 동료들 셋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대로 인상은 제법 험악했지만 나머지 둘과 큰 차이가 없는 평범한 주먹패일 뿐이다.
“영감탱이가 기왕이면 복상사하고 싶은지 금옥루(金玉樓)로 가는 길이더라고. 가진 돈 다 털어서 가는 것 같던데, 어차피 노잣돈 쓸 거면 다른 좋은 데 쓰는 것도 좋지 않겠나 싶어서 데려왔지.”
동료들과 만총 둘 모두가 한 번에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늘어놓은 청년이 품에서 짧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형편없군.’
그 와중에 만총의 시선은 허접하게 만들어진 단검을 향했다. 저런 걸로 사람을 쑤시겠다고 협박하는 게 우스울 정도로 민망한 수준의 단검이었다.
“영감, 긴말 안 할게. 진짜 노잣돈 쓰고 싶지 않으면 품에 있는 거 다 내려놓고 꺼져. 나도 우리 부모님 같은 분을 거칠게 다루고 싶지 않거든?”
“너 부모님 없잖아.”
“고아 새끼가 있는 척은.”
“닥쳐, 이 새끼들아.”
낄낄대는 동료들을 향해 눈알을 부라린 청년이 단검을 만총의 턱 끝에 가져다 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뒤에 있는 놈들은 나보다 한 열 배는 더 지독한 녀석들이야. 좋은 말로 할 때 가진 것 다 내놓고 가자, 영감. 착하지?”
“좋은 말로 할 때 그 칼 내려놓고 썩 꺼지지 그래. 착한 아이라면?”
대답을 한 것은 턱 끝에 검이 겨누어진 만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탄탄해 보이는 근육에 깔끔한 백의무복, 거기다 무인의 상징인 장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찬 소협(小俠)은 더더욱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소저(小姐)였다.
아니, 앳된 얼굴로 보아하니 소녀라고 표현함이 더 옳을 터다.
하얀 피부에 작은 체구, 강아지와 같은 동그란 눈동자를 크게 뜬 소녀가 어느 틈에 그들 뒤에 서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고운 인상에 힘을 주고 말한 것이다.
“이건 또 뭐야?”
처음 노인을 함께 이끌고 온 또 다른 인물, 험악한 인상의 청년이 인상을 찌푸리며 위협을 가하려 할 때였다.
“그만!”
실실 웃는 얼굴로 단검을 손에 쥐고 있던 청년이 재빠르게 그를 말렸다.
“왜 그래?”
“물러나자.”
그 말에 험악한 인생을 가진 사내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하나 더 말을 할 수도 없는 게 그를 비롯한 다른 세 사람 역시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러나야 한다. 결국 현재의 상황을 납득한 험악한 인상의 청년이 등을 돌렸다. 다만 약해 보이는 모습은 싫었기에 목소리를 한 번 드높이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아이씨, 대체 저년이 누구길래!?”
그 말이 화근이었다.
“뭐? 년?”
듣고만 있던 소녀가 허리춤에서 손을 풀고 몸을 날렸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날렵한지 옷깃이 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넌 죽었다.”
단검을 휘두르던 청년이 자신의 이마를 짚고 한탄을 흘렸다.
대답은 그의 뒤통수에 느껴지는 충격이 대신했다.
“악-!”
생각보다 더한 고통에 제자리에 그대로 엎어진 청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말조심하고 다녀라. 네 그 곱지 않은 말에 상처 받는 심성 고운 사람들이 많거든!?”
뒤를 이어 소녀가 발을 허공으로 높이 들어 올린 후, 그의 등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어억!”
며칠간은 제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없을 만큼 강한 충격을 받은 험악한 인상의 청년이 마지막 비명과 함께 제자리에서 의식을 놓았다. 직후 소녀의 뾰족한 시선이 남은 청년들에게로 향했다.
“뭐, 혹시 동료의 복수. 이런 것 할 생각 있어?”
“전혀 없습니다.”
“당연히 안 하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이고 주억인 청년들이 후다닥 물러났다.
“나쁜 짓 좀 그만하고, 성실하게 살아!”
그런 청년들을 향해 마지막 목소리를 드높인 소녀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손을 털었다. 이후 조금은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만총에게 다가가 빠르게 부축을 시도했다.
“괜찮으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 혹시 기분 상하셨나요? 그러면 아저씨?”
“허, 허허허…….”
애초에 몸 하나 다친 곳 없으니 부축 받을 일도 없다. 소녀의 손길을 살짝 밀어낸 만총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단지 그 말이 유난히 따뜻하게 들려서…….”
위기도 아니었다지만, 협심을 보여 준 어린 소녀에게 감격한 탓일까? 아니면 자식 하나 없는 그에게 발랄한 소녀의 모습이 손녀처럼 다가온 덕일까? 마음 한편이 알 수 없게 찡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겪어 보았기에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었다.
“연아, 어디 있어?”
그런 만총을 걱정된 시선으로 바라보던 소녀가 골목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후로는 손을 번쩍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 여기!”
“오빠도 있구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린 만총의 입가로 흐뭇한 미소가 어렸다. 척 보아도 의가 좋아 보이는 남매의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그러던 차.
“너 또 이런 곳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나타낸 청년의 얼굴을 본 만총은 또 다른 떨림을 느껴야만 했다.
“저, 저…….”
청년의 생김새는 말끔하다 못해 매끈했고, 조금 더 보태 가인(佳人)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렇다고 기생오라비처럼 보이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다. 얼굴선은 짙고 사내다웠으며 곧게 서 있는 눈매와 꽉 다문 입술에서는 대장부의 기세마저 느껴진다. 고급 비단으로 만든 것이 분명한 헐렁한 옷으로 감추고 있지만 언뜻 보이는 근육 역시 야성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매끈하고 고운데 거칠다. 한 사내에게서 어찌 이런 감정을 동시에 받을 수 있을까 싶지만, 만총의 눈에 청년은 그렇게 보였다.
‘그, 그와 닮았다.’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십여 년 전 만총이 만났던 사내는 눈앞의 청년보다 몇 배는 거친 느낌이었고 자유로워 보였다. 어디까지나 닮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총의 심장이 헤어진 연인을 만난 것처럼 마구잡이로 뛰었다. 오래토록 찾아 헤매던 영감의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이 청년이라면……!’
그에게 다시 망치를 들게 할 수 있다.
거짓된 꿀을 섞은 진흙탕이 아닌 가시밭길이나마 진실 된 꽃길로 안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위험하니까 이런 곳에 들어오지 말래도. 내가 말했지. 무공은 양날의 검과 같다고. 익히면 스스로를 지키는 데 도움도 되지만…….”
“네네, 그만큼 위험도 동반되지요. 잘 알고 있어. 그래도 어떡해. 눈앞의 할아버지가 위험해 보이는데.”
소녀의 투덜거림에 청년의 시선이 잠시 만총을 향했다. 입가로는 묘한 미소가 떠오른다.
“반가운 얼굴이네.”
무슨 말일까?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청년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단 가자. 경호가 또 애타게 찾고 있을 거야.”
“알겠어. 그럼 할아버지, 조심해서 들어가요! 혹시 또 나쁜 사람 만나지 않게 주의하고요!”
“마음씨가 곱고 착한 건 좋다, 내 동생. 그래도 조심해. 그리고 저 할아버지는 네 생각보다 훨씬 강해.”
“무림에 나가게 되면 가장 조심해야 되는 것 세 가지 읊어 봐.”
“어린아이랑…… 노인…… 그리고 미남?”
“맞아. 잘 기억하고 있네.”
소녀가 제 턱 끝에 검지를 얹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청년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한 번 만총의 심장이 뛰었다.
‘저거다. 저거야!’
지금까지 도저히 깰 수 없던 벽이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혼자 있는 청년이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면,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은 완전히 녹여 버리고 말았다. 진한 감동에 섞인 쾌락이 그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그 감정의 열기가 어찌나 진한지 뇌가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멍한 눈으로, 두 남매가 완전히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 있던 만총이 눈을 부릅떴다.
“아차! 쫓아가야 하는데.”
이십여 년 만에 찾아온 기회다.
이번마저 놓친다면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에까지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의 마음을 엄습했다. 더 이상 기루를 방문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어서 빨리 두 사람을 지켜보며, 그 감정을 담아 망치를 휘둘러 철을 두들기고 싶었다.
명장이라 불리는 만총의 가슴에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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