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무림인들의 최후, 그 장렬한 전사 (98/111)

 3. 무림인들의 최후, 그 장렬한 전사

 개처럼 끌려 다니던 우리는 어느 날 한 곳을 들어서며 묘한 긴장감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곤 서로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석조 건축물은 지붕이 개방되어 있었다. 저 위로 하늘에 떠있는 궁전과 그 주위를 맴도는 쿤다리들의 위용도 더불어 보였다. 우리가 들어서자 그 안은 끓어오를 듯한 흥분으로 가득 채워졌고, 폭발적인 외침소리가 한데 뭉쳐 귓가를 울렸다.

 “마황 영세.” “전차원을 다스리소서.” “마계는 영원하라.” 대충 이런 소리들이었다.

 둥근 원형의 계단식 건축물이었는데 각 계단에는 마인들이 빼곡히 앉아 있다 한꺼번에 일어서며 장관을 연출했다. 아무리 못 잡아 줘도 5만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대 인원이었다.

 루시퍼는 대마신들과 아수라들을 뒤에 대동하고 들어서며 한 팔을 들어 무리들의 환호에 답례하고는 얼굴 가득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었다. 그의 다른 한 손은 천마와 내 목에 매어진 사슬의 끝을 움켜쥐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가 준비된 좌석에 앉자 그 옆으로 대마신들이 차례대로 착석했다. 그러자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함성소리가 순간 거짓말처럼 멈추고 장내는 일시 조용해졌다.

 “시작하라.” 한 아수라가 루시퍼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외치자 5만의 마인들은 또다시 함성을 질러댔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나는 얼른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런 의문을 해소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가 먼저 입을 열어 설명했다.

 “이곳은 원래 마신들의 공식적인 대결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서로 대결을 통해 실력을 향상시키고자 마련된 결투장인 셈이지. 지금은 물론 그 용도가 변경되었지만 말이야. 재미있는 구경거리일 테니 기대해도 좋다.” 루시퍼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걸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 왜 우리를 데려 왔는지는 곧 드러났다. 결투장. 그의 설명대로 이곳은 결투장이었다.

 마신들이 아닌 노예로 분류된 자들을 처형시킬 장소로 화한 곳에 우리들은 지금 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마수들이나 마신들이었으니 대결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일방적인 도살을 위한 장소인 셈이었다. 그걸 기대하며 마인들이 저렇게 흥분에 찬 소리를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짓을 하다니.

 내게 힘이 있다면...... 적들을 단죄할 힘만 있다면....... 간절한 염원은 더욱 강하게 날 휘몰아 갔다.

 “준비된 것을 시작해라.” 루시퍼의 명에 아수라 하나가 결투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는 대기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본 결투를 시작하라.” 마신들이 사슬에 엮인 노예들을 몰고 나왔다. 그들은 사육되는 가축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조금만 대열이 흐트러져도 채찍이 휘둘러졌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결투장으로 몰려나온 자들은 충실한 내 수하들 중 일부였다.

 천마교도와 무림맹 소속의 무사들이 백여 명이나 뒤엉켜 있었는데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직도 치워지지 않은 결투의 흔적들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난 이빨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루시퍼를 돌아보았다.

 그는 즐거운 듯 유쾌한 웃음을 흘려낸다. 웃음은 차디찼다. 영혼이 깃들지 않은 공허함과 더불어 날 덮어 짓누르는 사악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 아래 그들이 날 보고 있었다. 저들의 눈이 내게 뭐라 말하는지 헤아리기 겁이 난다. 그 눈들을 바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난 힘없는 연약한 자에 다름 아니니 제발 나를 향해 눈길을 보내지 말아 다오. 내 눈에 생애 가장 순수한 눈물이 맺혔다.

 “시작하라.” 아수라의 발악적인 외침에 따라 수하들이 절반으로 분류되었으며, 그 중에 이부만 마신들을 앞에 두고 서게 했다. 나머지는 결투장의 외곽 지역에 굴비를 꿰어 놓듯 사슬로 엮어 두었다.

 “어떠냐, 깨끗하게 죽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니 이보다 더 큰 자비가 어디 있겠는가. 저들은 거부한 그 상태로 죽어갈 것이며 싸움에서 진 자들은 마수들의 먹이가 된다. 그 영혼이 마수들에게 종속되는 아니든 그것까지 내 알 바 아니다.” 어느새 첫 번째 대결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대전자들 중에 유독 한 사람이 내 시야에 그득 차올랐다. 그는 의노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노인네가 날 향해 빙긋 웃고 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내게 마지막 예를 올리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나는 다른 소음들과 확연히 구분하여 들을 수 있었다.

 “지존을 끝까지 모시지 못한 불충...... 용서하여 주십시오. 내세에서 만나 못 다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만...... 수...... 무...... 강 하십시오.” “의노.......” 난 목이 메었다.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미 싸움은, 결투는 시작되고 있었음에도 의노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놈아, 일어나. 일어나 싸우란 말야.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으란 말이다.” 환노가 결투장 외곽 지역에 묶여 있는 채로 고래고래 지른 소리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찰 하나가 환노의 얼굴에다 발길질을 했다. 그가 푹 고꾸라지는 걸 보며 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일어섰다. 그렇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고야 말았다. 루시퍼가 잡고 있던 사슬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무리 중에 섞여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익숙하고 친근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결투가 시작되자 차마 볼 수 없었던지 고개를 돌리는가하면 친인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 두려 더 악착같이 눈을 부릅뜨기도 했다.

 그들이 무공의 고수들임에도 불구하고 나찰들에게는 장난감,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너무도 확연한 실력차에 그들은 한껏 조롱당하다 최후를 맞는다. 피가 흘러 나와 결투장의 바닥을 적시는 가운데 거친 숨결이 간간히 새어 나왔다.

 목이 잘리고 허리가 비틀리고 심장이 적출당해 죽어 갔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늑한 죽음의 순간마저 향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육식마수들이 전투력을 상실한 수하들을 하나씩 분해하고 있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아내며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헤르곤을 보고 있자니 내 속에서 불덩이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이놈은 왜 이러고 있지? 덤비지도 않는군.” 쇄액 마신의 발끝이 엎드리고 있던 의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퍼억 그는 그 상태로 벌렁 뒤집어지며 공중에서 몇 바퀴 맴을 돌다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그가 땅에 닿기도 전에 발길질은 또다시 이어졌다.

 퍼억 퍼억 퍼억 단숨에 죽일 수 있음에도 그놈은 그러지 않았다. 뼈를 부수고 살이 터지는 걸 즐기며 이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의노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전신 어느 한 곳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그는 망가져 갔고, 터지고 갈라진 틈으로 피는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놈 약골이군.” 그놈은 곧 아직 살아 있는 다른 목표물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라그란다 한 마리가 달려든다.

 놈은 두 손으로 의노의 부서진 뼈를 잡고 양쪽으로 쭉 찢어 비가 더 많이 흘러 나오게 하고선 머리를 처박고 마셔댔다.

 머리털 없는 놈의 머리통이 금세 벌겋게 변할 정도로 그놈은 걸신들린 듯이 그 짓을 계속 했다. 의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끈질긴 생명력이 난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제발 그만 죽어라, 의노.

 “으아아아.” 환노의 고함소리가 원형 결투장 전체를 울렸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분노는 우리 모두가 동일했다. 광마존도, 율극도, 신수궁주도, 개왕도, 제갈초홍과 소군도....... 그들 모두는 눈물을 흘리며 전신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에겐 안타깝게도 비참한 현실을 뒤바꿀 만한 힘이 없었다.

 “실성한 놈 같으니라구.” 우두둑 사슬에 묶인 환노의 목이 나찰의 손아귀에서 부서지는 소리였다. 환노는 발버둥치다 끝내는 혀를 길게 빼물고 축 늘어졌다. 그놈은 환노를 사슬에서 분리해 결투장 가운데로 휙 던졌다. 헤르곤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몸 이곳 저곳을 찢어 먹는 게 보였다. 나는 재차 벌떡 일어났다.

 “당...... 장...... 중지하라.” 난 루시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턱을 괸 한 손을 들어 귀찮다는 듯 슬쩍 흔들었다.

 내 몸이 어떤 힘인가에 결박당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전신에 기력을 모아 저항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힘이 모아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힘이 모아졌다 해도 이겨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숨이 컥컥 막히고 전신이 져렸다.

 “이익.......” “노예 주제에! 죽여 달라 하지 않았더냐. 내 자비를 헛된 것으로 돌리지 마라. 너희들은 이 순간을 거룩한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날 거부했을 때는 이보다 더한 것도 각오했을 텐데. 이정도도 받아들일 수 없다니...... 역시 인간들이란 족속은.......” 그러며 혀를 끌끌 차는 것이었다.

 “빨리 끝냈으면 좋겠군. 너무 지루해.” 천마의 말이었다.

 “역시 그렇지? 그만.” 루시퍼의 말에 결투장에서의 움직임이 결빙되듯 멈춰졌다.

 “발리.” “네.” “네가 한꺼번에 처리하라. 지겨워서 따분하군.” “알겠습니다.” 사악한 대마신 발리가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발을 떼었고, 그 순간 그의 몸이 변화를 시작했다. 허공 중에 선 그는 두 팔을 있는 대로 벌리고 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발과 머리에서 동시에 검은 기류가 풀어져 나오며 회오리를 치기 시작했다. 기류는 금방 그의 전신을 가렸다. 그는 그 상태로 결투장의 상공으로 이동해 갔다.

 나는 여전히 허공 중에 더 있었으므로 그가 내 옆을 지나가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화아악 바람이 휘몰아쳤는지 검은 기류는 사방을 향해 빠르게 흩어지며, 그의 모습이 모든 이들에게 공개되었다. 검은 머릿결은 풀어져 발목아래에서 찰랑 거린다. 전신에는 전에 없던 갑옷이 생겨났는데 검은 가운데 푸른 기운이 돌았다.

 바닥으로 내려서자 마신들과 마수들이 하던 동작을 중지하고 한 곳으로 몰려간다. 결투장에는 그와 죽은 시체들과 사슬에 묶인 수라들이 전부였다. 장내는 지나칠 정도의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발리는 대마신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성품이지. 그는 쉽게 죽음을 내리지 않고 고통을 주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지. 지켜 볼 만할 거야. 바알세불, 너와 가장 많이 부딪쳤던 대마신이니 잘 알고 있겠지?” “구역질 나는 놈.” “파천, 너도 내려와서 천천히 감상해라.” 루시퍼의 손짓에 나는 원래 있던 자리로 힘없이 끌려 들어갔다. 놈이 힘을 쓰는 형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의지만으로 모든 걸 다스리는 걸까?

 “저항을 하라. 날 이길 힘이 있다면 짓밟고 생을 이어가라. 마지막 삶의 기억이 더욱 선명할 수 있도록 선물을 주마. 할 수 있다면 견디어 보라.” 두 발을 벌리고 선 발리는 한 팔을 앞으로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자 한쪽에 몰려 있던 사람들을 결박하고 있던 사슬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신체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던 사슬들이 사라지자 그들은 비장한 모습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광마존 등의 비교적 고수자들이 앞으로 나서며 발리의 주위를 포위했고, 나머지는 그 뒤를 겹겹이 둘러쌌다. 그들 모두의 얼굴엔 마지막까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자 하는 열의가 가득했으며, 마계에 대한 구체적인 분노와 적개심으로 충만했다.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만으로 살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꿈틀댄다고 해서 살아 있다고 하겠는가. 분노에 몸을 떨며 맹세가 거룩하다 말한다 해도 그 잊지 못할 원한을 잊고 산다면 죽었다 하리라.

 “오늘의 원한을 잊지 않으리라. 영혼에 새겨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게 하겠노라. 원하노니 우리의 염원대로 다시 한 번 기회를 허락하라, 하늘이여. 모두는 내 말을 들어라. 죽음이 우리를 가르지 못한다. 맹세는 영원하니 영혼이 있는 한 마계와 공존하지 않으리라.” 나는 큰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게 기폭제가 되었는지 결투장에 있던 모든 수하들이 저마다 맹세의 말들을 쏟아냈고 천마도 마찬가지였다.

 “영원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에 고하여 봉하나니, 영혼이 소멸토록 맹세를 지키게 하옵소서.” 루시퍼는 우리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난 결투장을 내려다보며 일어서 있었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루시퍼는 단지 이 말만을 되뇌었을 따름이다. 그런 연후 발리를 향해 약간 고조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어서 시행하라.” 발리는 오만한 태도로 주변을 죽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가소로운 인간들. 너희가 일백 번을 고쳐 죽어도 나 하나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죽어!” 광마존과 신수궁주의 손에서 무형검이 화려하게 피어난 것이 신호였다. 모두는 하나가 되어 일제히 발리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발리는 팔짱를 낀 채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스팟 발리의 몸이 허공으로 도약했다. 눈으로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는데 난 반사적으로 하늘로 시선을 향했다. 그렇지만 그의 몸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쉬쉬쉬쉭 아니었다. 하늘이 아닌 격투장에 그가 있었다. 그는 격투장에 있는 사람들 틈새를 헤집고 다니는 듯했지만 정확하게 그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놈이 하늘로 솟구치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 빨리 움직였기에 다시 내려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수하들은 당황하고 있다. 두 눈을 벌겋게 뜨고 있음에도 적의 종적을 찾아내지 못하니 답답한 노릇이겠지. 그렇다고 무턱대로 손을 쓰다간 서로를 해칠 염려도 있다.

 “헉.” “아악.” 여기저기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누구 하나 예외가 없이 모두의 손이 귀 쪽으로 가 있었다.

 “하하하하. 약해, 너무 약해.” 발리의 음성이었다. 그는 원래 있던 자리에 서서 두 손을 펼쳤다.

 후두두둑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건 귀였다. 사람의 귀. 그가 잠깐 움직이는 동안 50여 명에 이르는 무사들의 한쪽 귀를 모조리 훔쳐 낸 것이다.

 “어둠의 힘은 강하고 깊으며 또한 오묘하다. 너희들의 지혜로 헤아리기엔 벅찰 것이다.” 이때 광마존이 외치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이길 수 없다 해도지지 말라.” 뒤에 있는 자들은 허공으로 도약해 앞으로 나아갔고, 앞에 있는 자들은 적에게로 전진했다. 모두는 마지막 공격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지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발리는 한 손을 펼쳐 중지와 엄지를 모았다 퉁기는 장난 비슷한 행동만을 취했다.

 그러나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주위에 거대한 장벽이 펼쳐지는 듯한 환상이 펼쳐졌다. 병풍을 두른 듯 그의 발밑에서 솟구치는 바람의 벽은 거세게 타오르며 점차 새파랗게 변해 갔다. 모두의 공격이 퍼부어졌음에도 그는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었다.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만 년을 버텨온 산악처럼 요통치지 않았다.

 “고통이 오고감이 번개가 치는 듯하리라.” 번쩍 장벽이 확 퍼져 나갔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한 발광이었다. 빛의 여력에 포함된 수하들 중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끄악.” 첫 비명은 오히려 제일 끝에서 터져 나왔다. 이내 그들 모두가 한꺼번에 불타 올랐다. 전신에 시퍼런 불꽃이 오고갔다. 그럼에도 그들의 몸은 실제로는 타지 않는 듯 고통 중에 있기만 할 뿐 재로 스러지지는 않았다.

 “왜?” 내 의문에 천마가 대답해 주었다.

 “저 화염은 마력의 결정체. 그래서 고통은 주지만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이미 갇힌 이상 빠져 나올 방법도 없다. 극심한 고통에 저들의 의지는 반쯤 허물어졌을 거다. 아예 작정한 듯하니 저들에겐 불행이다.” 그런가. 저 몸부림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촤르륵 목에 감긴 사슬을 난 손으로 움켜쥐고 확 채어보았다. 루시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수하들에게로 뛰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런 몸짓은 헛것에 불과했다. 루시퍼의 이어진 말은 날 더욱 분노하게 했다.

 “가만있어라. 지켜보라, 네 수하들의 마지막을. 고통 중에 몸부림치는 걸 네 두 눈에 분명히 각인시켜 두어라. 연약한 인간들의 의지가 부서져 가는 걸 목격하고 영원토록 잊지 마라.” “이 악마들. 죽여라, 죽이란 말이다. 어서 죽여.” 난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루시퍼를 향해 무작정 뛰어들었다.

 “컥컥.” 몸은 또다시 내 의지의 영역을 벗어났다. 사지가 비틀리고 코와 입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 나왔다. 루시퍼는 날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발버둥치지 마라. 그럴수록 더 추해진다. 바알세불을 보라. 그는 요동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걸 감내하고 있다. 수치와 모멸을 이기고 있다. 아직 넌...... 모든 면에서 그보다 어리고 약하다.” 난 다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발리의 양손바닥에서 희끄무레한 것들이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실 같기도 했고 그냥 단순한 기류 같기도 했으며, 어찌 보면 살아 있는 뱀들이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수십 수백 줄기나 되는 것들이 모두의 전신을 아무런 저항 없이 파고 든다.

 “죽음을 소망해라. 너희들 중 세 번째까지 견디는 자가 있다면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하겠다.” “으아아악.” 모두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그들 중 고통에 대한 인내심이 비교적 탁원한 광마존이나 율극조차 입을 한껏 벌리고 있었다. 내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진작 내가 저들을 죽여 주었다면 이런 고통은 당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난 후회되었다. 소군의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게 보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입을 한껏 벌리고 비명을 지른다. 죽여 달라고, 너무 고통스럽다며 간혹 날 부르기도 했다.

 “제발...... 제발 저들을 그냥 죽여 다오. 부탁이다, 제발.” 루시퍼 앞에 난 무릎 꿇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처음과 다름없이 차갑기만 했다.

 “파천, 소용없는 짓이다. 조금만 견뎌라. 조금만 더.” 천마의 무릎은 피에 젖어 있었다.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면서 흘린 피였다. 난 허탈한 심경으로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이미 절반 이상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거품을 물고 피를 흘리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난 그들을 향해 고함쳤다.

 “서로를 죽여 고통을 없애 줘.” 내가 지른 고함소리를 그들은 전혀 듣지 못한 듯 움직임들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광마존만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옆에 있는 율극에게 부들거리는 손을 뻗쳐 갔다. 그때였다.

 “어허, 안되지.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슈슈슈슈 발리와 무두의 몸을 연결하고 있는 기류에 다른 성질이 더해지고 있었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새파란 기운이었다.

 “크헉.” 광마존은 더 이상 팔을 전진시키지 못했다. 그 자리에 멈추더니 곧장 바닥 쪽으로 힘없이 내려놓았다. 자의를 박탈당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 고통은 그를 더욱 절망으로 몰아 넣으리라. 그리하여 언제 적부터 열망했던 죽음이 바로 건너편에 있음에 다소 위란하고 있을는지도.

 내 가슴은 뜨거웠으며 혈맥은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잠들고 싶다. 이 지겨운 현실에서 잠시라도 놓여 잠들고 싶다.

 그 바람이 크다면 저들이 당하는 고통만이라도 내게 생생히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다소 위안할 수 있게. 죽음마저 강제당한 공간에, 적들만이 위대한 이곳에 우리는 한 마리 벌레라도 좋으니 그냥 죽음을 다오. 약한 자로 죽어도 좋으니 그냥 죽게 해다오.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니 그냥 죽을 수만 있게 해다오.

 “어떤가, 죽고 싶나? 달콤한 죽음을 맛보길 원한다면 절하라. 그리고 마계를 찬양하라. 그 순간 죽음은 숨은 듯 있다 급작스럽게 방문 할 테니.”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저들은 지금 고통 때문에 그의 말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수위가 높아 정신마저 오락가락하게 하고선.” 대마신 중 하나가 그렇게 말했는데 누구의 말인지 난 확인하지 않았다. 뒤이어 다른 말들도 들려 왔다.

 “마지막이야 뻔하겠군.” “아무도 견디지 못한다는 게 드러났는데 뭘 어쩌겠단 말인지, 원.” “지겨워.” 대마신들이 하는 소리를 루시퍼도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중지하게 하지도 대마신들의 불만에 동조하지도 않았다. 그냥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 마지막 세 번째다. 너희의 영혼마저 소스라쳐 놀랄 것이다. 행운이 따른다면 그냥 죽을 수도 있겠지.” 그는 그 상태로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기류에 매달린 수하들이 허공 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들이 머문 공간에 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은 그들의 몸을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했다. 그런가 하면 공간 자체가 일그러져 보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그들의 전신이 마구 접히거나 늘어지는 것이었다.

 뼈가 부서지지도 않으며 피가 흐리지도 않았다. 그들의 얼굴마저 일그러지고 있었으니 그 표정이 어떤지도 잘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 부딪히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늘어진 엿가락처럼 서로의 몸을 비비꼬았다.

 “역시 예상대로군.” “별 신통한 게 없어.” 대마신들의 비아냥거림 뒤로 천마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 끝날 것이다. 이제 곧.” 사방은 점차 고요해졌다. 처음에 그렇게 열광하고 광분하던 마인들도 잠잠히 장내를 쳐다보고 있다.

 “이제 되었다. 그들을 풀어 주라.” 루시퍼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발리는 조금 불만이라는 투로 말했다.

 “이 정도는 약소하지 않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라.” “알겠습니다.” 발리가 힘을 풀자 허공에서 수하들의 몸이 바닥을 향해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들 중 움직이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고통을 호소하거나 신음성을 흘리는 게 고작이었다.

 “마수들을 풀라.” 내 고개가 자동적으로 루시퍼를 찾아 갔다. 그의 입에서 명이 떨어진 이상 반드시 그대로 될 것이다. 내가 무슨 말로 항의해 본다 하더라도 변함이 없겠지. 발리는 자기 자리로 돌아오려다 다시 돌아서서는 슬쩍 손을 흔들었다.

 슈슈슈슝 그의 손에서 흘러 나온 기류들은 날카로운 빛살이 되어 바닥을 휩쓸었다. 그가 다시 허공을 지나 제자리로 돌아온 뒤에야 그가 조금 전 무슨 짓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두의 팔은 전신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꿈틀대는 것이 고작인, 거의 다 죽은 자들에게 또다시 그런 짓을 하다니.

 “후우 후우.” 난 숨을 고르고 뒤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저놈을 내 상대로 지목하겠다.” 난 발리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루시퍼에게 그렇게 말했다.

 “결정한 건가?” “그렇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발리의 새카만 눈이 순간 반짝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날 지목했단 말이지?” 어차피 이놈들 모두가 내게 벅찬 건 마찬가지. 가능하다면 저 발리라는 놈에게 작은 상처일지언정 내 손으로 입히고 싶다. 수하들이 겪은 고통의 만 분의 일이나마 내 손으로, 내손으로.......

 난 발리의 눈을 쏘아보다 장내로 눈길을 돌렸다. 쏟아져 나온 마수들이 바닥에 꿈틀대는 수하들을 찢어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었다. 광마존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본다.

 난 그의 마지막을 놓치지 않으려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의 옆구리에 마수 한 마리가 달라붙어 뜯어먹고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날 보고 있었는데 이내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그가 죽었다. 광마존이 죽은 것이다. 잘 가라....... 광마존. 더 이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평안히...... 평안히 안식해라.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반듯이 누운 소군에게도, 몸을 비틀며 발버둥치는 율극에게도, 숨을 길게 토하더니 오히려 웃음을 토하는 개왕에게도, 비릿한 조소를 물고 있는 무영존에게도,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다가가려 몸을 꿈틀대는 자운에게도 어김없이 마수들은 달라붙어 있다. 제갈초홍의 아름다운 몸도 훼손되었으며, 소왕의 굵고 튼튼한 다리 한 짝도 마수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생명의 불씨들이 꺼져 가고 있다. 기다리던 죽음이것만 내 눈에서는 왜 이리 눈물이 솟아나는지. 난 마수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싶었다. 마계에 속한 자들이라면 그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도륙 내고 싶었다.

 신이시여,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진정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시라면 내게 힘을 주소서. 그리고 저들을, 저 악마들을 내 손으로 처단케 하소서. 이를 위해서라면 나는 그 어떠한 것도 거부하지 않겠소.

 “으아아아.......”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머리가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