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4화
[급하면 너 혼자 도망가라. 네 발이라면 나머지 녀석들 버리고 도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느냐?]
“…….”
구황의 전음에 전이명의 시선이 떨린다.
그 역시 적리단 동료들 중에 나름대로 의리를 나눈 녀석들이 있는 탓이다.
[알겠습니다.]
하나 결정은 구황보다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잠시 구황의 눈으로 스산한 빛이 흘렀다.
‘잘됐어.’
이 정도라면 만약의 때에 구황 역시 배신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전이명을 희생양으로 고른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조, 취개 녀석도 믿을 순 없지.’
구황의 의심이 점점 짙어져 갔다.
물론 겉으로 그를 표현하지는 않았다.
듬직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각오를 다질 뿐이다.
“그럼 믿겠다. 전이명. 어떻게 해서든 만금장주의 여식을 장가항까지만 데려와라. 안휘로만 넘어가면 이윤의 삼 할은 네 몫이다.”
고작이라 할 수준이 아니다. 상대는 천하제일 거부로 예측되는 만금장. 이번 계획이 성공적으로 완료될 경우 그 이윤이 얼마나 클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고작 삼 할이라고 할 돈으로도 평생을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을 것이 뻔해 보였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라. 포대는 내가 직접 들겠다.”
구황의 말에 남은 적리단 인원들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은 이해했지만 본인이 먼저 미끼가 될 줄은 몰랐던 탓이다. 한편으로는 감격 혹은 감동이라 불릴 만한 감정도 엇비쳤다.
“자, 출발하자.”
그런 그들을 보며 오묘한 미소를 지은 구황이 어깨에 쌀 포대를 짊어지고는, 지하에 만들어 두었던 비처의 문을 박차고 지상으로 뛰쳐나간다.
그 뒤를 따라 고억과 취개, 그리고 회조가 나섰다.
조금 발이 느린 적리단원들도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마지막 순간 잠시 고개를 돌려 전이명을 바라본 구황이 미소를 보였다.
“꼭 장가항까지 무사히 도착하겠습니다.”
그 웃음을 믿음의 의미로 해석한 전이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놈들이다!”
“저기 아가씨야!”
“쫓아라!”
평범한 숲길인 줄 알았던 지하에서 구황 등이 뛰쳐나오자 놀란 사람들이 소리친다. 하나 모두가 무공을 익힌 적리단의 발을 쫓을 수는 없었다.
“모두 비켜라!”
위협용으로 뿌려진 구황의 검기에 기겁한 이들이 뒷걸음질 치며 길이 열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숫자만 많지, 오합지졸이다.’
애초에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차오르는 의기(意氣)를 이기지 못해 뛰쳐나온 평범한 주민들이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으려는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녀석들.’
그들을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쌀 포대를 짊어진 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으로도 충분하다.
구황은 본보기로 세 사람 정도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마침 눈앞에 젊은 여성이 포함된 무리가 보였다.
‘살맛은 역시 여자 쪽이 더 좋지.’
구황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대충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검의 움직임이 여인의 목 가까이에 다가선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구황은 끝까지 검을 베지 못했다.
“……!”
턱밑에서 갑작스럽게 차오르는 강력한 기운이 섬뜩하게 머리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꼬마 아이?’
이제 열 살은 되었을까?
아니 그보다도 한참은 어려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그를 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황준우였다.
“쳇. 역시 아직은…….”
영문 모를 아쉬운 소리를 흘리는 소년의 이어진 공격이 다시 한 번 구황의 머리로 떨어졌다. 잠시 이해가 안 되고, 어이가 없기도 하여 멍하니 쳐다보던 구황은 또 한 번 기겁하고 말았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통을 대신하여 지면의 일부가 푹 팼다. 들고 있던 쌀부대도 놓쳐서 바닥을 제멋대로 굴렀다.
물론 애초부터 그쪽은 큰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저 조막만 한 발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았다면 머리가 터졌을지도 모를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연이 어디 있어?”
잠시 터진 쌀 포대를 흘겨본 황준우가 서늘한 음성을 흘리며 또 한 번 일권(一拳)을 뻗었다.
딱히 변화 하나 없는 빠른 정권(正拳)이다.
쉬워 보이는데, 이전 공격보다 더 피하기가 마뜩지 않아 보인다.
‘무슨 애새끼가!’
기겁한 마음을 억누른 구황이 검을 내리쳤다.
그래 봐야 주먹과 검이다.
기껏 해봐야 소년이다!
한데 검과 주먹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뭣!?”
놀란 구황이 입을 떡 벌리며 뒷걸음질 쳤다.
믿기지 않겠지만 힘에서 밀린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 황준우의 주먹에 선명하게 어린 것은 분명 강기(?氣)에 가까웠다.
“뭐하는 거요, 두목! 애새끼 하나 때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앞으로 나선 회조와 취개가 동시에 황준우의 양옆에서 창을 내지른다. 구황은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황준우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사라졌어?’
한데 놓쳤다.
다시 한 번 황준우의 움직임을 보게 된 것은 회조의 목 뒤로 날카롭게 내려찍는 작은 발을 보았을 때였다.
“꺽-!”
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서늘한 소리와 함께 회조가 의식을 잃었다.
‘아니, 죽었나?’
구황은 그를 확인할 경우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눈앞의 소년은 그가 상상할 수 없을 수준의 고수다.
‘말이 되나?’
반로환동이라도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하지만 진짜 반로환동의 고수라면 ‘고작’ 절정의 무인인 그가 두 번이나 피할 수나 있었을까?
“협공합시다.”
그사이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생각한 고억이 구황을 재촉하며 기를 두른 손바닥을 내뻗었다. 그를 절정고수의 경지에 올려놓은 첩사장(捷死掌)이 화려하게 황준우의 작은 얼굴을 뒤덮는다.
‘잡았나?’
구황이 기대에 찬 눈빛을 빛내는 순간이었다.
황준우의 작은 머리를 덮은 것 같던 고억의 손이 허공을 휘젓는다.
“죽어.”
서늘한 목소리를 한 황준우의 주먹이 고억의 허벅지를 두들긴다.
비명을 내지른 고억이 무릎을 꿇고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동시에 황준우의 주먹이 고억의 정수리 중앙으로 떨어졌다.
이번만큼은 구황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빠르게 내뻗어진 검에, 무리하게 솟아난 강기가 황준우의 주먹과 부딪친다.
혀를 찬 황준우가 한 걸음 물러나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덕분에 생긴 짧은 틈새에 곁눈질을 흘린 구황이 외쳤다.
“고억, 무사한 게냐!?”
“아프지만 무사하우. 제기랄!”
욕지기를 내뱉지만 죽지는 않았다.
‘놈은 아직 죽어선 안 돼.’
물론 때가 되면 목을 베어버릴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찌 됐든 장가항에서 장강에 오를 때까지는 그의 도움이 필요한 탓이었다.
“취개, 고억과 먼저 가라.”
“하지만 두목은!?”
취개 역시 상대의 정체는 잘 모른다.
하나 어린아이라고 하여 적이 우습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걱정 마라. 어떻게든…….”
긴장한 표정의 구황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쥘 때였다.
으아앙-!
반대편에서부터 높은 아기 울음소리가 전해졌다.
동시에 구황과 고억, 취개에 이어 황준우까지 눈이 돌아갔다.
“연이!”
비명을 내지르다시피 목소리를 높인 황준우가 빠른 속도로 구황을 지나쳐 반대편을 향해 뛴다.
물론 구황은 그런 황준우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운이 좋았우. 마침 수면제의 효과가 다한 것 같구려.]
언뜻 안도의 미소를 보인 고억이 구황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처음부터 그토록 빠르게 탈출을 강요했던 이유.
황서연에게 먹인 수면제의 효과가 떨어질 때가 다 되었다. 미끼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한 적절한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위기의 때, 적절하게 터져주었다.
“어서 가자.”
다급히 얼굴을 끄덕인 구황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구나.’
어린아이.
하나 무공을 비롯하여, 차가운 눈빛까지 모든 것이 그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허황 삼아 사람 수천은 죽여 본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 같은 도적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진짜배기.
생각대로라면 악마라고 불렸어도 모자라지 않을 괴물이다. 물론 구황은 그를 느낌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반로환동은 아닐 테고, 고작해야 열 살도 안 되어 보이지 않던가?’
헛된 망상일 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
구황은 어서 자리를 떠야 한다고 생각했다.
“으아앙-!”
“제기랄! 제길! 제길!”
전이명은 욕을 멈출 수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낚시꾼이라는 밀명을 전해 받은 수많은 적리단원 대다수가 욕을 멈추지를 못했다.
욕을 하지 않는 놈은 이미 죽은 놈들뿐이다.
황서연의 울음소리가 터진 순간 시작된 만금장 무인들의 공격 탓이다. 엄청난 고수는 없지만 그 숫자가 너무나 많다. 달아나는 와중에 전이명의 눈앞으로도 몇 번이나 검기가 번뜩였다.
적리단원 전체 중 가장 자신 있는 경공술로 간신히 회피하고는 있었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구황, 이 개자식! 우릴 속였어!”
전이명은 어렵지 않게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수많은 부하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주검이 되어가고 있다.
“으아앙-! 오빠아-! 아빠!”
그 와중에도 포대에 쌓인 황서연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죽일까?’
이대로는 어디로 도망가든 들킬 수밖에 없다.
마음속에 살심이 일었지만, 또 한편에 피어오른 욕심이 발목을 부여잡듯 그를 말렸다.
‘혹시 모르잖아? 살려서 데려만 갈 수 있다면…….’
굳이 구황에게 갈 필요도 없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탈출만 한다면 잘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목숨을 걸고 높은 몸값을 받으려 할 필요도 없었다. 만금장의 여식이라면 필요로 하는 힘 있는 집단도 많을 터.
‘그래, 이 자리만 빠져나가면 된다. 이 자리만.’
울음소리가 짜증 나면 잠시 멈추어서 혈도를 짚으면 될 뿐이다.
문제는 지금 당장 그럴 여유도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
길이 막혔다.
눈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인방.
각자 괴상한 가면을 쓴 사인(四人)이 길을 막아선 순간 넓은 길목이 모두 꽉 막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날렵하게 움직이던 몸이 절로 멈춘다.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사인은 그와는 궤를 달리하는 고수들이다.
아마 이 자리에 구황이나 다음가는 고수인 고억이 있었다고 하여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네 사람 중 하나를 감당해 낼 수조차 없을 게 분명하다.
“하하…….”
어이없게 웃음을 흘리는 전이명의 주변, 살벌하게 검기를 날리던 만금장의 무인들이 남은 길목을 촘촘히 에워싼다.
전면의 사인방 중, 검은 표범 가면을 쓴 무인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동시에 흠칫하며 포대를 풀고 황서연의 목에 단도를 가져다 댄 전이명의 눈이 차갑게 빛을 흘렸다.
“가까이 오지 마. 죽여 버린다.”
진심이었다.
어차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가망이 없다.
그로서는 황서연을 인질로 삼는 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