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파넬라는 죽을힘을 다해 도주했다. 잠깐 여유를 부렸건만 마지막 남은 하나를 당해내지 못해 이런 꼴을 보이고 있었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체면불구하고 도망을 하게된 경위는 간단했다.
메피스토의 술법이 아사셀을 변모시켰다. 단순히 그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것이 아니라 이건 아예 딴 세상에 와 있는 것처럼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매번 회심의 공격이 허공을 치는 듯 허망하게 빗나갔고 어디에도 있으며 그 어느 것도 실체가 아니었다. 때로 제대로 공격이 먹혀들어 뼈가 뒤틀리고 피가 튀는 걸 보며 쾌재를 불러보지만 그것도 잠시,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그것이 되려 자신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었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아사셀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르는 소리에 화답하는 것은 허무맹랑하게도 영인지 혼인지 모를 분명치 않은 존재들이었으니. 그것들이 캄파넬라의 손과 발을 묶고 체내를 마구 뒤집어놓았다.
몇 번 호되게 당하는 와중에도 고집을 부려 대처해보았지만 결론은 상대할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캄파넬라는 일단 도주하고 보았다.
아사셀의 추격은 끈질겨서 어디로 가도 그의 눈길을 피할 길은 없었다. 동료들을 만난다 해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여럿이면 방법이 생길까 싶어 무작정 그들의 종적을 따라나섰다.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지만 그들도 이곳저곳을 바삐 움직이고 있는 터라 한 공간에서 마주치기가 쉽지 않다. 도망다니다 보니 잊혀진 공간 안에 몰아넣은 수하들이 모조리 밖으로 나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카오스가 그들을 마구잡이로 사냥하고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하지만 제 코가 석 자나 빠졌는지라 그들의 위기를 모른 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캄파넬라를 추적하던 아사셀에 의해 비밀차원의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다른 여러 곳에서도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차원이 붕괴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게 된 메타트론이 그곳의 사람인들 신경 쓸까! 무자비한 손속에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헤르바르트와 빈델라트, 코모라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사람들을 대결 중에 끌어들이는 메타트론이 죽이고 싶도록 얄미워 더 큰 힘을 내면 더 큰 피해만 속출하니 애가 탈 지경이다.
그들이 의문스럽게 여기는 건 어찌하여 잊혀진 공간이 열렸는 가였다. 일이 점차로 꼬여 가고 있다는 불길함이 그들을 더 조급하게 몰아가고 있었다.
루시퍼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비밀차원의 사람들이 자기네 지도자가 침입자와 싸우고 있으니 가세한답시고 손을 쓰면 그게 도리어 루시퍼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루시퍼는 더욱 적극적으로 그들을 이용했다.
이래저래 희생을 당하는 이들은 비밀차원의 사람들뿐이었다.
비밀차원에서 여섯의 지도자들을 제외하곤 가장 강하다는 우라노스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그나마 카오스의 혼란을 어느 정도는 견뎌내고 있었으나 그것도 모여 힘을 더해 버티는 정도였다.
속이 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건 아퀴나스 하나였다. 그가 우라노스들이 모인 곳을 찾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자들을 그곳으로 모아들이고자 힘을 썼다. 그가 한 번 위엄을 드러내니 비밀차원 전체를 진동할 큰 울림이 있었고, 그 울림이 신호가 되었던지 하나, 둘씩 모여드는 자들이 있었다.
아퀴나스의 등장 후에 정신을 수습한 우라노스들은 그가 이처럼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지도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또 이상하단 생각도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었으나 아퀴나스를 믿고 기다렸다.
아퀴나스의 큰 위엄은 카오스의 훼방도 침범치 못했다. 카오스는 고작 아퀴나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을 맴돌며 새가 모이를 쪼듯 모여드는 사람들 중 일부를 낚아채기 바빴다. 조금이라도 더 수확물을 얻기 위해 그도 필사적이었다.
제왕들이 한 꾀를 내었다. 하나가 말하길 마르시온이 승부심이 강하니 그를 자극시켜 싸움에 나서게 해보자고 했다. 들어보니 그 생각이 들어맞으면 생각지 않았던 이외의 소득을 올릴 수도 있으리라 여겨 로메로도 찬동했다. 문제는 누가 그를 상대할 것 인가였다.
서로 자기가 해보겠다고 자원하지만 로메로의 판단에 그와 한 수라도 섞어볼 인물은 한정돼 있었다. 제왕들이 먼저 해당되겠고 나머지 중엔 제석, 분트발, 카라반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불칸도 조금은 쳐진다고 생각되니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그보다 못한 이가 자원한다고 해서 싸움을 붙여줄 수는 없었다.
역시나 원한이 있는 제왕이 가장 적임자였다. 제왕이 진중에서 나가 큰 소리로 마르시온을 자극시켰다.
“간악한 수괴 마르시온은 듣거라. 내 너를 응징할 기회를 엿보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나 무리 중에 섞여 판가름을 못낸 것이 못내 섭섭하고 아쉽다. 두려움 때문에 웅크리고 있을 생각이 아니면 지금 나와 승부를 결해보자.” 큰 소리가 대기를 타고 전해져 오니 모두가 들었다.
마침 모여 있던 터라 헤르파가 마르시온의 표정이 급변하는 걸보고 혹시나 싶어 말리고 나섰다.
“적의 자극에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종국에 가려질 큰 승부를 생각해야지 이런 소소한 다툼의 결과가 우리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그 말도 맞는 말이었지만 어디 마음이라는 게 이치에 합당한 것으로만 가려질 것인가? 자극하는 소리의 임자가 제왕 중 하나임을 아니 더더군다나 마음이 동해 들썩였다. 쿠사누스들도 한소리로 마르시온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바쁘다. 결국엔 듣지 말아야 할 소리까지 들었다.
“네 놈이 끝내 간악한 꾀로 권자를 얻었음을 자인하는구나. 무리가 엄호하지 않으면 두려워 제 뜻을 펼치지도 못하는 자가 어찌 이 큰 전쟁을 일으켰는지 모르겠구나.
내 너의 그릇을 알았으니 더는 간청하지 않겠다만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겁에 질려 청하는 결투에도 응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이 큰 전쟁을 일으켰는지 모르겠구나.
내 너의 그릇을 알았으니 더는 간청하지 않겠다만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겁에 질려 청하는 결투에도 응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수좌의 권위를 바라겠는가!
널 따르는 자들이 겉으로는 충성을 맹세하지만 속으로야 이런 너를 무시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가엽기 그지없구나, 마르시온.” 이쯤 되고 보면 말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쿠사누스들도 입을 다물고 헤르파도 더는 막지 않았다. 마르시온이 벌써 떨치고 일어선 까닭이다. 그는 바람처럼 날아가 제왕의 맞은편을 점하고 섰다.
그가 입을 열어 짐짓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마치 상대의 간청함에 적선을 베푸는 듯 말했다.
“그렇게도 나와 싸우고 싶더냐? 내가 한때는 너를 섬겼지만 그때도 너희 중 나를 이길 자가 없었거늘 지금에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도 결해보고 싶다 하니 응하긴 한다만 소멸은 한 번에 족하니 후회가 있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내 지금 너를 죽여 너희들 제왕들이 얼마나 허망한 꿈을 꾸었던가를 깨닫게 해주겠다.” “닥쳐라, 이놈. 한 번 맺은 충성의 맹세를 제 욕심으로 깨트린 놈이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도 떠드는구나.”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의 영계가 제왕의 다스림으로부터 놓였음도 크게 성격이 다르다 할 수 없다. 힘이 미치지 못해 권좌에서 밀려나는 건 당연한 이치. 네 힘은 생각지를 않고 남의 탓만 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로군.
자, 네 마음껏 힘과 용을 써봐라.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깨닫게 해주겠다.” 얼추 마르시온의 말이 합당한 듯싶기도 했지만 영계가 해방된 것과 쿠사누스의 반란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억압과 자발적인 충성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했고 그 방법의 정당성에서도 차이가 났다.
지켜보는 양측 진영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어쨌든 각 진영의 최강자들이 한판 벌이려고 나섰으니 구경으로는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게 또 있을까?
누가 이길지는 해봐야 아는 것이지만 근소한 차이이긴 하나 과거엔 분명 제왕들보다는 마르시온이 더 강했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게 있을까마는 승패가 실력의 우위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니 속단하기엔 이르다.
어쨌든 제왕들이 기대하는 건 일단은 달성된 셈이었다. 마르시온을 싸움에 끌어들였고 한 번 나섰으니 이어지는 도전자들을 다 물리치지 않고서는 체면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보면 누구 하나가 운 좋게 이길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무한계의 강자들과는 부딪쳐본 적이 없으니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할 수 있었다. 마르시온을 아무도 꺾지 못할 경우 적의 사기는 충천할 것이고 아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게 된다. 로메로는 괜한 짓을 벌인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의 싸움이 단지 승패를 가려보는 것이 아니라 적을 격살시키는데 목적이 있으니 자칫하면 전력의 손실만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로메로는 다음에 나설 자를 미리 준비해놓고 많이 기운다고 생각되면 바로 나서서 최악의 경우만은 면하게 할 계책을 세운다. 이런 걸 모르는 마르시온은 이참에 자신의 위용을 온 세상에 뽐낼뿐더러 전력의 핵심이 되는 자들을 미리 솎아내자고 작정했다.
뜸을 들이며 격돌을 지연시키는 걸 보면 마르시온도 제왕을 쉽게 보진 않는 것 같았다. 하룬측에서 다음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은 마르시온의 싸우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긴장한 기색들이 역력한데 자기네가 이겨주길 바라는 심정은 어쩌다보니 방외자로 밀려나버린 마계측도 동일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재공격을 결정하려던 참에 벌어진 요상한 상황이 마계 쪽은 영 마뜩치 않았다. 적의 술수에 말려들었다는 생각은 잠시 고조되는 긴장에 연심 마른침을 삼키기에 바쁘다.
헤르파와 논의를 이어 가고 있던 칠성의 수장 요광(搖光)도 헤르파의 지시를 건성으로 들으며 앞으로 벌어질 격돌에 관심을 보였다.
칠성은 요광 이외에도 천추(天樞), 천선(天璇), 천기(天璣), 천권(天權), 옥형(玉衡), 개양(開陽)이 있었는데 개양의 별칭이 대덕이었다.
대덕이 칠성의 하나 됨을 포기한 연후에 귀계 여섯은 요광을 수장으로 삼고 마계의 부름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들 간에는 원래 높고 낮음이 없었지만 때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역할에 따라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 대사가 없고 평온할 때는 주로 천추와 천선, 천기 등이 수장을 맡아 통치했고, 내부적으로 다스려야 할 분란이 생기거나 외부적인 큰 싸움이 있을 때엔 천권이나 옥형이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이번에 요광을 수장으로 삼은 것은 그가 비록 칠성 중 미욱한 편에 속했지만 마계가 자신들에게 해주길 바라는 일에 가장 적임자라 판단됐기 때문이었다.
그의 술법은 전쟁에 요긴하게 쓰일 것이고 이탈한 대덕이나 천상계의 제석이 훼방을 놓는다 해도 충분히 견뎌낼 재간이 있었다. 그리고 속이 깊진 않지만 말로서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간교함도 지니고 있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라넷이 툴툴거리는 걸 보고 속없는 웃음을 보이며 장단을 맞추는 것이 여간한 솜씨가 아니었다. 헤르파의 눈은 마르시온을 살피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어떻게 적진에 혼란을 주어 이득을 볼까에 머물러 있었다.
“대덕이나 제석이 나선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는 그 말이 사실이오?” “물론입니다. 제가 어지간해서는 이런 말씀 안 드립니다. 칠성이 모두 그러한 능력들이 탁월하지만 우리 중에서도 제가 유난히 술법에 능합니다. 그리고 대덕은 우리 중 예지력이 탁월하지 실상 전투엔 그다지 능한 이가 아닙니다.
물론 그가 내 수법을 꿰뚫고 있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귀계가 이번 싸움에 큰 공을 세워 장차 메타트론님이나 내 아버지 루시퍼에게 큰 상을 받기를 바라겠소.”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르시온과 제왕이 첫 부딪침을 시작했다.
그러자 양측 진영에서 거의 동시에 힘을 복돋우는 함성이 울렸다.
헤르파도 라넷도 하던 말을 중단하고 온 관심을 마르시온의 움직임에 집중시켰다.
쪼개면 이어붙이고 따라 붙으면 떨어졌다.
제왕은 호신의 법이 출중하고 마르시온은 파격적인 공격의 수단에서 탁월했다. 둘 다 오랜 시간을 겪어보았다지만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으니 서로의 수법에 능통하다 할 순 없었다.
제왕은 완전자가 되어 이 세계를 떠난 초대제왕들의 진전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제왕들이 만약 원령체를 이룰 수 있었다면 아무리 메타트론의 개입이 있었다 해도 마르시온의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왕들의 힘은 권좌의 위엄과 쿠사누스들의 자발적인 충정에 기반하고 있었지 실제로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 쿠사누스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오랜 기간 축적시켜 온 능력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제왕이 금 빛 찬란한 화신을 시도했고, 그의 손에는 칠채 영롱한 무지개 같은 검이 빛났다. 손에 쥔 검을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빛의 파편들이 공간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이에 질세라 마르시온도 위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불현듯 비늘 같은 것이 돋아나 검고 윤기 나는 갑주가 왰다. 두 손엔 각기 번개의 형상을 한 기이한 무기가 쥐어져 있었고 그것은 살아 있는 듯 끊임없이 꿈틀댔다. 제왕이 화려하고 찬란한 용은 살아 있는 듯 끊임없이 꿈틀댔다. 제왕이 화려하고 찬란한 용태라면 마르시온은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포효하는 악마의 화신과도 같았다.
둘의 검이 수없이 부딪쳤다 떨어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사방에선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몰아쳤고 고막을 터트려버릴 정도의 뇌성이 동반됐다.
부딪침이 거듭될수록 그들의 움직임은 신묘해졌다.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그들은 단 한 순간도 멈춰 있는 법이 없었고 한정된 공간 안을 쏘아진 빛처럼 활개치고 다녔다.
마르시온의 힘이 제왕을 능가하고 있다는 건 오래지 않아 드러난다. 마르시온의 검은빛이 제왕의 무지개 빛을 잠식해 가고 있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전방위가 마르시온에 의해 차단되고 점차 방어에만 치중하던 제왕이 내심으로 탄식했다.
‘내 손으로 원수를 갚을 수 없으니 이보다 더 비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현실은 냉엄했다. 의지만으로는 당장에 마르시온을 도륙 낼 수 있을 것 같았건만 정작 부딪쳐보니 그건 이루기 힘든 꿈과도 같이 멀게만 느껴졌다. 속도와 변화와 강함에서도 약간씩의 차이를 보인다.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버틴 것이 가상한 일이었다. 승리를 손에 쥔 듯 마르시온이 호기롭게 외쳤다.
“제왕 마르시온의 위대함을 겪어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을 것이다. 영광으로 알고.......” “졌다.” ‘졌다고?’ 예상치 못한 상대의 말에 마르시온은 황당한 표정을 했다 지금 자리가 어디 이기고 지고를 가리는 싸움이던가? 그리고 제왕의 자존심이 어떠한 것인데 이리 쉽게 패배를 자인한단 말인가!
하룬의 진영측에서 다른 제왕이 나와 마르시온을 맞는다.
“그가 패배를 시인했으니 이제 내가 상대하겠다.” 그제야 마르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겼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이것들이 지금!’ 도망가듯 물러서는 제왕을 따라붙으니 다른 제왕이 앞을 막는다. 그는 방금 전의 제왕과는 다른 수법으로 마르시온을 몰아붙였다.
그의 전신에서 붉고 푸른 기류가 실처럼 뿜어져 나와 마르시온의 움직임을 봉쇄해 왔다. 갑자기 달라진 수법에도 마르시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두 손을 교차하며 한 번 크게 휘두르니 날카로운 기류가 여지없이 잘라진다. 그는 그대로 제왕에게로 돌진해갔다.
스스스 사라진 제왕의 종적을 찾아 마르시온이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화를 냈다.
“이놈들이 지금 날 조롱하는 것인가? 싸움을 하다 물러서다니 너희는 수치도 모르느냐!” 잠시 살피던 마르시온은 결국 상대의 위치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두 개의 거대한 검을 거꾸로 세워 땅에 박아 넣으며 외쳤다.
“이런 얕은 수작으로 날 상대하려 하다니.” 콰콰쾅 땅이 쩌억 갈라지며 그 안에서 제왕이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제왕이 손바닥만한 타원형 원반을 쏘아냈다.
마르시온의 검이 원반을 쳐내며 제왕을 따라붙는다. 그런데 의외로 원반은 퉁겨졌을 뿐 깨지지 않았다. 퉁겨진 원반이 두개로 나뉘며 제왕을 노리는데 좀 전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또다시 쳐내자 둘은 넷으로 변했다. 넷에서 여덟로, 여덟에서.......
나중엔 저희들끼리 부딪히며 무서운 속도로 수를 늘렸다.
그러자 마르시온의 주변은 온통 원반으로 가득 차버렸다. 그리고 정작 원반을 마르시온에게 던졌던 제왕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건 마르시온이었다. 흔들린 이유는 원반의 위협이 아니라 사라진 제왕 때문이었다. 원반의 공격이 이어지고 그의 위치를 찾아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우와.” “이기겠다.” “마르시온을 죽여라.” 하운의 진영이 술렁거렸다. 분명 제왕이 승기를 잡은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으아.” 화가 머리꼭지까지 오른 마르시온의 고함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하운과 마계 진영 사이의 빈터를 한 번에 채울 정도의 강력한 빛의 폭발이 뒤따랐다.
“모두 피해라.” “뒤로 물러서.” 하운의 지휘관들이 다급하게 외쳤고 제왕들과 분트발 등이 앞으로 나서며 방어 막을 형성했다. 반대쪽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쿠자누스들이 재빠르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빛의 폭풍에 피해가 막심했을 터였다.
마르시온의 무지막지한 힘에도 원반은 여전했다. 아니, 되레 수십 배로 개수가 늘어나 있었고 줄기차게 마르시온을 괴롭혔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러다 이기는 게 아닐까? 하룬 진영이 이런 기대에 한껏 고조되어 있다면 마계는 불길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쿠자누스들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르시온에 대한 신뢰는 이런 정도로 금이 가지는 않았다. 잠시 그렇게 보인다 뿐이지 결국엔 이길 것이란 확신이 그들 얼굴엔 깊이 서려 있었다.
비밀 차원의 사람들이 아퀴나스를 향해 몰려가고 있는 바로 그 때에 파천과 선발대도 그런 변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파천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좀더 참아야 한다. 결정적으로 무르익었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날 용서하라. 그대들의 희생이 아니고서는 기회를 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파천은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라미레스는 파천의 신중함을 보고 자신들의 비밀차원에서 싸울 일이 없을 거란 걸 직감했다.
그럼에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뭔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는 그 현장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가쁠 정도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불고 있는 바람의 색깔은 아직 확연하지 않았다. 베일에 감춰진 채로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 표면 위로 떠오를 때 모두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저마다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더 이상은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누구든 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생명을 걸어야 하는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쿠사누스들의 기대처럼 마르시온의 의연함은 훼손되지 않는다. 눈을 현혹시키고 감각을 어지럽히는 원반의 움직임에서 관심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승부를 걸었다.
제왕도 승부를 결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마르시온이 위기를 탈출하고자 어떤 수단을 강구할지 알 수 없지만, 그래서 불안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강의 수를 준비하고 있으면 된다. 그래서 승부를 걸었다.
둘이 결정한 시기가 어찌 동시에 맞아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우연인지 아니면 상대의 결단을 읽었던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부딪친다. 거대한 힘이 서로를 용납할 수 없다고 울부짖으며 맹렬하게 부딪쳤다.
불칸의 입에서 최초의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라운 힘이다.” 우우웅 두 힘이 부딪치며 서로 섞여버렸다. 그리고 공간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모든 기류를 껴안고 하늘 높이 솟구쳤을 따름이었다. 뒤이어진 후폭풍이 주변을 강타했다.
“크어억.” 누군가의 고통에 찬 신음성이 아니었다면, 양 진영에서 필사적으로 방어막을 펼치지 않았다면 과연 조금 전 보았던 자면이 현실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아름답다. 모두는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속성은 파괴하는 힘이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끌어들이려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엄밀한 막을 치고 있었음에도 그 파장은 상상을 불허했다. 약한 자들은 견디지 못하고 고꾸라졌고 기류를 타고 하늘 높이 끌려 올라가는 자들도 속출했다.
휩쓸리면 끝장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잠시 후, 들끓던 대기가 잠잠해지고 소란스럽던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모두는 보았다. 무리하게 욕심을 부렸던 제왕이 마르시온의 공격에 치명적인 상태가 되어 차가운 대지의 품에 안겨 있는 장면을. 그는 아직 꿈틀거리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만 확보된다면 그는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왕이 소생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마르시온의 발 아래 제왕이 놓여 있다. 자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제왕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걸 본 마르시온이 경고했다.
“죽음의 시간을 앞당기고 싶은가?” 마르시온의 질문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과도 같았다. 제왕들은 이를 갈며 눈을 부릅떴지만 죽어가는 제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서...... 죽여라.” 쓰러져 있는 제왕이 간신히 뱉어낸 소리는 그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마르시온은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제왕의 권좌를 찬탈한 것도, 군림의 발자국을 떼기 시작한 것도 이런 순간에 갈망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지 아래 놓여 있는 다른 존재의 운명,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표현이자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죽음을 선언할 때의 쾌감을 기대하며 마르시온의 표정은 비할 수 없는 만족감에 들떠있기까지 했다.
마르시온이 제왕을 죽이는 순간, 접전은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참지 못한 제왕들이 튀어나오는 순간 대접전은 다시 점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시온은 좀체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발에 힘을 줘 자근자근 밟아 가는 그 순간에도 시선은 제왕들에게로 가 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그들의 눈. 마르시온은 웃었다. 웃으며 제왕을 조금씩 죽이고 있었다.
“놈을 죽이자.” 제왕들 중 하나가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던지 그렇게 말했다. 그들의 결의에 찬 모습은 헤르파의 입을 열리게 만들었다.
“준비하라.” 로메로도 대기하고 있는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열을 정비하라.” 일촉즉발의 순간 마르시온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이끈 변화가 나타났다.
카르마의 등장!
마령의 본주와 함께 사라졌던 카르마가 하필이면 이런 때 나타난 것이다. 그는 마르시온에게로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으며 그의 관심은 마르시온을 외면한 채 죽어가고 있는 제왕에게로 머물렀다.
너무도 엉뚱하게도 낯선 자가 아무런 경계함도 없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마르시온은 경고를 발했다.
“거기 멈춰.” 카르마는 명령조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처음과 똑같은 보폭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헤르파가 카르마를 알아보고 외쳤다.
“카르마, 대체 무슨 짓이오?” 어디 갔다 이제 나타나서는 한다는 짓이 마르시온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헤르파가 알고 있는 놈이란 건데....... 카르마라면...... 그렇군. 헤렘이 말했던 자로군.’ 그런 사실이 마르시온을 망설이게 할 수는 없었다. 경고를 무시한 상대에게 선사할 것 역시나 죽음뿐인 것이다.
예비 동작 없이 찌른 마르시온의 검이 카르마를 꿰뚫었다.
하지만 마르시온의 기대는 무참하게 빗나가고 만다. 발 아래서 꿈틀대던 제왕이 사라졌고 검에 관통돼 고통을 호소하고 있어야할 카르마란 놈도 없어졌다.
카르마는 제왕을 품에 안고 마르시온을 지나쳐 멀리까지 벗어나 있었다.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떤 방법으로 제왕을 발 아래서 빼갔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마르시온이 놀라긴 했나 보다. 멍청하게 굳은 얼굴로 카르마의 등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헤르파가 카르마에게 말했다.
“남의 싸움에 참견을 하다니 그를 당장 돌려주고 물러나시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 너는 내 명령에 따라야 하거늘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내 입장을 곤란하게 하느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카르마는 히죽 웃더니 옆구리에 낀 제왕을 한 손으로 들어올리며 히죽 웃었다.
“애송이, 내게 명령하지 마라.” “......!” ‘카르마가 항명을!’ 카르마는 제왕의 얼굴을 호기심이 깃든 시선으로 요리조리 뜯어본다.
“내 명령을 따르지 않을 거요?” 제왕에게 향했던 눈길을 헤르파에게 주며 말했다.
“떠들지 마라. 넌 내게 명령할 자격이 없다. 아니 이제 난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는다. 나는 내게 자유를 주었다. 그 무엇도 날 구속할 수 없다.” “배신...... 인가?” “배신이라...... 그렇다고 해두지. 이제부턴 내 하고 싶은 일만 할 것이다.” 헤르파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설득해보아도 소용없다. 헤르파는 혹시라도 마르시온이 카르마를 경시하고서 실수라도 할까 봐 미리 언질을 했다.
[그는 카르마. 내 아버지 루시퍼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강하오. 메타트론님의 명령만 따랐는데 방금 보았다시피 그가 그 굴레를 벗어났음을 선언했소. 그러니 함부로 그를 격동시키지 마시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을 뭉갠 놈을 어찌 처리할까 고심하고 있던 마르시온은 루시퍼와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강자라는 말에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동지도 아니지만 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자였으니 헤르파의 말처럼 굳이 적으로 돌려놓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지겹군. 재고 따지고 머리를 굴리는 것들을 보고 있자면 속이 거북해진단 말야. 다들 싸우려고 여기에 모인 게 아니었던가? 싸워라. 어느 쪽이 끝장이 나든 승부를 결해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곤 웃으며 제왕을 머리 높이 들어올렸다.
“싸워, 싸우란 말이다.” 화악 맹렬한 불길에 타들어 가던 제왕의 몸이 흐물흐물 녹아들었다. 카르마의 손등을 지나 팔목을 타고 상체를 흠뻑 적셔 갔다. 전신에서 불꽃이 나와 그 모든 걸 태울 때까지 카르마는 미친 듯 웃고 있었다.
제왕들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그 뒤를 하룬의 정예들이 따르고 마계와 제왕의 군대도 마주쳐 갔다. 두 번째의 대접전이 그렇게 막을 올리고 있었다.
뒤엉킨 무리들 가운데서 유독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카르마였다. 카르마에겐 적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그는 먹잇감으로 버글거리는 곳에 유일한 포식자처럼 굴었다. 마르시온처럼 승부욕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냥 헤집고 다니며 절단내는 걸 즐겼다.
카르마는 그 혼자였지만 뒤엉킨 무리는 훌륭한 방패막이였고 더할 수 없는 미로였다. 숨을 곳도 많고 피하기도 좋다. 그리고 버거운 순간이 없을까. 제왕들이 엉겨 붙고 쿠사누스들이 떼로 덤비면 잠시 상대해주다 다른 곳으로 몸을 빼낸다.
한동안 모습을 감췄다가 한참 격전이 치열해지면 또 나타나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에 의한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잡을 방법이 없다. 하룬도 그렇고 마계나 제왕의 군대도 그렇고 양쪽의 적을 상대하느라 지쳐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카르마가 양측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것도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절대 주력을 치지 않는다. 가지만 쳐나갈 뿐이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은 의외의 것이었다. 소강상태일 때 그의 개입이 있으면 싸움은 격렬해졌다. 절대로 어느 한쪽이 우세해지는 걸 원치 않는다. 빨리 결과가 나길 바라는 것 같았고 그렇게 유도해 가고 있는 행보였다.
하지만 그도 오래 가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멈추게 할 수 없을 것 같던 카르마의 행패가 한 존재의 등장으로 중심에 밀려날 처지에 놓인다. 그는 처음에 소리 없이 무리 중에 스며들었기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해도 묻힐 수 없는 특별한 존재였다.
제왕들이 파천에게 이런 말들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메타트론과 싸우다 실종되었다. 판드아의 적통을 이었던 제왕이었지. 그는 가장 강하고 지혜로웠다. 그의 실종으로부터 반란은 시작되었다.” “판드아의 실종된 제왕은 원령체의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가 그것마저 극복했더라면 메타트론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왕들과 쿠사누스들에게 외경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졌던 제왕들 중에 최강자, 판드아의 제왕.
초대 제왕의 진전을 유일하게 이은 원령체의 소유자, 판드아의 제왕.
메타트론과의 싸움 이후 실종되었다던 그가 무한계 하룬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나타난 것은 한 명의 강자가 충원된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달랐다.
그를 먼저 알아본 것은 제왕들이었으며, 그 다음은 마르시온과 그를 따르는 쿠사누스들이었다.
제왕들이 환호성을 터트린 것에 비해 마르시온과 쿠사누스들은 새파랗게 겁에 질려 있었다. 그들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너무도 대단한 것이어서 굳은 채 적의 공격에 전신을 노출시키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마르시온이 헤르파에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틀렸......다. 메타트론, 메타트론이 와야 한다.” 헤르파는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한 표정을 했다.
“어서, 어서 퇴각 명령을 내려. 어서 도망가야한다.” “대체 왜 그러는 거요?”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자며 투지를 불태웠던 게 불과 눈 한번 깜빡이기 전이었다. 그러니 헤르파가 되묻는 게 아니겠는가? 헤르파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마르시온은 죄 없는 헤르파에게 바락바락 악을 써댔다.
“판드아의 제왕이...... 실종됐다던 그가,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나타났으니 다 틀린 거야.”
판드아의 제왕은 그들 가운데 있었다.
산 자를 위한 죽음의 축제, 그 선택의 전장에 그가 서 있었다.
죽는 자도, 죽음을 내리는 자도 처음엔 그를 느끼지 못했다. 풍경 안에 있으면서 이질적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축제에서 제외된 유일한 관람자였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고 물결에 쓸리는 부유물이기를 거부하는 의지가 발현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풍경 중에 머물지 않는다. 구별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방관자로 남아 있길 원치 않았다.
개입하기로 작정한 제왕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인 존재는 카르마였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떨린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저자에게 관심을 가져선 안 된다. 주목하지 마라. 모른 척해야 해. 저자가 무엇을 결정하든 상관하지 말고...... 미련을 버리고 여길 떠나야 한다. 그래야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미리 겁먹고, 극복하려는 시도조차 않고 도망가는 짓은 이제 하지 않기로 했다.
카르마는 쉽지 않게 한 결심이었음을 상기해냈고 그러자 새로운 오기가 샘솟았다.
‘다시는 그 무엇에도 구속당하지 않는다. 피하지 않는다. 내 자유를 침해하면 그가 누구든...... 죽인다.’ 판드아의 제왕은 하룬에 모여 있는 존재들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전쟁을 주도하는 자들과 그 전쟁의 희생물이 되어 덧없이 쓰러져 가는 자들, 동참하지 않으나 지켜보는 자들.
그들 중 특별한 하나에 주목했다. 그것은 카르마가 아니다.
‘이것이었나, 내게 맡겨진 역할이? 수호자, 그대는 날 너무 과대평가 했소. 굴러 가기 시작한 운명을 멈추게 하기에 난 적당하지 않소. 이 전쟁엔 내가 동참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지만 저자는 내 몫이 아니오.’ 마령의 본주!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마령의 본주를 판드아의 제왕은 구별해내고 있었다.
마령의 본주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강력한 방해꾼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불청객은 자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부담스런 존재였다. 그가 나타나기 전엔 의도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카르마의 활약만으로도 충분해 보였었다. 좀더 기다렸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면 되겠다 생각하며 여유를 부렸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전장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 누구로부터도 위협받지 않던 카르마가 판드아의 제왕에게 다가갔다.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을 치우듯이 손을 뻗어 앞을 막고 있는 자들을 쓸어버린다.
카르마는 한껏 고조된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전신을 푸들푸들 떨었다. 제왕과의 간격을 좁히고자 했다면 굳이 이런 방법이 아니어도 많았다. 적에게 제 능력을 뽐내 위세를 부린 것이다. 자신이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카르마의 손길을 방해하는 힘이 발동되었다.
카르마가 입을 열었다.
“좋군. 이것이 바로 원령의 힘인가?” 파천에 의해 처음으로 선보여졌던 원령체의 능력이 카르마의 힘을 돌려세운 주범이었다.
주변에 있던 무리들이 카르마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안전지대로 절반쯤은 떠밀려 가고, 나머지는 자진해서 빠져나갔다.
빽빽하게 채워져 있던 공간이 바닥을 드러냈다. 치열했던 싸움도 갑자기 멈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거짓말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생겨난 돌발적인 현상이었다.
이제 관심은 카르마와 제왕 간의 싸움이 어찌 될 것인가에 모아졌다. 허나 제왕의 관심은 정작 다른 데로 향해 있었다. 카르마가 아닌, 마령의 본주! 그에 의해 저질러질 대학살을 어떤 방법으로 막을 것인가였다.
제 힘으로 가능 할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다. 원령체를 완성하지 못했으니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불안감은 예전 메타트론에 의해 확인된 바 있었다.
마령의 본주는 메타트론만큼이라 할 수는 없지만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되었다. 막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지 않는 한 제왕이 취할 조치는 그리 많지가 않다.
그가 지금 여기 온 건 순전히 그 일을 떠맡았기 때문이었다.
제왕을 이 자리에까지 오게 한 건 두 존재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수호자와 옛용.
수호자는 소멸 직전의 제왕을 살렸고, 옛용은 그를 안전하게 숨겨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대가를 너무도 당당하게 요구했다. 일곱별의 하나인 판드아의 제왕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용천을 떠나 여기까지 왔다.
현재 영계에 닥쳐 있는 위기에 대해 옛용에게서 상세하게 들은 바가 있지만 직접 보고 나니 자신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있음이 너무도 명백해 보였다. 비밀차원에서 불어올 후폭풍까지를 염두에 둔 진단이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뿐이었다.
판드아의 제왕은 카르마의 기색을 살피며 다른 제왕들에게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제왕들은 로메로와 상의했고 다른 수뇌들도 의견을 내며 동참했다.
옛용이나 수호자나 영계에 닥치는 혼란을 피할 최후의 보루로 메덴을 생각해두고 있었다. 로메로 또한 그런 지시를 옛용에게서 받은 적이 있었다. 메덴은 적을 막아내기 위한 최적의 요새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옛용이 지척에 있다. 제왕들과 로메로 등이 논의하는 내용도 바로 그것이었다.
마령의 본주와의 싸움은 결과를 예측하기 힘이 드니 전력을 끌고 메덴으로 가라는 것.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게 문제다. 갈 수만 보호막이 제거된 마당에 거부할 일이 아니다.
결국 로메로 등은 전력을 끌고 메덴으로 퇴각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판드아의 제왕은 나름대로의 복안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카르마를 물리치고 마령의 본주를 상대할 동안 연합군이 도주할 수 있으리란 계산이었다.
제왕들도 함께 퇴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배후에 약간 처져서 뒤쫓아 오는 적을 막으며 추격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맡기로 했다.
하지만 마령의 본주가 그렇게 순순하게 자신들을 보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계산은 처음부터 어긋나버리고 말았다. 판드아의 제왕이 카르마와 대결하자 마령의 본주가 헤르파와 마르시온을 충돌질해 다시 격돌을 부추겼다.
게다가 직접 나서서 하룬의 전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쪽은 판드아의 제왕이었다.
“모두 퇴각하라!” 로메로는 판드아의 제왕을 믿고 퇴각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대로 시간을 지체해봐야 피해만 더 늘어날 것이다. 판드아의 제왕은 카르마에게서 손을 빼 지체하지 않고 마령의 본주를 막아섰다.
“날 막아보시겠다?” 카르마를 선두로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연합군의 뒤를 쫓았다. 판드아의 제왕은 그 시도를 무산시키고자 했다.
“그냥은 안 되지.” 대군의 최선두에 있던 카르마가 주춤했다. 막대한 힘이 앞을 막아선 걸 느낄 수 있었다.
바닥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힘은 거대한 벽과도 같았는데 단순히 방어의 효과만 노린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성질 급한 쿠사누스들이 들어섰다가 폭풍에 휩쓸린 나뭇잎 마냥 휘말려 오르다 내동댕이쳐졌다. 제왕력이 제대로 발동된 것이다.
그 힘이 미치는 영역이 점차 확장돼 오자 동맹군은 뒤로 물러나기에 바빴다.
카르마는 정면돌파를 택했다. 마령의 본주도 제대로 공격을 시도했다. 수십 마리의 용을 한번에 풀어놓은 듯한 기류가 바닥에 붙어서 회오리를 치며 몰려들었다.
제왕은 원령을 극대화시켜 자신에게 미치지 않는 지점에서부터 힘을 충돌시켰다. 그러자 근처까지 다다를 땐 마령의 본주와 카르마의 공격력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제왕의 공격이 자신들에게 집중돼 오자 둘은 그것에만 신경을 썼다. 그것이 제왕에게는 반길 만한 기회였다. 제왕은 곧바로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 가며 둘의 혼을 빼놓는다.
공간과 일체를 이뤘기에 쉽게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신체를 공간 중에 흩어버린 채로 기회를 엿보며 공격하고 있으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어쨌든 셋의 격돌로 동맹군은 연합군을 쫓을 수 없게 되었다.
판드아의 제왕은 카르마에게 맡겨둔 채 케플러는 뒤로 물러나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 점이 제왕으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케플러는 연합군의 도주 방향을 보고 메덴이 목적지라는 걸 알았다.
‘내 능력을 과소평가 하다니, 제왕 넌 날 막을 수 없다.’ 사악한 웃음이 케플러의 입가에 맴돈다.
카르마는 힘에 부친다는 걸 솔직히 인정했다. 제왕의 공격을 피할 요량이면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그러고 있을 순 없었다. 몇 번의 정면 격돌로 그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제왕이 화신을 하자 전신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그 움직임을 따라 잡기가 여간 힘이 든 게 아니다. 게다가 툭하면 공간과 일체를 이뤄 회심의 일격을 무산시키는가 하면 빈틈을 뚫고 들어온 일격에 곤란을 겪이 일쑤였다.
약이 올랐다. 비등한 가운데 약간의 열세라면 모르겠지만 매번 손해를 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크억.” 가슴을 쥐어짜는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비 오듯 쏟아지는 타격에 비틀거리며 물러서다 발바닥을 관통하는 원령사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방팔방에서 몰려오는 원령의 연쇄폭발은 카르마의 최종위치를 마치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가 선 바로 그 자리에 정확하게 집중되고 있었다. 이 정도쯤 되고 보면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할 수 있는 수단은 모두 동원했지만 좀체 공격의 기회를 잡기조차 힘이 들었다.
동맹군은 아예 멀찍이 떨어져서 감히 접근할 엄두조차 못냈다. 제왕이 그들까지 상하게 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까진 하지 않는다.
마령의 본주가 공간 이동을 했다. 제왕은 아차 싶었다. 그도 곧 연합군의 위치를 파악해 이동했다.
케플러는 연합군의 앞에 버티고 섰다. 곧 뒤따라 온 제왕이 케플러를 막아섰다.
둘의 격돌에 연합군은 더 이상 진군을 할 수 없었다. 우회해볼까도 생각해봤으나 어디로도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이대로 멈춰 있으면 곧 동맹군과 카르마가 쫓아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뒤로 껴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메덴으로 공간이동을 해볼까도 생각했으나 그건 더 위험한 선택이었다. 대다수가 이동 후 무방비 상태로 적을 맞게 된다. 그러게 되면 메덴으로 가 방비해보겠다는 계획이 되려 모두를 죽음으로 모는 결과가 된다.
로메로도 대책이 없긴 마찬가지. 적을 맞을 채비를 갖추고 전열을 정비하는 게 최선이었다.
케플러는 제왕의 공격을 막는 틈틈이 연합군을 괴롭혔다. 얼마가지 않아 카르마까지 도착하고 곧바로 동맹군까지 가세하게 되자 연합군은 위기를 맞게 된다.
시험받는 자들, 헤르파와 마르시온
연합군에 닥친 위기는 해소하기 힘들 것 같았다. 최상의 원군이라 할 만한 판드아의 제왕이 가세했음에도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갔다.
케플러만 없었어도 상황은 정반대였을 터였다. 제왕은 케플러를 상대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수 없었고 자유롭게 된 카르마를 막을 자가 연합군측에는 없었다. 제석과 노군, 분트발이 동시에 상대를 했음에도 이기기는커녕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들을 대신해 제왕들 네 명이 동시에 덤벼들었지만 그도 충분치가 않았다. 죽어 가는 자들의 수는 연합군측이 월등하게 많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판드아의 제왕도 제 싸움이 급한데도 보다 못해 새로운 결단을 하기에 이른다. 케플러를 몰아붙여 연합군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한 후, 그는 연합군의 진영 위에 자리를 틀었다. 날뛰던 카르마를 먼저 외곽까지 퉁겨냈다.
그는 파천이 그랬던 것처럼 연합군 전부를 덮어씌울 만큼 큰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그걸 본 케플러가 조롱했다.
“기껏 생각해낸 것이 보호막인가?” 카르마가 보호막을 해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쉬잉 후우웅 효과는 있었다. 보호막이 깨지기는커녕 카르마의 힘을 그대로 안았다가 반탄해버렸다.
그제야 이채를 띠어가는 케플러. 공격을 해 보호막의 강도를 파악해본다. 헤르파가 멀리 물러나라고 고함을 질렀다.
헤르파의 예감대로 케플러의 첫 번째 공격은 그대로 반탄되어 동맹군의 진영을 휩쓸어버렸다.
보호막 안에 있던 자들은 왜 제왕이 진작 이 방법을 쓰지 않았는지 그 점이 오히려 의아할 정도였다. 파천이 쳐놓았던 보호막과는 달리 안에서 제왕이 공격해 오는 힘을 조절하면 적당히 쳐내고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동맹군 입장에서 보면 어이없는 사태였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승부의 윤곽이 확실해질 것 같건만 정작 눈앞에 두고서도 해볼 방법이 없다는 것이 속을 태웠다.
하지만 케플러는 아직도 여유 만만이었다. 그는 제왕이 펼친 보호막이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조금 전의 부딪침으로 갖게 된 자신감이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걸 시인하는군. 정말로 바닥을 보인거라면 넌 내게 졌다. 이제 슬슬 끝을 내야할 때가 온 것 같아.” 이제 불안해지는 건 연합군측. 만약 지금의 보호막도 무너진다면 케플러의 말처럼 다른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싸우다 비굴하지 않을 떳떳한 최후를 맞는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각오를 새롭게 했다. 케플러가 엉뚱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계와 제왕의 군대에게 관심을 돌린다.
“이제 너희들도 결정할 때가 왔다.” 무엇을 말인가? 판드아의 제왕이 나타나자 모든 건 끝났다며 좌절감을 표했던 마르시온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엉겁결에 이곳까지 따라온 건 마령의 본주 케플러가 기대 밖의 활약을 펼쳐줬기 때문이었다. 이길지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그런 희망이 자력으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망각하고 말았다. 케플러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건 마르시온만이 아니었다. 헤르파 역시도 케플러의 태도에서 미묘한 여운을 읽었던 것이다.
“이제 태도를 확실히 할 때다. 나냐, 메타트론이냐? 누구를 섬길 것인가?” 마르시온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헤르파는 긴장했다. 케플러는 자신들로서 상대할 수 없는 강자임이 확인되었다. 더군다나 카르마가 케플러 곁에 가서 호위하듯 서는 걸 보고는 둘이 뜻을 함께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웃음으로 무마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 선택하라. 날 섬기겠다면 함께 할 것이지만 메타트론을 선택한다면 내 손으로 먼저 죽인다.” 기가 막힌 때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상황에, 적절하게 던져진 강요된 선택이었다.
메타트론은 확인되지 않은 먼 곳에 있다. 하지만 마령의 본주는 바로 눈앞에서 주먹을 들이대고 당장 결정을 내리라고 한다. 동맹군측에 동요가 일었다.
쿠사누스들은 마르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 메타트론이나 케플러나 거기서 거기다. 다 똑같은 놈들이다. 상황을 봐서 기회가 된다면 모든 걸 가지려고 시도는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으로도 메타트론이나 케플러는 상대할 만한 자들이 아니다.
판드아의 제왕이 다시 나타난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있었던 마르시온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죽이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일단은 살고 볼 일이었다.
문제는 헤르파였다.
마르시온이 먼저 대답했다.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겠소.” 쿠사누스들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들이다 뭐 어쨌든 당장 죽지 않아도 되니 좋은 일이라고 반기는 듯했다.
“너는?” 케플러의 질문이 헤르파에게 던져졌다. 헤르파는 웃었다.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우하하하하하.......” 라아그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라넷과 헤렘은 웃지 않는다. 그녀들은 웃을 수가 없었다. 케플러의 눈빛이 싸늘해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정말로 거역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 틀림없다.
“머가 그리 우습지?” 웃음을 멈춘 헤르파가 더 이상 진지할 수 없는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네 하는 짓을 보고 웃지 않을 재간이 없다. 너도 생각해보면 알 거야. 내가 왜 웃는지를 말야.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모르겠는걸.” “네가 진정 강자라면...... 모든 걸 초월한 절대강자라면, 지금 이런 순간에 그런 우스꽝스런 강요는 하지 않을 거야. 네 서두름은 이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음을 스스로 밝힌 것이나 다름없어. 이길 자신이 없는 거지. 잠시 우쭐대긴 하겠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손에 넣지도 못한 채 비참하게 죽어갈 자를 섬기고 따르란 말인가?
난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 아무것도 보장해줄 수 없는 네게 내 전부를 걸 수는 없어 모든 걸 가진 뒤에...... 그때 가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한 번 쯤은 진지하게 고민해줄 수 있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결국 날 인정하진 못하겠다?” “당연한 것 아닌가? 주인이 출타한 틈을 타서 그 집 종들에게 주인이 바뀌었다고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마계는 힘 있는 자의 것이다. 너라고 해서 갖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아직은 아냐. 지금 가지려 한다면 우리 중 단 하나도 거두지 못한다. 시체만을 가지게 되겠지. 그것을 원하나?“ 보호막 안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합군은 헤르파의 굽힘 없는 기개에 감탄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잽싸게 고개를 숙인 마르시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설란은 헤르파와 헤렘에게 고정된 시선을 뗄 줄 모른다.
이제 선택은 헤르파에게서 케플러에게로 넘겨졌다. 만약 케플러가 헤르파의 제안에 동의한다면 마르시온만 꼴이 우습게 된다.
“네 말은...... 결정을 유보해 달라는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흐음.” 마르시온이 끼어들었다.
“수용한다면 형평성에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네 말이 맞다. 영광을 함께 하려면 모든 것이 결정 나기 전에 해야 한다.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혜택만 누리겠다는 심보는 받아들일 수 없지.” “그럼 더 이상 할 애기가 없겠군.” “자발적인 복종이 아니면 죽음뿐이다. 난 지금 거래를 제안하는 게 아니다. 살고 싶으면 내 앞에 머리를 조아려라. 그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길은 없다.” 케플러는 궁금해졌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너희들의 사령관인 헤르파는 내 지배를 거부했다. 너희들도 같은 뜻인가? 메타트론을 위해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만큼 그에 대한 충정이 갸륵한가?
그는 너희들을 버렸다. 당장 죽음의 손길이 닥쳤음에도 그는 너희들을 지켜줄 수 없다. 그런데도 그를 위해 충성하겠는가? 아직은 기회가 있다. 내게 충성할 자 없는가?” 카르마가 마계 전사들을 한쪽으로 구분해냈다. 그 하나의 움직임이 가져온 효과는 컸다. 일부 갈등하고 있던 아수라, 나찰들이 마계전사들을 따라 함께 이동했고, 헤르파의 뒤에 굳건히 버티고 있던 자들도 내심 갈등을 겪고 있었다.
“기회는 이번뿐이다. 어리석긴 하나 끝까지 의리를 지켜 마계의 일원으로 죽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라. 그것도 멋진 일이지. 하지만 살고자 하면 날 따라야 한다. 선택하라.” 마지막 선택의 기회는 던져졌다. 반수정도가 케플러를 따르겠다며 헤르파를 저버렸다.
헤르파가 외쳤다.
“난 너희들의 생존을 약속해줄 수 없다. 나와 끝까지 뜻을 함께 하겠다면 죽음 이외에 줄 것이 없다. 배신한다 해서 너희들을 원망하지도 비웃지도 않겠다. 결정을 내려라 나화 함께 죽음까지 함께 할 자들만 남아라.” 헤르파는 갈등하고 있는 자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내심으로는 차라리 마령의 본주에게로 들러붙어, 라고 바라기까지 했다.
‘이대로 죽기보다는 끝까지 살아남는 길을 택해라. 그래서 너희 눈으로 이 혼란의 결말을 지켜보라. 마계의 일원임이 자랑스럽지 않다면 그로 목숨을 잃는 다는 것이 무슨 보람이 되겠는가. 가라, 가거라. 날 떠나 마령의 본주를 택하라.’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는 남은 인원을 대충 헤아려보았다. 셋 중 둘이 떠났다. 그런데도 의외로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루시퍼와 대마신들이 없는 마계란 이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결집시킬 구심점이 사라졌으니 그들을 묶어둘 장치도 더불어 해제된 것이다. 메타트론이 마계를 헤르파에게 맡긴 순간부터 이런 일은 예견된 일인지도 몰랐다. 헤르파의 지도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에겐 메타트론이나 루시퍼와 같은 지배적인 장악력이 없었다.
케플러는 망설이지 않았다.
“모두 죽여라.” 잔인한 명령이었다. 자신이 나서서 해결하지 않고 방금 거둬들인 수하들의 손을 빌리고 있었다.
카르마가 마계 전사들을 이끌고 공격의 선봉에 섰고 마르시온이 그에 질세라 곧바로 가세했다.
남은 마계군은 좀 전까지 동료였던 자들에게 지리멸렬해 갔다. 헤르파와 라아그, 헤렘과 라넷이 진두지휘하는 마계군은 얼마 가지 않아 천여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시체로 산을 쌓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른다. 비명과 함성은 점차 잦아들어 갔다. 헤르파도 부상을 면치 못했다. 대마신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카르마를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
그때 돌연 헤렘이 케플러를 노리고 적진의 방어선을 뚫었다. 두 눈만을 제외하고 전신을 피 칠을 한 채 달려드는 헤렘을 케플러가 반겼다.
“날 죽이고 싶으냐?” “약속을 지켜. 나와 했던 약속을 지키란 말야.” 살기등등한 헤렘의 공격은 케플러의 근처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소멸됐다. 케플러가 웃었다.
“아...... 그 약속? 맞아 그랬었지. 그러고 보니 너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구나. 그 약속은 아직 유효해. 지금이라도 원한다면 이행할 수 있지.” 헤렘의 공격이 멈췄다. 케플러가 전군에 명령을 하달했다.
“공격을 중단하라.” 마르시온의 군대와 마계군의 공격이 멈췄다. 그들에게 포위된 생존자들 중 멀쩡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곧 죽을 것 같은 치명적인 상태인 자들은 공격이 중단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버렸다.
카르마가 케플러에게 물었다.
“왜 멈추게 하는 거지? 이놈들을 살려둘 생각은 아니겠지?” “기다려 봐라, 카르마. 네가 무얼 원하는지 안다. 내 뜻도 같다. 그 전에 한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다.” “처리할 일?” “헤르파와 라아그를 이리 데려 오라.” 카르마가 케플러가 지목한 둘을 바라보았다. 헤르파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날 죽이기 전엔 어림도 없다. 어서 끝을 보자.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헤르파는 지쳐 있었다. 쉬고 싶었다. 죽음이 안식을 줄 수 있다면 그곳으로 어서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카르마가 입을 열었다.
“서두를 것 없어. 너희들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자, 가자. 케플러가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케플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둘러싸고 있던 마계 전사들이 길을 터주었다. 헤르파와 라아그가 그 길을 따라 걸었다.
그들이 빈터로 들어서자 뒤쪽의 무리는 다시 합쳐졌다. 케플러의 근처까지 다다른 순간 마계전사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헤르파가 뒤돌아서며 외쳤다.
“무슨 짓이야!” 적들에게 둘러싸여 무참하게 죽어가는 자들이 보였다. 헤르파가 그곳으로 날아가려 할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케플러가 앞을 막아섰다.
“끝났어. 더 이상 미련을 떨지 마라.” 헤르파도 알고 있었다.
‘그래...... 끝났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만 거야.’ “헤렘, 이리 와라.” 케플러가 헤렘을 불렀다. 옆에 선 헤렘은 보지도 않은 채 케플러는 헤르파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자, 약속을 이행하겠다. 난 분명 헤르파를 한 번 위기에서 구해주겠다고 했었다. 맞나?” “......!” “내가 막지 않았다면 그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을 거야. 그러니 난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렇지?” “......” “이제 우리 사이의 채무는 없다.” 헤렘은 그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저항. 마계군 중 이제 살아남은 자는 단 하나, 라넷뿐이었다.
그녀는 마계전사들의 파상적인 공격을 겨우 감당해내며 힘겨워하고 있었다.
헤렘은 라넷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라넷의 앞을 한 명이 막아섰다. 카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