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8화
“자, 그럼 한 번 얼마나 늘었는지 볼까.”
뿌듯한 웃음을 보이며 뒷짐을 진 황준우가 여유롭게 손짓했다.
엄연한 도발에 살짝 볼을 부풀린 황서연이 주먹을 말아 쥔다.
이어진 것은 단순하다고까지 볼 수 있는 정권 찌르기다.
직접 만들기까지 해 가르친 선자기공과 다르게 권법은 시중에 흔하게 널린 삼재권법을 가르쳤다. 천조칠무의 삼무(三武)에 해당하는 권각술, 천지요박투(天地搖搏鬪)를 가르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리였다. 권각술이라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천지요박투는 그 이름처럼 몸을 쓰는 박투 무공이다. 그리고 몸을 쓰는 이상 사람마다의 기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비교 대상이 남자와 여자라면 그 간격은 더욱 커지는 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결국 천지요박투는 황서연에게 맞지 않았다. 지금은 느리지만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육체를 단련할 필요가 있다. 삼재권법은 그런 의미에 있어서 최고였다.
‘강(强)으로 시작하는 것 같지만 결국 유(流)의 권법. 여성용으로 이만한 시작 무공이 없지.’
워낙 단순한 투로 탓에 흔히들 착각하곤 하지만 삼재권법은 본래 무당파의 태극권(太極拳)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한데도 투박한 길에서 강한 힘만을 실으니 대다수 삼류무공을 배운 데 그치고 만다. 하나 정식으로 삼재권법을 파고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삼재(三才)를 완성하면 능히 천하를 발아래 두리라.
시중에 떠도는 삼재권법의 책 서두에 쓰여 있는 허황된 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고수 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
그 고수라는 게 어느 정도냐면, 굳이 또 순위를 매겨 말해 황준우가 기억하던 강호에서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다던 우내십존과 동등한 수준을 말했다. 그러니까 강호의 수많은 무인을 일렬로 줄 세워 그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게 가능하다. 이 사실을 시중에 알린다면 나올 반응이야 뻔했다.
‘헛소리하고 앉아 있네.’
‘어린놈이 벌써부터 정신이 나갔나.’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아프고, 너무나 속상한 이야기였다.
진실을 말해 주어도 모르니 말이다.
물론 눈앞의 어여쁜 여동생은 달랐다.
제 오빠가 말하면 하늘이 땅이라 해도 믿어 줄 동생은 남들이 무시하는 삼재권법을 열심히도 수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우리 예쁜 연이한테 권법은 안 어울리지.’
무식하게 주먹을 치고받는 건 남자들한테나 어울리는 짓이다.
게다가 고작 우내십존 정도나 되어서는 황준우의 성에 안 찼다. 그중에서도 가장 정상에 군림하던 검선이라든가, 불성 정도는 되어야 안심이 될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히 삼재권법은 부족했다.
‘일단 삼재권법으로 기반을 다지고…….’
신공절학이라 할 수 있는 무공으로 완성한다.
나름대로 여동생 강하게 키우기 계획을 마음속에 단단히 세운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황서연은 그를 도발로 느끼며 더욱 열심히 권법을 펼쳤지만 결국 기껏해야 황준우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스쳤을 뿐이었다. 그조차도 황준우가 내심 양보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후우…… 후우…….”
누구 동생 아니랄까 봐 승부욕이 제법 붙었는지, 씩씩거리는 얼굴로 숨을 몰아 내쉬는 황서연을 보며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말했다.
“와, 삼재권법이 많이 늘었는데.”
“이 년 동안 이것만 했으니까.”
황준우가 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무공을 수련한 지도 벌써 이 년이다.
황서연의 육체가 고된 체력 훈련을 견뎌 낼 수 있다고 판단한 뒤부터 시작했으니 아주 적절한 시점이었다.
‘이 년 동안 이 정도라…….’
선자기공을 가르쳐 준 지는 이제 고작 삼 개월이 조금 지났다. 결국 지난 기간은 오로지 삼재권법만 수련한 셈이었는데 그럭저럭 흡족할 정도로 늘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삼재권법의 묘리에 대해 깨우친 듯하지만 조금 더 알아야 한다.
“아직은 멀었어.”
문득 황서연이 처음 무공을 시작하던 날이 떠오른다.
무공이란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신나게도 몸을 움직였다. 결국엔 넘어져서 울음을 터트리고, 그를 달래느라 정신없었지만 말이다.
‘참 귀여웠는데. 물론 지금도 귀엽지만.’
회상의 끝자락, 눈앞에 번쩍 다가온 주먹에 놀란 황준우가 뒷걸음질 쳤지만 황서연은 생각보다 영악했다.
“야호!”
옷자락을 붙잡아 도망가려는 황준우의 이마에 정확히 주먹을 가져다 댄 황서연이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뛴다.
“됐다, 됐어! 해냈다고!”
“…….”
황준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직 멀었다고 했는데, 이래서야 체면이 안 서는 판이었다.
“그렇게까지 맞히고 싶었어?”
“당연하지. 오빠가 한 대라도 맞히면 소원 들어주겠다고 했는걸.”
황준우의 뇌리에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언제?’
생각해 보면 그랬던 기억이 있는 것도 같았다.
아까의 회상을 이어 이 년 전쯤, 그러니까 처음 무공을 시작할 때 비슷한 약속을 했었다.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문득 예쁘게만 보이던 여동생이 조금은 무섭다고 느낀 황준우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소원이 뭔데?”
“비밀. 나중에 말해 줄 거야.”
황준우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컸지?’
비밀은 무슨, 그저 방긋방긋 웃고 좋아라만 할 줄 아는 동생이라 여겼는데 완전히 당했다.
충격이 너무 커 일순간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흐흐흥.”
그러거나 말거나, 콧노래를 부르며 등을 돌린 황서연이 신난 걸음으로 연무장 한편으로 걸어가 다시 삼재권법의 자세를 잡는다. 목적은 달성했으니 개인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평소였다면 옆에 다가가 몇 가지 조언이라도 했을 황준우였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열리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어, 짧은 말을 흘린 황준우가 고개를 내젓는다.
“무슨 집안에 비밀이 이렇게 많은지.”
절로 나오는 한탄은 뒤편에서 홀로 수련에 힘쓰고 있던 경호의 몸을 떨게 만들었다.
참으로 더디게 흐르던 시간도 쉬는 날에는 쏜살같이 흘러간다. 황준우에게 있어 유달리 싫어하는 공부를 향해 시선도 안 준 이 주야의 시간이 그보다도 빠르게 흘러갔다.
“두 번의 밤낮이 너무나 짧구나!”
탄식을 토하고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저녁이 찾아온다.
‘어쨌든 오늘이 생일인가.’
아침밥을 먹을 때도 황석후와 서시가 그토록 이야기했으니 잊어 먹지는 않았다.
사실 황준우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날은 아니었다.
고아였던 시절에는 아주 존재하지 않았고 다시 태어난 이후로도 부모님이 챙겨 주시지 않았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사실 번거롭기만 하고 말이지.’
괜히 장원 내가 시끄러워지고 시종과 시녀들만 바빠지니 오히려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이번 생일도 그랬다. 유달리 숨기는 게 많아 보이고 바빠 보이는 모습도 저녁 생일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황준우를 배려한 것인지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보내는 생일이라지만, 저녁상만큼은 제법 화려하게 차려졌으니 말이다.
황준우의 예상은 그럭저럭 맞았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정답이 맞았다.
유난히 시종, 시녀들이 바쁜 것도 무언가 소란스러운 분위기도 모두 생일 저녁상 탓이었으니 말이다.
단지 그 상이, 좀 컸다.
아니, 많이 컸다.
“아버지……?”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녀들이 처음 보는 화려한 옷을 후다닥 입히고 끌고 다니는데 이게 뭔가 했다. 특별한 하루? 생일답게 유독 분위기를 더 내는 건가?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번잡한데. 그러고 보니 집안에 유달리 기척이 많다고도 생각했다.
한데 그 많은 기척이 한 장소에 모두 몰려 있을지는 몰랐다.
활짝 열린 대문과 그 안으로 드나드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 장원 안쪽에서부터 입구까지 늘어진 거대한 상(사실 이걸 상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의 모습을 본 황준우는 그야말로 혼돈에 빠졌다.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그럴 리가.
황준우가 생각하던 생일이란 이런 게 아니었다.
분명 평소와는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어쨌든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보내는 하루다. 때로는 선물도 받았다. 한데 오늘은 그 선물도 무언가 좀 달라 보였다. 시선을 돌려, 장원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시선이 떨렸다.
굳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게 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선물이라고 가져온 물건들이다.
조금 더 열심히 쌓는다면 집 한 채 크기가 될 법한 저 엄청난 산이 말이다.
“선물이 마구잡이로 쌓이는 것 같아 걱정되느냐? 걱정 말거라. 진짜 귀한 물건들은 따로 빼놓으라고 했으니 말이다.”
“아니, 저것 말고 더 있다고요?”
웃음 섞인 황석후의 말에 삐그덕거리며 고개를 꺾은 황준우가 되묻는다.
“물론이지.”
돌아온 답은 확인 사살과 같았다.
‘대체 이게 뭘까?’
엄청난 수의 인파에, 감히 상이라 부르기도 미안한 거대한 저녁상. 그리고 엄청난 양의 선물. 그래 뭐 따지자면 그런 거다. 생일잔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다는 그것 말이다. 물론 여태껏의 황준우에게는 멀기만 했던 단어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가족들이 나름의 깜짝 잔치를 연 것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무언가를 숨기던 집안의 분위기도 이해가 됐다.
한데 이건 규모가 컸다.
커도, 너무 컸다.
장원에서 가장 높은 오 층 건물에서 멀리까지 내다보면 잘나가는 집안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더라도 소주에 사는 이들 중 대다수가 모두 모인 듯했다. 이 사람들이 다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 준우가 감동이 큰가 봐요, 호호.”
서시도 이날을 위해 제법 많은 준비를 했다. 안 그래도 빛나는 외모를 꾸미고, 황준우를 위해 손수 짠 비단옷까지 준비했다. 시녀들에 의해 갑작스럽게 갈아입혀진 유달리 화려하다고 느낀 비단옷이 바로 그녀의 작품이었다.
“와아, 사람 많다.”
황준우와 같이, 이날의 비밀을 전혀 모르고 있던 황서연도 까치발을 들어 창문 밖 바깥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녀가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인 장면이었던 탓이다.
황준우는 이와 비슷한 정도의 사람이 모인 날을 경험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모두가 황준우를 죽이려고 했다.
반대로 지금은 이들 모두가 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극명해도 이렇게 차이가 극명할 수 있을까?
물론 둘 사이에 공통점도 어느 정도 존재하기는 했다.
‘숨이 턱 막히는군.’
그 많은 사람을 죽여야 된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아무리 황준우라 해도 가슴 한편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저 많은 사람의 시선을 감당할 생각에 숨이 막혔다.
“아버지, 저 이런 건…….”
기뻐하는 가족들 앞에서 하면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도 모르게 불만이 흘러나왔다.
“혹여 너무 부담되는 게냐?”
다행히 황석후가 그런 황준우의 마음을 헤아렸다.
“예, 솔직히 조금.”
“그렇다면 오늘만 참거라. 내년부터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안다.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황석후 말대로 오늘만큼은 참는 수밖에 없었다. 황석후는 그런 황준우를 내려다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아직은 견디기 힘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