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7화
“잠시만요. 조금만 쉬고 계시지요.”
유모가 아이를 씻기겠다며 물수건으로 몸을 닦은 후, 서시의 옆에 내려놓는다.
벌써 두 번째.
갓 태어난 자식과 눈을 마주한 서시의 눈에 감격이 어렸다.
“예쁜 아가.”
어찌 이리 사랑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어쩜 이리 예쁠 수 있단 말인가?
세 가족 아니, 이제 넷이 된 가족들의 시선이 갓 태어난 아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설렘과 감격을 비추었다.
“우아야, 예쁘지?”
서시의 물음에 동생의 모습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던 황준우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네. 너무 예뻐요.”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어린 동생은 너무나 예뻐 보였다.
“앞으로 네가 지켜 줘야 할 동생이란다.”
황석후가 황준우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할 수 있지? 오빠로서, 가족으로서 말이다.”
황준우의 고개가 작게 주억여졌다.
‘오빠, 가족…….’
생소하지만 어느덧 생소하지 않게 된 그 두 단어를 곱씹으면 가슴속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풍족함이 차오른다.
결단코 잃고 싶지 않다.
다른 모든 것은 잃을지라도 오직 이 ‘가족’만큼은 지킨다.
‘지킬 거야……. 내가, 꼭.’
작은 주먹을 움켜쥐며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다짐했다.
가족들의 행복한 기운 속에서 황준우에게 있어 소주제일, 아니 중원제일의 여동생이 태어난 순간이었다.
3. 천조신공
시간은 또다시 흐르고 흘러 황준우의 여동생, 황서연이 태어난 지도 어느덧 삼 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황서연이 태어난 이후로, 더욱 풍족해진 행복으로 가득 찬 황준우는 어느덧 일곱 살이 되었다.
또래치고 제법 큰 키.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제법 귀엽고 고운 외모가 눈에 띄는 황준우는 근래 들어 소주제일의 미소년이라는 이야기까지 듣고 있었다.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나쁜 시간은 전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생각지도 못했던 인연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글…… 선생님이시라고요?”
황준우가 떨떠름한 음성을 토해 내며 묻는다.
“그렇단다. 어렵게 초빙한 분이지.”
황석후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옆에 앉은 인물을 소개했다.
“강소와 안휘 일대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지. 수불석권(手不釋卷)으로 이립이 되지 않은 나이에 진사(進士)가 되신 분이란다.”
진사라 함은 향시에 합격한 거인(巨人)보다도 훨씬 높은, 실상 과거시에 급제하여 황궁의 관리직을 맡고 있어야 될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대체 왜 만금장에 왔는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돈의 위력이란 것이 많을수록 얼마나 크게 확장될 수 있는지는 이미 그간 잘 보며 자라 왔으니 말이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갑작스레 글공부라니?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황준우에게 있어 가장 멀게만 느껴졌던 단어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반갑습니다, 도련님. 백교라고 합니다.”
손에 들고 있는 공작깃 부채를 자연스럽게 펄럭이며, 가는눈을 더욱 가늘게 좁힌 백교가 웃으며 말했다. 척 보아도 문사(文士) 느낌이 가득 풍기는 그 모습을 흘낏 바라본 황준우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어, 음…… 그게…… 아빠 아니, 아버지.”
“말해 보거라.”
“그…… 글……공부라고 하셨습니까?”
“그리 말했다.”
황석후가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아, 아버지. 아시겠지만 저는 문(文)보다는 무(武)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한데 어찌 갑자기…….”
“어허, 우야.”
“예, 아버지.”
“사내대장부가 문무(文武)를 차별하여서야 어찌 대장부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설령 무관(武官)을 꿈꾼다 한들 기본적인 학문 없이는 목표를 이룰 수 없으니, 이 기회를 발판 삼아 성장할 수 있도록 해 보려무나.”
“그, 기본적인 공부라면 이미 천자문을…….”
다급하게 변론하던 황준우의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번개가 내리쳤다.
시선을 마주한 황석후의 눈에 담긴 큰 기대감을 본 탓이었다.
“그래, 작년에 모두 떼었지. 고작 칠 주야 만에 말이다.”
“…….”
작년, 황석후는 어린 아들에게 천자문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며 자습(自習)을 시켰다. 사실 큰 기대는 한 일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황준우의 모든 행동은 무에 연관되어 있었고, 딱히 공부를 잘할 것 같은 느낌은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데 그 어린 여섯 살의 황준우가 고작 칠 주야라는 짧은 시간 만에 천자문을 모두 떼었다며 황석후에게 달려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일에 몇 번이고 시험을 해 보았지만 황준우는 완벽하게 답을 내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똑바르게 답을 적는 황준우를 바라보던 황석후의 눈에 담겨 있던 그 감정을 미리 눈치챘어야만 했다.
‘이미 아는 거라고 빨리 끝냈으면 안 되는데!’
전생에도 모두 익혀 놓았던 천자문을 오래 붙잡고 있기가 지겨워 적당히 둘러댄다는 것이 큰 사태를 불렀다.
기대로 가득 부푼 황석후의 눈을 바라보니 더 이상 말문조차 이어지지 않았다.
“허허, 그럼 잘 배워 보거라. 선생님, 모자란 자식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며, 백교를 향해 고개 숙여 보이는 황석후다.
“소주 대인의 청일진대 어찌 게을리하겠습니까. 믿고 맡겨만 주시지요.”
입가를 부채로 가린 백교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한다.
황준우의 생각이 어찌 되었든,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합쳐진 뒤였다.
그렇게, 황준우의 글공부가 시작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준우는 공부가 하기 싫었다.
그래서일까?
수업 시간의 대부분은 딴청으로 보냈다.
이러한 행동에는 의도적인 부분도 분명히 존재했다.
‘기대가 많으시다면 그 기대를 없애 드리면 되지.’
황석후는 황준우가 대단한 문재(文才), 혹은 천재인 줄 알지만 실상 그는 글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최악이라 할 만큼 머리가 열리지 않았다.
어차피 억지로 하면 잘될 리도 없으니, 적당히 하다 스승이 지쳐 나가떨어지고, 끝내 황석후도 포기하길 기대한 것이다.
하나 황준우는 얼마 가지 않아 그런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흠…… 공부가 하기 싫으신 겁니까?”
여느 때와 같이 책이 아닌 바깥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우는 황준우를 향해 살랑이던 부채를 손에 가볍게 내려놓은 백교가 물었다.
“예? 뭐…… 좋지는 않습니다.”
황준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전혀 관심도 없는 글공부가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째서입니까? 글공부가 어려우신 탓입니까?”
황준우의 눈이 반짝였다.
어차피 하지 않을 것이라면 되도록 빨리 끊는 것이 좋았다.
“예, 너무 어렵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영특하게 보고 계시지만 보십시오. 아직까지 소학(小學)의 입교(立敎)도 익히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게 있어 글공부는 너무 난해한 문제입니다, 선생님.”
“흐음…….”
황준우의 토로에 다시금 부채를 들어 입가를 가린 백교의 눈이 가늘어졌다.
“과연…….”
“무리입니다. 솔직히 무리인 걸 하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애초부터 학문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니…… 선생님께서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흐으음…….”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황준우의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며 보이지도 않는 가는눈을 살짝 뜬 백교가 웃음을 흘렸다.
“훗, 확실히.”
“들어주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황준우의 기대 담긴 음성을 단숨에 내동댕이친 백교가 더욱 짙은 눈웃음을 그렸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영악함에 영특함이 과연 범재(凡才)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주는군요.”
“도련님께서 지금 하신 말씀을, 누가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가 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과연…… 어려서부터 신동 기가 있다고 하였던 소주 대인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었군요.”
“어, 어버?”
당황한 황준우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황준우를 바라보며 부채를 강하게 내려놓은 백교의 눈에서부터 으스스한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먹물 냄새가 가득 풍기던 문사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기세로 가득 찬 난폭한 무사의 그것으로 뒤바뀐다.
“세간에서는 제 이름을 달리도 부르곤 합니다. 혹시 아십니까?”
알 리가 있나.
황준우의 고개가 좌우로 크게 내저어졌다.
“백흘견(白?犬).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아주 지독한 하얀 개라는 뜻입니다.”
“네, 네?”
침을 삼키는 황준우를 향해 더욱 기세를 피어 올린 백교가 말했다.
“제 사전에 포기란 없습니다, 도련님. 안 되면 될 때까지. 오늘부터 매일 삼 시진씩 공부에 전념해 보도록 합시다.”
“네, 무, 무슨?”
“자, 그럼 다시 한 번 집중해서 공부를 시작해 보도록 할까요, 도련님?”
당황하는 황준우를 보며 기세를 거둔 백교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기세에서 밀렸다.
전생의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몸이 문사의 기세에 밀려 말도 못한 채 주춤거렸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선생…….’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 숨기는 게 더 많은 인물이 분명하다.
순간적으로 비추었던 기세는 글만 익힌 문사가 보일 수 있는 기세가 결코 아니었다.
황준우가 전생에 그토록 싫어하던 우내십존에 비해서도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대체 이 선생 정체가 뭐야?’
호기심이 차오른다.
하나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빠한테 물어볼까?’
물론 이 역시 대답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환장하겠네.’
사실상 백교의 정체보다도 더욱 미칠 것 같은 건 결국 공부를 해야만 된다는 사실이었다.
백교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황준우가 조금만 딴짓을 하려 하면 단숨에 기세를 내뿜어 그를 압박했다. 아직 어린 탓에 제대로 천조신공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견디기 힘든 기세였다.
‘젠장, 나이가 지학(志學)만 됐어도…….’
천조신공의 깊이는 점점 깊어져 가고 있으나, 그를 사용할 수 있는 육체가 아직 만들어지는 과정인 탓에 기세에 억눌려만 있는 황준우로서는 억울한 노릇이었다. 완벽한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천조신공의 유일한 약점, 삼극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에서 발목이 잡혀 버린 황준우의 슬픔이기도 했다.
“흠, 조금 아쉬운 점이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요. 하면 내일 뵙겠습니다, 도련님.”
어느덧 삼 주야째.
웃음을 보인 백교가 부채를 살랑거리며 방 바깥으로 나갔다.
백교에게 억지로 강압 당하다시피 하여 시작한 공부를 힘겹게 끝낸 황준우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책상 위로 엎어졌다.
‘이, 이 상태로는 안 돼.’
당장으로서는 백교의 기세를 이겨 낼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매일 이렇게 글공부만 하며 휘둘려서도 답이 없었다.
실상 최근 삼 주야간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글공부에 쏟다 보니 무공을 갈고닦을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아버지, 아버지랑 대화를 해야겠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황준우가 외치자 방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호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도련님?”
“가자, 경호. 우린 가족의 대화가 필요해!”
경호의 의문을 뒤로한 채, 단숨에 책상을 박차고 방을 빠져나온 황준우가 황석후의 집무실을 향해 후다닥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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