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0화
“너무 걱정 마세요, 어머니. 영특한 아들이 무슨 실수라도 할까 봐요?”
“그 어머니란 말이 싫구나. 처음 말을 뗐을 때는 곧잘 엄마라고도 했는데…….”
“하, 하하…….”
서시의 안타까움 가득 섞인 음성에 시선을 살짝 회피한 황준우가 얼굴을 붉혔다.
전생을 다 기억하는 마당에 부모님께 엄마, 아빠라고 말하며 응석을 부리는 것은 역시 무리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힘들었다.
“하여튼 간에, 힘들면 이만 들어가 쉬거라. 아, 가는 길에 서연이도 방에 데려다주고.”
“곤히도 잠들었네요.”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감고 색색 잠든 황서연을 품에 안은 황준우가 빠른 걸음으로 장원 깊숙한 곳을 향했다.
지친 하루였다.
천 명의 적을 눈앞에 두고 싸웠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피곤한 날.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네.’
마음만 먹는다면 머리를 비우는 일이 어려울까.
잠들었을 때조차 귀여운 여동생을 바라보며 걷던 황준우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눈앞에 있는 예상외의 인물 탓이었다.
“선생님?”
“어라, 들켰습니까?”
“그렇게 대놓고 서서 할 말입니까?”
기둥 한편에 기대어 기다렸다는 듯이 황준우를 바라보고 있던 백교가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과연 제 제자답습니다. 눈치가 빨라요.”
“…….”
황준우가 경계의 눈빛으로 백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마 제가 ‘약속한 이 주야가 끝났으니 숙제입니다!’ 이러려고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
“맞혔군요, 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촤르륵-!
부채를 펼친 백교가 가는 눈을 길게 늘어트린다.
“이거 왠지 오해 당했다 생각하니 진짜 그러고 싶은걸요.”
“선생님 저 지쳤어요, 제발.”
“후후,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냥 간단한 용무가 있어서 찾아온 것뿐이니 오해는 마세요.”
“용무요? 역시 숙제인가요?”
“공자?”
“…….”
“에휴.”
한숨을 내쉰 백교가 황준우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다.
‘이거 참, 내가 원래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어린아이가 되니 아버지를 비롯해 모두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은근히 속이 상하는 황준우였다. 그런 황준우를 보며 백교가 더욱 부드럽게 웃는다.
“열한 번째 생일,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
그 말이 끝이었다.
백교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다는 듯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바람처럼 말이다.
‘검선 그 양반보다 조금 못하려나?’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백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던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글 선생인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졌고, 선생이라는 직분이 있다지만 기세로 그를 눌렀다.
평범한 글 선생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백교는 천하 전체에서 손가락에 꼽아도 될 무공의 고수였다.
객관적으로 따져 현재 만금장 내에 있는 인물들 중 제일이라 하여도 되었다.
‘차라리 무공 선생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어째서 글 선생을 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신기한 양반이란 말이야. 아, 놀라라.”
제 생각은 안 하고 중얼거린 황준우의 눈앞에 사라졌던 백교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아, 참. 내일부터는 다시 정식 수업입니다. 아시죠?”
“……예.”
“늦으시면 안 된다고 전하러 왔습니다. 그럼 이만.”
이후 백교가 사라졌다.
이번에는 진짜로.
“하여간에 정말…….”
그래도 이런 연회보다는 공부가 낫다.
“우웅…….”
마음을 다스린 황준우가 뒤척이는 황서연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준 후 또다시 바쁘게 발을 놀렸다.
황서연까지 방 안에 내려다 주고 밖으로 나온 황준우가 외쳤다.
“아, 이젠 진짜 지칠 힘도 안 남을 정도로 지쳤어!”
스스로 하고도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어쨌든 정말 더 이상은 아무런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무공 생각조차 지우고 완전히 늘어진 걸음으로 제 방을 향한다.
‘잠이나 자야지.’
내일이 되면 이 소란도 잠잠해질 것이다.
생일 축하를 위해 왔던 사람들도 모두 돌아갈 테니 말이다. 물론 공부라는 난관이 남아 있긴 하지만, 역시 연회보다는 낫다.
“도련님!”
그러는 사이, 말도 없이 사라진 황준우를 찾고 있던 경호가 빠르게 뒤쫓아 온다. 황준우의 인상이 와락 찡그려졌다.
“거기서 잠깐. 무슨 일이야?”
“예? 무슨 일은요?”
황준우의 말에 얼떨결에 걸음을 멈춘 경호가 되물었다.
“생일 축하 뭐 그런 말 전하러 온 거면 내일 해. 오늘은 피곤해.”
“내일은 생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내가 결정해.”
“도련님…….”
“나 진짜 피곤해, 경호. 혼자 있게 좀 해 줘.”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생일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손을 휘휘 내저은 황준우가 등을 휙 돌린다. 신경이 쓰여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기죽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푹 숙인 경호가 멀어지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나름대로 무언가를 준비라도 해 왔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게다가 호위무사라는 경호의 직책을 생각하면 뒤에 달라붙어 있는 게 당연했다. 물론 오늘이야 워낙 사람이 많이 모여 장원 관리를 위해 따로 차출되었다지만 말이다.
‘역시 오늘은 너무 피곤해.’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방을 향해 걸어 나가던 황준우의 늘어진 두 눈에 문득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모른 척하고 싶은데.’
정말 그러고 싶다.
해서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 시선에 담겼던 무언가가 방문 앞까지 뒤를 쫓아오니 더 이상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대체 왜…….”
결국 힘겹게 고개를 돌린 황준우가 물었다.
그 눈앞에 서 있는 무언가는 소녀였다.
황준우와 비슷한 또래?
아니, 오히려 조금 많아 보이기도 했다.
나이에 대한 건 단순히 피곤한 표정 탓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소녀 역시 제법 지친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런 걸 따질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사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따로 있을지도 몰랐다.
눈앞의 소녀는 예뻤다.
정말로, 황준우가 남자로서 태어나 본 여자 중 두 번째로 예뻤다. 첫 번째가 어머니인 서시인 것을 생각하자면 타인 중에서는 제일이라는 말이었다.
아직 지학도 안 된 소녀에게 하는 말로 옳을지는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다. 피부는 진주보다 맑았으며 동그란 눈동자는 농담 조금 보태 하늘의 별을 따다 담은 듯했다. 머리카락은 흑단(黑檀)빛에 비단결과 같이 부드러워 보인다. 섬섬옥수(纖纖玉手)라는 표현이 이토록 어울릴 수 없는 고운 손 또한 시선이 갔다.
“길을 잃었다.”
목소리조차 맑은 물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청아하다.
“안내해 줄 수 있겠느냐?”
다만, 말이 조금 짧은 게 흠이었다.
“내가 왜?”
당연하게도 황준우는 그런 소녀를 안내해 주고픈 생각이 아주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예쁘다고는 해도 극심한 피로함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심지어 황준우는 전생에 겪었던 수많은 암살 수법 중 미인계에 가장 강한 편이었다. 쉽게 말해, 애초부터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초장부터 말이 짧은 건방진 성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너는 이곳의 주인이지 않느냐.”
소녀는 황준우를 알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바뀔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틀렸어.”
“여기 주인은 우리 아버지지 내가 아니거든. 다른 이유는 없지?”
“나는 손님이다.”
“손님을 안내하는 건 주인의 몫이지.”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는 건가?”
“아아, 무책임한 아버지. 어찌 손님을 이리 버려두시는 겁니까.”
“…….”
소녀의 얼굴에 흥미와 당황이 섞인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미리 말하지만 어떻게 말해도 안내해 줄 생각은 없어. 다른 사람 찾아봐. 잘 보면 시녀들이 몇 명 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럼, 난 이만 들어가도 되지?”
“이미 찾아봤다. 하나도 보이지 않더군. 네가 처음이었다.”
“운이 안 좋았네. 다음번엔 운이 좋을 거야.”
손을 내저은 황준우가 방문을 열었다.
더 이상은 말다툼조차 하기 싫었다.
“내 이름은 주연하(朱然河)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방문을 무심하게 닫은 황준우는 재빨리 겉옷부터 벗어 던졌다. 굳이 차곡차곡 쌓아서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잠든 중에 혹은 내일 아침에라도 시녀들이 들어와 모두 수거해 가고 새 옷을 가져다 놓을 테니 말이다.
“아, 졸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소녀, 주연하에게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외친 황준우가 제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드르렁!”
코 고는 소리도 심하게 냈다.
일 없으니 알아서 물러나라는 뜻이다.
반각, 일각, 이각.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문 앞에 그림자처럼 선 소녀는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잠든 척했지만, 당장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의식의 끈을 끝내 놓지 못하고 있던 황준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차라리 나이라도 찬 어른이라면 완전히 생각을 지우련만, 또래의 소녀가 추운 밤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고 생각하니 더 신경이 쓰였다.
결국 황준우가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벗어 던졌던 옷을 입고 문을 벌컥 열었다.
“드디어 나왔구나.”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연하가 활짝 피는 꽃과 같이 웃으며 말한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한 황준우가 얼굴을 붉혔다. 그도 그럴 게 아까까지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한데 지금은, 어쩌면 첫 번째와 비등할지도 모른다는 마음도 들었다.
“대,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말하지 않았느냐. 길을 안내해 달라고.”
“난 지금 정말 피곤해.”
“그러면 피로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겠다.”
“지금처럼?”
“기왕이면 안에 들여다 보내 주면 더 고맙긴 하겠구나.”
아닌 게 아니라, 담담해 보이는 주연하의 입술이 살짝 새파랗게 떠 있었다. 굳건히 선 두 다리도 조금씩은 떨린다. 한자리에서 고정된 채 서 있는 일이 고역이라는 것을 제법 잘 알고 있는 황준우로서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너 대체 몇 살이야?”
“올해로 열하고도 세 살이 되었구나.”
“무슨 말이 그래. 애늙은이 같게.”
그 말을 내뱉은 직후, 황준우의 입가로 웃음이 번졌다.
“그러고 보니 매일 내가 듣는 말이네.”
“난 처음 듣는 말이다.”
“이럴 수가, 혹시 주변 사람들이 다들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병이라도 걸렸나?”
이마를 짚으며 경악하는 황준우의 행동에 차가워 보이는 주연하의 얼굴 위로도 미소가 떠올랐다.
“재미있구나. 기다린 보람이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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