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6화
중원 지방 어디에나 하나쯤은 있을 법한 뻔한 이름의 장원이지만, 그 세 글자 앞에 또 다른 두 글자가 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주 만금장.
예로부터 말하길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엔 소주와 항주가 있다 하였다.
두 도시 모두 아름답기로 또한 부호(富豪)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그중 순수하게 금력(金力)으로만 제일을 뽑자면 가히 소주가 압권이라 할 만하였다.
오죽하였으면 소주에서 나고 항주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까지 있겠는가?
항주의 부호들도 엄청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소주에 숨은 부호들이야말로 중원 전체에 꼽히는 진짜 부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만금장.
소주 만금장은 소주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제일로 꼽기를 마다하지 않는 소주제일장이니 그 가세(家勢)가 가히 북경의 권문세가에 못지않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처음 황준우는 자신이 그러한 상가(商家)의 자제라는 것을 알았을 때,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 봐야 상가 아니야?’
대체적으로 권력을 가진 황궁의 분위기도 그러하지만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 살아가는 강호에도 역시 상가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게 펼쳐져 있었다.
강호를 그리 오래 떠돌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보고 배운 것은 많은 황준우가 생각하기에 상가는 그저 조금 돈 많은 집안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한데, 만금장은 그 경우가 달랐다.
처음 황준우가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자그마치 집 안에서 길을 잃었을 때였다.
‘무슨 집이…… 이렇게 클 수도 있구나.’
대다수를 건물 제일 안쪽에 위치한 황석후와 서시가 머무는 소향원(小響院) 내에서만 생활했기에 짐작도 못 했다. 실상, 처음에는 그 소향원이 집의 전부인 줄 알았다. 마당에 정원까지 딸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집이 크게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 착각이었다.
소주 만금장의 장원은 그야말로 작은 성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했다. 어린 황준우는 그 속에서 작은 개미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냥 부자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부자구나.’
처음 집 크기를 알았을 때 황준우가 했던 생각이다.
하나 그 생각조차도 얼마가지 않아 또 뒤바뀌었다.
거대한 만금장 내에는 일곱 개의 장원이 또 세밀하게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가장 깊은 소향원은 황석후를 비롯한 만금장의 주인 일가가 살아가는 곳이다. 그러한 소향원 내에만 해도 건물이 또 다섯 채나 들어서 있는데, 그중 두 개의 건물은 황석후 일가의 수발을 드는 시녀들과 시종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리고 소향원의 바로 앞쪽 중앙에는 만금장에서 운영하는 표국과 상단에서 일하는 무인들이 머무는 금호원(金護院)이 있는데, 황준우가 기절할 듯 놀랐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무슨 상가에 무사들이 이렇게 많아? 어지간한 무가(武家)보다 더 많잖아?’
그 수준이 삼류잡배나 될 법하면 우스울 텐데, 심지어 무공 실력도 제법인 인물이 여럿이었다. 아니, 그를 벗어나 최소 이류도 되지 못해 보이는 무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쟁자수들 중에서도 몇몇은 무공을 익힌 것으로 보였다. 이쯤 되면 상가라고는 하지만, 어지간한 명문세가에 못지않은 무력을 구축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금력의 위력이란 게 이리 대단한 거였나? 아니지, 돈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가능한 일인 건가?’
금호원에 이어 밖의 일을 돕는 시녀와 시종들이 머무는 좌위원(左爲院), 그 외에 만금장 입구에 위치한 전장(錢莊)까지 모두 둘러보게 된 황준우의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거 엄청난 부자 정도가 아니라 무지막지란 표현도 모자란 부자잖아!’
소주 내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소문으로 만금장이 마음만 먹으면 성 하나를 통째로 사는 것도 우습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농담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결국 소주 만금장이란 가히 소주의 왕(王).
소주제일 아니, 중원제일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초거대 상가인 것이다.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다시 태어나고 봤더니 복이 알아서 굴러떨어진 셈이었다.
그러한 모든 사실을 알고 나니 황준우가 느낀 소감은 단 하나였다.
‘솔직히 나쁘진 않지.’
대놓고 말해 좋다.
돈이 많아서 안 좋을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돈이 많으면 생각하는 것을 벗어날 정도의 편의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도련님, 이제 탕에서 나오셔도 좋습니다.”
시녀들의 말에 따라 몸을 담구고 있던 따뜻한 목통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일으킨 황준우가 양팔을 벌린다. 그러자 시녀들이 달라붙어 알아서 몸을 닦아 주고, 깨끗하게 정돈해 준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이 과정도 이제는 완전히 적응해 버린 황준우가 자신의 몸을 편안히 시녀들의 손에 맡겼다.
‘그래, 인정해서 좋긴 좋지. 단순히 돈을 벗어나서라도 말이지…….’
전생에는 얼굴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 어머니.
부모님이 이제는 생겼다.
게다가 황준우를 제 손자처럼 봐 주는 유모에, 잔소리가 심하지만 정이 많은 경호까지.
‘내 주변에 언제 이렇게 사람이 많은 적이 있었던가?’
전생의 황준우는 강했지만 고독했다.
친우라 할 수 있는 이들을 하나도 못 사귄 건 아니지만, 이제와 떠올려 보면 그들이 모두 진심을 보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많은 것을 가지게 된 황준우는 가끔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질까.
예상치 못한 불화로 모든 것을 잃게 될까.
‘가진 자의 두려움이란 것인가…….’
새삼스레 손에 쥔 것을 놓기 싫어 어떠한 악행도 서슴지 않던 이들의 마음도 짐작이 갈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똑같은 이가 되고 싶은 심정은 조금도 없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현재로서는 원공 영감한테 고마워해야 할 판인가?’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육체가 성장 중인 탓.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란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답답한 것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보자면 결국 원공의 선택이 황준우를 행복이라는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감정으로 이끌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 사실에 원공을 인정하지 못한 황준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네, 네?”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도련님?”
시녀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황준우를 향해 물었다.
“아, 아니야. 불편하긴 무슨.”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후, 머쓱해진 황준우가 재빨리 양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함께 도리질 쳤다.
그 모습에 작은 웃음을 보인 시녀가 고개를 주억인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목욕을 재개하겠습니다.”
다시금 황준우의 머리 위로 물이 쏟아지고, 목욕이 재개되었다.
‘빌어먹을, 어찌 됐든 그 영감은 나를 죽인 거나 다름없단 말이야.’
자신을 살해한 원수한테 고마워해야 된다니, 모순(矛盾) 아닌가? 왠지 모르게 하늘 위 어딘가에서 웃고 있는 것만 같은 원공의 얼굴을 떠올린 황준우가 재빨리 머릿속 상념을 지웠다.
몇 번이고 생각해 봐야, 제 속만 답답할 뿐이었으니 말이다.
목욕이 끝났다.
수많은 시녀들의 도움을 받은 탓에 딱히 힘들 것도, 어려울 것도 없었다.
물기가 가득한 머리와 몸을 말리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양팔을 벌린 채 가만히 서 있으면 시녀들이 달라붙어 알아서 다 해 준다.
나이가 든 이후에야 이렇게까지는 안 될 테지만, 어린 지금이라면 어느 정도 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게 황준우의 생각이었다.
‘편안하군.’
목욕으로 인한 개운한 기분과 살짝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자연스레 황준우가 미소를 그리게 한다.
언제나와 같은 기분 좋은 하루의 마무리다.
그리 생각하던 황준우의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것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였다.
문이 다급하게 열리며 황준우의 몸을 말리고 있던 시녀들이 놀란 눈빛을 보낸다.
“무슨 일입니까!?”
시녀 중 한 명이 숨이 찬 모습으로 문을 짚고 선 경호를 향해 다그치듯 물었다.
“그, 그게…… 안주인께서…… 방금 산통을…….”
“산통?”
시녀들의 놀란 반응과 황준우의 작은 목소리가 내부에서 동시에 어우러졌다.
‘산통이라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서시의 배가 불러 오고 있었다.
덕분에 서시가 자신의 동생을 임신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언제쯤일지는 예상치 못했었다.
다급히 지면으로 뛰어내리며 시녀들이 건네는 옷을 받아 빠르게 걸친 황준우가 다급히 외쳤다.
“가자, 경호. 빨리!”
동생이 태어난다.
알고는 있었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던, 하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을 설레게 했던 현실이 다가오고 있단 사실이 황준우의 걸음을 다급하게 재촉했다.
‘동생이라고?’
전생의 황준우는 고아였으니 당연히 형제 따윈 없었다.
‘남자아이일까? 여자아이?’
아무렴 무슨 상관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란다.
‘동생…….’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때와는 다른, 무언가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황준우의 배 속 아래쪽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대며 올라왔다.
“왔느냐?”
서시의 방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걱정된 표정으로 방 내부를 보고 있던 황석후가 달려오는 황준우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네, 네. 엄마는요?”
황준우의 걱정된 시선 역시 방 안을 향했다.
얕은 서시의 신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걱정 말거라. 별일 없을 게다.”
아들의 아이답지 않은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은 황석후가 황준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여러 가지로 신비한 점이 많지만 누가 뭐라 하여도 자신의 아들이다.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황석후였다.
또한 서시 역시 믿고 있었다.
조금 힘든 상황이지만 건강히 순산할 것이다.
그러한 황석후와 황준우의 바람이 닿은 것일까?
“으아앙-!”
방 안에서부터 곧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준우와 황석후의 입가로 함박웃음이 번진 것은 동시였다.
“예쁜 아가씨이십니다! 산모께서도 무사하시고요.”
방 안에서부터 들려온 유모의 음성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황석후가 다급히 방문을 열었다.
침상 위, 지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서시와 이제 갓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유모가 보인다.
뒤에서 그를 지켜만 보고 있던 경호의 입가로도 미소가 번졌다.
순식간에 달려가 서시의 건강부터 확인한 황석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제 갓 태어난 아이가 꼬물거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하하…… 오빠도 그러더니 너도, 제 어미를 닮아 예쁘구나.”
황석후의 웃음에 호기심을 참지 못한 황준우가 침대 위로 기어올라 아이를 바라보았다.
‘자, 작다.’
작고, 신비롭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는 생명의 요동을 알려 주듯 몸을 비틀고 있었는데, 그 모습조차도 감동스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도 저랬나?’
처음 태어난 순간 유모의 품에 안겨 엉덩이를 맞던 때를 잠시 떠올린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아무렴 어때.’
진짜 동생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황준우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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