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13화 (13/373)

학사재생 13화

소주로부터 약 이십 리 떨어진 곳에 만든 비처(秘處)에 숨어 침을 삼키는 적리단 두목 구황의 눈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젠장, 젠장, 젠장.”

시장에 있는 제법 귀한 집안의 자식을 납치하고, 인질을 사로잡아 큰돈을 요구한다. 일 년 전, 관군에게 초대(初代) 적리단이 토벌당한 이후, 힘겹게 강호를 전전긍긍하던 구황이 소주를 찾은 이유였다.

큰 건 하나 하고 뜬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 여겼다. 당연히 있을 호위무사들을 함정에 끌어들이는 계획이 성공했을 때에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타난 호위무사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긴 했지만, 그 자리에는 구황 본인을 비롯하여 새로이 포섭한 절정 고수 고억이 함께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을 줄 알았다.

자그마치 다섯이나 되는 호위무사를 놓치는 일은 애초부터 계획에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추격이 붙었고, 비처로 달아나기까지도 다급한 움직임이 필요했다.

흔적이 많이 남게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 곤란할진대, 하필 납치한 여자아이가 소주대인의 자식이라고 한다.

사실 구황을 비롯한 적리단원 대다수가 소주대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그저 소주 제일 가는 부자이자, 만금장의 주인이라는 사실만을 알 뿐이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래서 호위무사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좋았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마음 한편에서는 이참에 잘 됐다는 기분도 있었다.

만금장주, 소주대인은 천하제일의 거부(巨富)라는 소문이 은연중에 감돌았다. 물론 일부 비약되었다는 이야기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히 따질 수 없는 부자인 것이다.

그런 만금장의 여식을 납치했다.

애초 목표로 했던 한탕에는 크게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한동안 숨죽여 때를 기다리려 했다.

흔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비처를 준비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기에 쉽게 들키지 않으리라 자신도 있었다.

이후 소란이 가라앉을 즈음 접근을 하여 돈을 뜯어내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들에게 최대한 적은 위험이 올 나름대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한데 세상일이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구황을 돕지 않았다.

그들을 쫓는 눈이 고작 만금장 하나가 아니었다.

소주 전체가 움직였다.

아직 비처를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며 흉흉한 기세를 뽐내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알 수 없는 섬뜩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들 수십이 동시에 달려든다 한들 그의 검에 적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아무래도 큰일 난 것 아니우, 두목?”

가는 눈을 뜨고 바깥 상황을 함께 훔쳐보던 고억 역시 긴장한 목소리를 흘렸다. 새로운 계획이고 뭐고, 이대로 있다가는 비처가 순식간에 들통 날 판이었다.

“큰일을 하는데, 큰일이 나야지. 그러면 뭐 쉽게 될 줄 알았나? 빌어먹을.”

욕을 내뱉는 구황의 눈매가 날카롭다.

다른 수하들이라면 그런 그의 반응에 곧장 시선을 피할 테지만 고억은 달랐다.

“어이, 두목. 우리가 뜻이 맞아 힘을 합치기로 했지만 이런 대우는 너무하지 않소? 어쨌든 서로 목숨 걸고 일하고 있는 마당인데 말이오?”

“…….”

구황은 대답을 하는 대신 눈을 부릅뜨며 몸에 힘을 쥐었다.

당장에 말대답을 하는 놈의 목을 베고 싶은 심정이다.

하나 고억의 실력은 그보다 한 수 정도 아래 쳐질 뿐이다. 자칫 싸움을 벌여 바깥까지 소란이 전해지고, 비처가 들통 나는 최악의 수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래서, 무슨 대책이 따로 있단 거냐?”

이를 아득 간 구황의 질문에 고억이 황서연을 곁눈질했다.

“차라리 넘깁시다. 마음 편하게 포기하자고요. 그래도 선처라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대가 그 자애롭다는 소주대인 아니우?”

“넌 소문을 믿느냐?”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거라도 믿어야지, 그럼 뭘 믿으라는 거요? 두목 실력?”

고억의 입가로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동시에 검을 뽑아 든 구황이 노성을 흘렸다.

“이놈! 봐주었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흥분 적당히 하시지, 두목. 우리끼리 싸워서 좋을 게 없는 건 당연한 일 아니오?”

맞는 말이다.

알고 있어서 참았고, 여기까지 왔다.

눈썹 끝을 파르르 떠는 구황을 보며 가는 눈에 웃음을 가득 보인 구억이 고개를 내저었다.

“참으시오. 참는 게 두목에게 이득이오. 왜냐면, 내가 말이우. 여기서 가장 안전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거든? 주동자인 두목의 목을 들고 소주대인의 자식과 함께 나가면…… 그림 좋지 않소?”

고억의 도발에 구황의 눈이 점점 더 붉어졌다.

하나 결국 검을 내려치지는 않는다.

“크흐흐…… 웃기지 마라. 네놈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진즉 내 뒤통수를 쳤겠지. 기회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사실 너도 겁나는 것 아니냐?”

“…….”

구황의 조소에 더욱 짙은 미소를 그린 고억이 고개를 주억였다.

“역시 두목. 눈치가 빠르구려.”

“시끄럽다. 기분 나쁜 장난은 그만 치고 본론을 말해라. 더 이상 나를 불쾌하게 하면 너랑 나, 모두 죽는 거다.”

“장가항(張家港)에 아는 동생이 하나 있소. 거기까지만 가면 배를 타고 장강에 오를 수 있지.”

“……?”

“저 여자아이를 미끼 삼아 던지고 거기까지만 달아나자는 말이우. 장강에 올라서 안휘로만 넘어가도 아무리 만금장이라 한들 쉽게 쫓기가 힘들지 않겠소?”

“안휘…….”

안휘에는 남궁세가가 있다. 그리고 세간에 흔히 알려져 있는 대로 만금장과 남궁세가의 사이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구황의 눈에 고심이 어린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면 계획은…….”

“계획도 살고 봐야 있는 거지. 나도 소주대인이 우리 중 누구라도 용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걸리면, 무조건 죽는 거요. 두목.”

“끙…….”

고억의 말이 맞다.

지극히 옳다.

욕심에 눈이 멀어서 포기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데 왜 고억은 그 계획을 혼자 실행하지 않고 구황에게 말하는 걸까?

[네놈…… 나머지 녀석들을 버리자는 거냐?]

조심스럽게, 불안한 눈빛으로 비처 이곳저곳에 앉거나 서 있는 수하들을 곁눈질한 구황이 전음을 보냈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거냐?”

물론 그 직후 겉으로 다른 말을 내뱉는 것은 잊지 않았다.

괜한 의심을 만들어서 누구 하나가 눈 돌아가도 위험한 상황.

새삼스레 지금의 위기를 상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미끼를 해야 하우. 만금장의 포위망을 벗어나려면 실력 없는 녀석들은 어차피 죽게 될 일이고 말이오.]

“아니면 그냥 나가서 여식을 내놓고 소주대인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방법밖에 없다니까.”

고억 역시 구황과 같이 전음을 한 직후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회조 녀석이랑 취개, 전이명 정도는…….]

“하아…….”

한숨을 내쉬는 구황의 눈에 옅은 간절함이 비쳤다.

앞서 읊은 세 사람은 초대 적리단 시절부터 그와 함께 한 나름의 우애를 가진 아우들이었다. 나름대로 실력도 괜찮은 편이고, 눈치도 좋다. 때문에 이번 소주 잠입 때도 고억을 비롯해 그들만을 대동했었다.

“시간이 얼마 없소. 고민해 보시오.”

고개를 내저은 고억이 전음이 아닌 육성으로 답했다.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뜻.

양미간을 찌푸린 구황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한다. 그가 고민이 깊을 때 나오는 습관이다.

“젠장…….”

입에서 욕지기가 흐른다.

그사이 비처 주변으로 몰려드는 기척이 더 많아졌다.

마찬가지로 인상을 찌푸린 고억이 그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도적 아니오? 진짜 그들과 뭐 우정이라도 다졌소? 아니면 뭐 돌아다니는 동안 엉덩이라도 비빈 게요?]

[계속 까불지 마라, 고억.]

[답답하니까 하는 말 아니우. 답답하니까.]

그 말과 함께, 반복되던 손의 움직임이 멈춘다.

구황의 고민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좋다. 네 계획대로 하자.”

어쩔 수 없는 결정이다.

아무리 사이가 좋다고 하여도, 그가 살고 보아야 있는 우애 아닌가? 목표로 했던 큰 건도 놓쳤는데 부하들 버리는 일쯤이야 대수도 아니다. 구황의 눈을 본 고억이 고개를 주억였다.

“일단 저 여식을 놈들에게 보여줘야 하우. 그걸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인데…….”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고억이 육성과 다른 전음을 이어갔다.

[여식과 함께 발 빠른 녀석 하나를 미끼로 붙여야 하우. 그래야 최대한 시선을 끌 테니. 우리는 마지막에 나가야 하고.]

[발 빠른 놈? 전이명이 좋겠군.]

마음을 굳힌 구황은 결정을 어렵지 않게 내렸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다. 무조건 목숨이 우선이지.’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이 닮은 미소를 그렸다.

물론 머릿속은 서로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다.

‘장강에 도착하면 바로 놈의 목을 베야겠다.’

구황은 고억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무공실력이랑 눈치가 쏠쏠하여 부하로 받았는데, 도(度)를 지나친다. 달리 좋게 보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도 고억에게서 충성심이라는 걸 기대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도적 주제에 충성심은 쥐뿔…….’

구황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바라는 것도 없었다.

있다면 단 하나, 역시 고억의 목뿐이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을 억지로 감춘 구황이 웃었다.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그래야죠.”

닮은 미소를 지어 보인 고억이 고개를 주억였다.

구황과 고억이 만들어낸 거짓 작전의 내용은 이러했다.

예정된 대로 장가항까지 모두 함께 이동한다.

탈출을 결심한 것과, 장강에 올라 안휘로 넘어가자는 생각 역시 다르지 않게 모든 진실을 밝혔다. 다만 황서연도 함께 라는 이야기를 덧붙였을 뿐이다. 남궁세가의 영역인 안휘로 넘어가면 만금장의 추격도 약해질 수밖에 없고, 거래에도 제법 숨통이 트이게 된다는 것이 구황의 의견이었다.

단지 거래처를 옮길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계획을 실행한다고 생각했다.

수하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는 것만으로는 얼핏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구황이 보여주었던 욕심을 생각하자면 쓸데없는 집착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전이명을 비롯한 희생양, 그러니까 미끼 무리가 만들어졌다.

“너희들은 낚시꾼이다.”

물론 구황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어찌 됐든 그들이 만금장을 낚아 올려야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그들도 바보는 아니기에 걱정은 있었다.

“시선이 모두 우리한테 몰리는 것 아닙니까?”

“걱정 마. 우리가 먼저 빠져나가고 너희가 뒤다. 그리고 우리도 저걸 들고 나갈 거야.”

구황은 비처의 구석,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놓았던 쌀 포대를 가리켰다.

“놈들이 저런 것에 속을까요?”

전이명은 여전히 불안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 당연하다.

“아직은 속아. 저 중에는 만금장 고수가 없다.”

주변을 메운 사람들의 숫자는 많다. 하나 제대로 된 고수로 보이는 이들은 없다.

“전이명, 기회는 지금뿐이다. 우리가 여기서 모두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구황은 고억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전이명을 설득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