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5화
지면에 발을 딛는 것만으로 땅과 몸이 하나과 되는 것과 같은 기묘한 감각이 황준우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몸 내부에서는 기분 좋은 대지의 기운이 활기차게 뛰어노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그 기운을 이용해 전생과 같이 마음껏 세상을 배회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하나 아쉽게도 아직 어린 황준우의 육체는 그러한 기운을 모두 소화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시기상조……란 거지.’
황준우의 입가로 묘하게 써 보이는 웃음이 번질 쯤 이마에 영웅 건을 멘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 황준우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며 물었다.
“일급목수에게 부탁해 만든 물건입니다. 한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청년의 손에는 작지만 분명한 형태를 가진 목검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를 보는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을 내뿜었다.
“걱정 마, 경호. 어머니께는 비밀로 할게.”
경호에게서부터 빼앗듯 목검을 훔친 황준우가 자신만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황준우의 아버지, 황석후로부터 아들에 대한 전적인 호위 임무를 명받은 경호의 입장에서야 실상 황당한 일이었다.
‘대체 뭘 알고 말씀하시는 건지…….’
아무리 또래치고 영리한 데다, 애답지 않은 성품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이제 고작 네 살이다.
또래치고를 굳이 빼더라도 갓난아기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그런 주제에 어찌 되었든 무기가 될 수 있는 목검을 들고 ‘걱정 마’라고 말하니 기가 찰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납득은 되지 않지만…… 장주님께서 명하신 일이니까.’
목검을 손에 쥔 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준우를 보며 한숨을 연달아 쉰 경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리 장주님이 허락해 주셨다지만 반 시진이 한계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알겠어, 알겠어.”
건성으로 답하며 손을 휘휘 저은 황준우가 사람 하나 없는 연무장 흙바닥을 향해 나아간다.
여전히 걱정 가득한 모습으로 황준우를 바라보는 경호였지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안부인께 들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망을 보기 위해 문 바깥으로 향하는 경호가 마지막까지 걱정되는 시선을 떨치지 못한 채 황준우를 향해 말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소리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알겠대도~”
가볍게 답한 황준우가 자신의 작은 몸에 비해 수십 배는 커 보이는 연무장의 중심에 서며 답했다.
‘그저 어린 아이의 고집인 건지 아니면…….’
속내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생각한 경호가 연무장의 문을 닫았다.
이제 겉으로 보이는 한에는 완전히 홀로 연무장의 중심에 선 황준우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 아버지도 묘한 잔꾀를 쓰신단 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황준우는 어릴 때부터 독특했다.
말도 빨리 떼고, 행동도 어린아이답지 않다.
게다가 어딘가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만금장(萬金場).
소주(蘇州)제일이라 불리는 장원의 주인인 황석후가 그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황준우의 갑작스러운 연무장 이용 요청에 허가를 주었고, 그를 몰래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뭐, 어차피 굳이 숨기려고 한 것만도 아니었고…….’
정확하게는 딱히 보일 기회가 없어 보이지 못했을 뿐이다.
실제로 지금도 천조칠무를 제대로 펼쳐 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황준우 스스로도 알아보고 싶을 뿐이었다.
아직 성장이 모두 끝나지 않은 어린 몸으로 그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삼극 중 인과, 지의 기운이 그를 북돋아 주고 있다지만 한계는 분명할 터였다.
‘너무 무리했다가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고.’
본연히 이룬 경지는 천조신공의 삼단공에 이르렀다지만, 그를 펼칠 수 있는 육체는 아직 여물지 않은 채였다. 순수한 육신에, 순수한 기운을 받아 더욱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아직 분에 넘치는 기운을 육체에 받아 이용하려 했다가는 주화입마에 걸려 곧바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황준우로서는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내공 없이 움직여 볼까.’
천조칠무에는 천조신공을 제외한 일곱 가지의 무가 담겨 있었다. 하나 그중 전생의 황준우가 직접 사용했던 것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스스로가 만든 무공이나, 상상치 못할 정도의 존재가 탄생한 덕에 재능의 폭이 부족했던 탓도 있다. 하나 병장기를 사용하는 부분은 조금 달랐다. 그냥 익히지 않았다. 두 주먹과 단단한 신체만으로도 무엇과도 싸울 수 있다고 자신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재생한 삶 속에서 이어진 고민 끝에 그가 천조칠무의 절반 정도밖에 익히지 못했던 것은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욕심이 적었다. 또 한편으로는 오만했다. 천조칠무에는 엄연히 일곱 가지의 무리(武理)가 존재한다. 그중 후반부 이무(二武)는 존재의 유무를 알 뿐 어떠한 형태가 될지 방향도, 길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이번 생에서는 조금씩이라도 병장기를 잡아 보기로 결심했다.
솔직히 어색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룰 수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때문에 어린 신체에 맞는 목검을 주문했다. 생각 같아서야 진검(眞劍)을 휘두르고 싶지만 지금의 육체로는 분명한 무리다. 그쯤은 아무리 자신만만한 황준우라도 알 수 있었다.
“좋아, 시작하기 전에…….”
발끝을 지면에 댄 황준우의 호흡이 깊어진다.
동시에 오로지 황준우에게만 들리는 대지의 얕은 진동이 전해졌다.
그 속에서 흐르는 기운은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가 모습을 감추고 있는 자들의 위치를 황준우에게 전해 준다. 아직 어린 황준우의 육체는 이만한 내기를 감당하지 못한다. 때문에 편법이라 할 수 있는, 기운의 소통을 통해 대지의 기운을 빌려서 숨은 사람들의 위치와 숫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자 마치 땅이 황준우에게 말을 걸 듯 모든 사실을 알려 주었다.
‘숨어 있는 사람은 셋…… 아니 넷인가?’
말이 편법이지, 천조신공쯤 되는 기묘한 무공이 아니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황준우가 어린 시절 처음 맨발로 디딘 땅이 순수한 흙이 아니었다고 하여도 이러한 일은 불가능했을 터였다.
‘이쯤 되면 운이 좋다고 할 것도 아니라, 기연이지.’
흔히들 터(攄)가 좋다고 하지 않는가?
황준우가 머무는 집.
만금장의 본가가 딱 그에 속했다. 그야말로 오행만물의 기운이 잘 조화되어 평안하게 퍼져 있달까? 오랜 시간 만금장이 소주제일의 명성을 잃지 않은 데에는 이러한 풍수지리적인 조화의 도움도 적지 않을 터였다.
“어찌 됐든…… 딱히 감출 것도 없으니 가 볼까.”
치이익-!
모래 바닥을 작은 발로 긁으며 품새를 취한 황준우의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공도 이용하지 않은 데다, 육체 역시 여물지 않은 상태인 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또한 초식이 화려하지도 않았다.
하나 정확하고 올곧다.
그 정도가 단순히 정직함뿐이라면 무섭지 않겠지만, 황준우의 것은 조금 달랐다.
오랜 세월 쉬지 않은 수련과 피나는 혈투 끝에 영혼에 새겨진 완벽한 투로(鬪路)다.
만약 숨어서 지켜보는 이들 중 초절정 이상의 고수가 있다면 황준우의 검을 보며 몸을 떨었을지도 몰랐다.
아쉽게도 지금 숨어 황준우를 지켜보는 이들 중 그 정도의 고수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말이다.
기합과 함께, 종 베기를 통해 이어지던 초식을 마무리한 황준우의 입가로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거…… 일급목수가 만들었다더니 제법이잖아.”
검의 균형이 마치 제 몸인 것처럼 딱 맞다.
어린아이의 체형을 고려하여 검을 만들어 본 적은 없었을 것이 분명한데, 완성도가 굉장히 높은 것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라 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제법 신경 써 주신 거네.”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조른 적 없는 황준우가 처음으로 부탁한 것이다.
궁금증도 있지만, 나름 기대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컸으리라.
‘아버지……라.’
전생에는 도저히 알 수 없던 뭉클함이 가슴에 차오른 황준우가 다시금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좋아. 그럼 좀 본격적으로 가 볼까.”
초식을 펼쳐 보인 것은 그야말로 몸 풀기.
진짜는 내공을 이용한 움직임에서만 나온다.
‘어디 한 번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너무 과하지는 않게, 하나 부족하지도 않게 대지로부터 내력을 빌려 온 황준우의 눈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작은 목검에 또한 마치 허상과 같은 푸른빛 아지랑이가 잠깐 반짝인 후 사라진다.
뒤를 이은 것은 황준우의 빠른 걸음이었다.
단순히 초식만 펼쳐 보일 때와는 완연히 다르다.
단 한 걸음이었지만 그 무게감이 훨씬 더 깊었다.
순식간에 뛰쳐나오는 검은 어린아이가 휘두르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과할 정도로 빠르다.
“어, 어랏?”
말 그대로 과했다.
발이 꼬이며 괴상한 비명을 내지른 황준우가 제자리에 그대로 엎어졌다.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비명을 내지른 후로는 황준우의 몸이 엎어진 자세 그대로 부르르 떨려 왔다.
‘으으…… 오랜만에 무공이라고 너무 신났나.’
부끄럽다.
아무리 어린아이의 몸이라지만 전생에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몸이 아닌가? 한데 내력의 위력조차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이런 엉망인 꼴이라니.
‘제길, 쪽팔려, 부끄러워.’
보여 주긴 뭘 보여 준단 말인가.
괜한 잘난 체를 했다는 생각에 귓불까지 붉어진 황준우가 땅에서부터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도, 도련님!”
밖에서 망을 보고 있던 경호가 다급히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넘어진 황준우를 부축했다.
“으으…… 역시 아직은 무리였나.”
“무슨 소립니까. 대체 어떻게 움직이셨길래…….”
“아하하. 별일 아니야, 경호. 괜찮…….”
“괜찮긴요! 지금 이게 무슨. 역시 말렸어야 했는데……!”
창백해진 얼굴로 황준우의 새하얀 피부에 묻어난 모래를 조심스럽게 턴 경호가 단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오늘은 이쯤하시지요.”
“에…… 하지만…….”
“도련님!”
경호의 단호한 얼굴을 마주한 황준우의 눈에 고심이 어렸다.
전생의 그는 누가 말린다고 멈추는 성격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쯤 되었다면 전 무림과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터고 말이다.
하나 현생의 황준우는 달랐다.
“으, 으음…….”
단호한 경호의 눈빛을 마주치다 못해, 스리슬쩍 피한 황준우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미, 미안, 경호.”
양 볼이 붉어진 채, 너무나도 작게 흘러나온 그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조금은 안도한 표정을 지은 경호가 황준우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시면 됐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결국 네 살 황준우는 인생의 첫 무공 수련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채 경호의 손을 붙잡고 연무장 바깥을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