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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皇帝)의 검(劍) - 97 (93/111)

 황제(皇帝)의 검(劍) - 97

 [앞으로는 내가 지켜주겠소.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소. 그 동안  고생했소.]

 둘은 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연인들 같았 다. 잘 어울리는 철석간담의 한 쌍이었다. 상황이야 어떻든 천향옥봉은 눈가에 차 오르는  눈물만은 감추고 싶지 않았다. 가슴 뭉클함이 이내 전신을 휩싸고 돌았다.

 '사랑해요. 앞으로의 삶은 당신을 위해서 살아가겠어요.'

 자운의 마음속의 말들은 언어가 되어 전해지지는 않았으나 마주잡은 손길로도 광마존은 그 녀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어서 빠져나갑시다.]

 광마존의 튼튼한 두 팔이 그녀를 품안에 안아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광마존의 튼실한 가슴 팍에 깊이 묻었다. 이대로 잠이라도 잤으면 좋으련만 그녀 또한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사랑하는 정인과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광마존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뿐이었다.

 광마존은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가 빠져나가기로 작정한 곳은 대상벌의 내원을 거의  직단으로 가로지르는 방향이었다. 사실 그녀를 안고서는 천마잠형술을 펼쳐보아도 별 효과 가 없었다. 그럴 바에야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한 발을 구르며 위로 몸을 솟구쳤고 전각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그는 사방을 빠르게  살폈다. 현재 자신들이 있는 위치는 대상벌의 내원 중에서도 심처라 할 수 있는 지역이었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내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전각을 거쳐야만 했다.

 [자운. 저 큰 전각은 누구의 처소요?]

 그는 습관처럼 전음을 사용했다. 그녀는 여전히 광마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뇌까 렸다.

 "봉신전(奉新殿)이라는 곳으로 이곳의 책임자격인 천무태공의 처소이자 집무실이 있는 곳입 니다. 가장 경계가 치밀한 곳이죠."

 [저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오?]

 "이곳의 구조자체가 일종의 진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후면으로는 각종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지라 소동 없이 나가려면 차라리 정면을 택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 또한 지키는 자들이 많다면 마찬가지가 아니오? 더군다나 이런 모습이라면 발각되는 즉 시 비상이 쳐질텐데......]

 이래저래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그것을 아는지라 입을 꾸욱 다물었다. 어차피 거 쳐야 하는 관문이라면 당당하게 뚫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냐만은 그런 객기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좋소. 정면을 택해 조심스럽게 빠져나가 봅시다. 설마하니 죽기야 하겠소?]

 광마존 나름대로는 천향옥봉을 안심시키려고 가볍게 건넨 농담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죽음이란 단어가 그다지 낯설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왜 일까? 가 까운 곳에서 자신들을 채가기 위해서 몸을 낮추고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고 그 덫은  멀지 않은 곳에서 아가리를 벌리고만 있을 것 같았다. 불길한 생각은 꼬리를 물고 그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괴롭혀 왔다. 천향옥봉은 광마존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소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지금 그녀는 진실로 살고 싶었다. 여기서 생을 마감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광마존은 곧장 어둠을 택해 동화되어 가려고 노력했다. 

 지붕을 가로질러 잇대어져 있는 전각을 건너뛸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함께 뛰었다. 그 는 나름대로 시간을 측정해보았다. 천향옥봉을 데리러 온 무사가 돌아갈 시간은 이미 지났 다. 그런 점에서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나 재차 명이 떨어졌을 것이고 지금쯤 그들은 천향옥 봉이 있던 처소로 들어서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마음이 조급해져 그 는 가일층 속도를 배가했다. 어둠 속에서 어른거리는 인영들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그는  움직임을 죽이며 건물의 벌어진 공간을 찾아들어야만 했다. 그 혼자라면 천마잠형술을 펼쳐  몸을 감출 수 있지만 천향옥봉을 안고 있는 이상에야 그것은 무용했다. 또 하나의 인영을  감지한 광마존이 전각의 지붕에 바짝 엎드리며 속으로 툴툴대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잠도 없냐? 이 시간에 무슨 침입자가 있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나 그래? 

 내 오늘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반드시 또 한번 들리마. 밤에 잠 안자고 설치는 것들의 목을  따놓고야 말리라.'

 그의 손이 빠르게 앞으로 뻗어갔다.

 쉭

 털퍽

 하나의 인영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던진 것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가 져온 침이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침이 그의 손에서 암기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시체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자운이 사라진 것은 알려 졌을지도 모를 일. 시간을 지체해서는 득 될 것이 없다.'

 지붕 위를 스치듯 뛰어가는 광마존의 모든 감각은 주위의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흔적도 그렇다고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야에 뻔히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 기에 그는 최대한 몸을 낮추었다. 하나의 전각을 건너 뛸 때마다 품속의 자운을 더욱 힘주 어 안았다. 그가 목표로 잡은 커다란 전각, 봉신전이라 불린다는 그 전각의 주위는 다른 곳 에 비해 유달리 밝았다. 대충 가늠해 보기에도 수 백 명의 호흡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붕에 만도 스무 명이 넘는 놈들이 드러누워 있는 듯 했다.

 '이런...... 저 놈들을 어떻게 따돌리지? 할 수 없지. 모두 흔적 없이 죽이는 수밖에......'

 [자운. 지금부터는 숨도 크게 내쉬면 안되오. 여기 잠시만 있으면 저 놈들을 모두 처치하고  돌아오리다.]

 그는 봉신전이 바라보이는 전각의 지붕에 천향을 내려놓는다. 다행인지 그곳은 지붕의 높낮 이가 틀려 그녀가 몸을 숨길 곳이 있었다. 광마존은 그녀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곧장  천마잠형술을 전개해서 사라져 버렸다. 천향옥봉은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정인을 눈 동자 에 담아두기라도 하려는 듯이 애틋함을 담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놈들!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쉬려무나.'

 그의 손에서는 은침 수 십 개가 어둠 속에서도 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소리도 없이  전각의 지붕 위에 은신하고 있는 놈들을 찾아내었고 어김없이 그의 손에 들린 침들이 그들 의 사혈에 틀어박혔다. 신음도 없었기에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의 잠복을  위해 대부분 고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명이 다한다고 해서 별다른 자세의  변화는 없었다. 그는 전각의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도 몇 놈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놈들은 죽이면 안되겠군. 빌어먹을......'

 그는 빠르게 다시 천향옥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품에 안아들고 또 다시 움직였 다. 드디어 그는 내원의 최 중심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만 벗어나면 된다. 최소한 백장만 벗어나도 설사 발각된다 해도 빠져나갈 수 있다.'

 그는 자신했다. 자신의 경공을 능가할 놈이 이곳에는 없을 것이고 한 두 놈 따라 온다고 해 도 유인해서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그가 거쳐온 곳 이라 여겨지는 방향에서 전각 쪽으로 달려오는 놈들이 보였다. 그들은 뭐가 그리 다급한지  곧장 전각 안으로 사라져갔다. 그런 그들을 보며 광마존은 내심 짚이는 것이 있어 더욱 조 급해졌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그는 몸을 엎드리며 전각의 지붕을 박찼다. 그가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판사 판이라는 식으로 몸을 드러내며 달려갔다. 그가 움직여 가는 속도는 굉장한 것이었지만 육 안으로 잡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빗발쳤다.

 "저기 침입자다."

 삑

 호르르륵

 별의별 호각소리가 동시에 조용한 하늘을 요란스럽게 울려갔다. 어둠가운데 잠들고 있던 대 상벌이 갑자기 소란스러워 지는가 했더니 여기저기서 횃불이 밝혀지고 더 많은 고함소리가  하늘을 수놓았다.

 '들켰다.'

 광마존은 반사적으로 품속의 자운을 더욱 힘주어 안으며 힘차게 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이제는 그를 모든 대상벌의 고수들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저기다."

 "저쪽이다. 막아라."

 소리가 아래서 들려오는 것을 들으며 몸을 허공 중에서 뒤집으며 다시 한번 재 도약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전진해갈 수는 없었다. 사방에서 그를 향해 쏘아진 화살 때문이기도 했 으며 맞은편에서 거의 날아오다시피 다가오는 일단의 고수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한 손 을 펼쳐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었다. 쏘아지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재차 왔던 곳으로 되돌 아가 버린다. 활을 쥐고 있던 궁수들 중에 몇몇은 자신이 날린 화살에 몸을 관통 당한 채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광마존은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몸을 비호처럼 날리며 포위 해 오는 무리들의 일각을 뚫어갔다.

 "죽어라 하루살이들."

 그의 손에서는 백옥마강이라 불리는 강기가 뽀얀 몸체와는 달리 위력적으로 무리들을 강타 했다.

 쾅

 "으악"

 "케엑"

 별의 별 괴이한 비명을 질러대며 그들은 격전의 권역에서 퉁겨나갔다. 정통으로 맞았건 스 쳐 맞았건 간에 그들은 피 떡이 되어 뭉개졌으며 파편들이 밤하늘로 비산했다. 저것을 아름 답다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렇지만 광마존은 순간 어울리지 않게 그 광경이 너무 나 아름답다 여겨졌다. 순식간에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그들은 주춤거리지도 않고  길들여진 본능대로 적을 향해 검을 꼬나 쥐고 달려들었다. 마치 성난 개떼들 같기도 했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의 본능은 사육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광마존이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 고서는 한 손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강기를 쏘아냈다. 그의 삼 장 방원 내에는 아무도 들어 서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너진 일각 은 또 다시 다른 놈들로 순식간에 채워진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허리춤에 매어져 있 는 검을 빼어 들었다. 기수식으로 멋을 부릴 생각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인지 곧장 적들을  향해 검강을 시전 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가 하면 중단에서 좌우로 회전하며 뿌렸다.

 콰쾅

 "끄악"

 직단으로 내리긋는 동작에 그의 정면으로 다가서던 놈들과 주위에 있던 놈들이 무더기로 터 져 나가며 뒤로 몰려들고 있던 놈들까지 쓰러뜨리며 퉁겨졌다. 땅에는 검강의 위력으로 깊 이 반 자는 족히 될 흔적이 뚜렷이 패여져 있었고 7장은 떨어져 있을 고목이 반으로 쫘악  갈라지며 좌우로 넘어가고 있었다. 광마존의 앞에서 비롯된 흔적이 그곳까지 이어져 있음을  발견한 무리들은 그제야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이내 독려하는 소리에 부추겨 흩어져  버렸다.

 "놈은 단지 하나일 뿐이다. 겁먹지 말고 죽여라."

 광마존은 소리치는 놈이 너무나 얄미웠다. 놈을 먼저 죽여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놈은  인의 장막 저 뒤에서 소리만 지르고 있었기에 마음으로만 놈을 잘게 부수는 수밖에 달리 도 리가 없었다. 점차로 몰려드는 숫자는 늘어나고만 있었다. 다른 곳의 경비를 맡고 있던 놈 들이나 꽤나 지위가 높아 편하게 자기처소에서 잠을 퍼 자던 놈들도 급작스런 소란에 몽땅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이것 이러다 꼼짝못하고 여기서 당하게 생겼구나. 할 수 없다. 모험을 해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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