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皇帝)의 검(劍) - 95
초량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자신감으로 충만하던 그였던지라 지금의 모 습은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망망한 대해에서 암초를 만난 자와도 같았다.
"후우......"
그의 입에서 그의 심정만큼이나 어두운 빛깔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 그가 좌정하고 앉 은 곳은 그만의 연공실이었다. 이곳은 허락이 없는 한 대상벌에 거주하는 그 누구도 접근 할 수 없는 곳이었기에 그 홀로 넓은 연공실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사방 일장은 됨직한 석대에 포단을 깔고 앉았는데 앞에는 한 권의 서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정면의 아무것도 없는 회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검황을 비롯한 오황은 나로서 견제하기가 벅차다. 사부님의 의제들이긴 하지만 그 야심들 이 너무나 위험하다. 그들은 중원을 피로 물들이기를 원하고 있고 이미 안정기에 접어든 명 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역사는 결코 몇 사람만의 의지로 돌이키 지 못하는 것임을 모른단 말인가? 그들의 이런 생각에는 사실 무림일통이라는 것보다는 제 국의 권력에 더 향수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과연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 어야 하는가? 아니면 사부님을 설득해서라도 그들을 견제해야 하는가? 나에게는 명분도 없 고 힘도 부족하다. 만약 내가 그들을 직접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힘을 합해 나를 먼저 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혈영뇌전도법이 더욱 절실했던 것이었는데...... 후후 이 것은 도저히 무공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니......'
무슨 뜻일까? 천마의 무공에 필적할만한 무공중 하나라는 고금최고의 도법을 초량은 무공이 라 할 수도 없다 단언하고 있었으니 그 연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8성이 한계다. 더 이상의 수련은 인간에서 악마가 됨을 의미한다. 피와 파괴만을 그리워하 는 악마가 되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이것은 내게 휴지조각이나 진배없는 셈이다.'
그는 안타까웠다. 처음에 이것을 천향옥봉에게서 건네 받았을 때 그는 하늘을 날 듯이 흡족 했었다. 현재의 그의 무공만 해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오황 중 가장 약한 독황(毒皇)보다는 강하지만 검황(劍皇)이나 혈황(血皇)에 비하면 강하다 할 수 없 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항상 어느 정도의 실체는 감추는 영악한 위인들인지라 그들의 진정 한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초량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천황부의 힘은 막강하다. 혈마천과의 동맹이라면 천하를 유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막강한 힘이 오황같은 위험천만한 인물들에 의해 휘둘러진다면 세상은 지옥이 되어 버릴 것 이다. 패도에도 격식이 있어야 하고 질서가 있어야 한다. 세상은 명분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중원이 힘만으로 장악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기에 그들의 방법은 잘못된 것이 다. 후우...... 검황이 중원에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부터 그들이 직접 움직이겠다는 암시나 마찬가지. 이제 곧 나머니 사황들 마저 중원에 들어올 테고 사부님마저 오신다면 나로서는 막을 수 없다. 진정 어찌해야 하는가?'
그의 고민은 그 혼자만의 것이었기에 더욱 외롭고 처절한 것이었다.
"누구냐?"
초량은 고개를 들어 입구 쪽을 바라보다가 들어서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자 경 계를 풀었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초량의 말에 안으로 들어선 이가 답했다.
"사형! 물어볼 것이 있다."
"물어볼 것? 뭐지?"
초량의 앞으로 다가선 인물은 다름 아닌 그의 사제인 혈수천자였다. 초량의 곁에는 항상 열 명의 그림자들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붙어 다닌다. 7남3녀의 그림자들은 어둠 속에 웅크리 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살수에 대비해 항상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 의 무공은 천황부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고강한 것이었다. 그들이 초량의 곁으로 다가서는 인물들 중 경계하지 않는 세 사람이 있었으니 초량의 사부인 천황부주와 사제 혈 수천자, 그리고 사매인 빙화였다. 이들 삼인 만은 자신들이 섬기는 주군의 명에 의해 제지 를 받지 않고 다가설 수 있었다.
"내게 사실을 말해 주시오. 삼년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혈수천자는 처음으로 초량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껴서일까? 초량은 지나치게 흥분하며 냉정을 잃고 있었다.
"......"
"사형은 알고 있지 않소? 내게 그때 일을 말해 주시오. 사형...... 제발 부탁이니 진실을 알려 주시오."
혈수천자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의 눈은 염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눈빛이 너무나 집요한 지라 초량은 그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어서 돌아가거라."
"사형."
혈수천자의 애타는 부름에 초량은 흠칫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울먹임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사매가 왜?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묻고 있잖아. 사형은 알고 있어. 알고 있다 고...... 대체 왜 내게 가르쳐 주지 않는 거지?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
초량은 돌아앉았다. 그를 마주보기가 겁난다는 듯이......
"삼년 전...... 사부님의 명을 받아 떠났던 내가 부로 돌아왔을 때 사매는 보이지가 않았어.
나는 바로 사형을 찾아갔었지. 사매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사형은 모른다고 했어. 그녀 의 처소는 파괴되어 있었고 불길에 그을려 있었어. 난 그녀를 찾아 천황부내를 이 잡듯이 헤매고 다녔고 결국 그녀를 발견해 내었지...... 그런데......빙화는...... 크크크크 발가벗고 온 몸에 가시넝쿨을 감고는 옥에 들어가 있었어. 크크크크 나는 사부님을 찾아가서 빙화를 왜 가두었냐고 물었지만 사부님은 모르겠다는 말씀뿐이셨어. 그녀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어.
빌어먹을 그녀는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 감옥으로 자진해서 들어갔음을 후에 알고 나 또한 미치기 일보직전까지 갔었지. 그리고 벌써 삼 년이 지났어. 알아? 빙화가 웃음을 잃은 지가 벌써 삼 년이 지났다고...... 예전의 그녀는 이미 죽었단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야. 이제는 나도 알 때가 되었잖아? 말해. 말하란 말이다."
혈수천자의 고함소리는 연공실의 벽에 사로잡혀 몸부림치고 있었다. 초량은 두 눈을 감았 다. 사제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한 태도 속에서도 전신을 흐르는 전율만은 그 또한 어 쩔 수 없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깔려갔다. 초량의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어깨를 바라보는 혈수천자의 눈은 이미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고 금세 눈물이라도 쏟을 듯 했다.
그런 그를 향해 극도로 감정을 절제한 초량의 나직한 음성이 혈수천자의 귓가를 맴돌며 들 어왔다.
"잘...... 들어라. 때론...... 알고 있어도 모른 척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네가 알아보았자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괴로움만 더하기 때문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것
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말해. 말하란 말이다. 나 또한 알 권리가 있어. 난 빙화를...... 빙화를......"
혈수천자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가 풀어지며 어깨마저 축 늘어지고야 말았다. 그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너는 유난히 빙화를 아꼈지. 그렇기 때문에 네게 말 못하는 거란다. 네가 그것을 알 경우 취할 행동이 뻔하기에...... 너의 방황이 그 애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난 네게 말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몰론 알게 될 일이지만 내가 바라기는 영원히 너만은 몰랐으 면 좋겠구나. 나 하나로도 족하다. 이것은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이니 말이다.'
혈수천자는 고개를 숙이다 발작적으로 다시 쳐들었다. 돌아서 앉아 있는 사형의 등은 그로 서는 넘어설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한 것이었다. 그가 지닌 고독, 괴로움, 아픔을 온전히 이해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자신이나 빙화에게 지닌 애정만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홀로 감당하려 하는 사형이 이해되지 않았고 또한 그런 모습이 역겨울 정도로 싫었다. 왜 그래야만 한단 말인가? 어린 시절 사형은 그에게 있어 사부보다도 더 의지가 되는 존재였 다. 그는 부모였고 형이었으며 때로는 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이런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삼년 전의 그 날부터였다. 그로서는 마땅히 화살을 돌릴 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빙화의 불행을 막아주지 못한 사형에 대한 미움과 실 망이 더욱 큰 것이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멈칫거리는 그에게 사형의 등뒤에 활짝 펼쳐져 있는 책이 들어왔다. 그는 손을 펼쳤다. 그러자 책은 어렵지 않게 그의 손아귀 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이건 뭐지?"
혈수천자의 그 말은 그때까지만 해도 심중의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힘겹게 싸우고 있던 초량을 돌아서게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보았던 비급이 사제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놀람을 나타내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으며 곧 바로 혈수천자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앞표지를 빠르게 살펴가던 혈수천자의 얼굴에 는 놀람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것은......"
초량의 얼굴은 참혹하다 싶을 정도로 구겨졌으며 당황하고 있었다.
"혈영뇌전도법...... 이라고? 어찌 이것이 사형의 손에?"
그 또한 혈마의 전설에 대해 들은 것이 있었기에 그 놀람은 진정 큰 것이었다.
"그것을 다오. 그것은 익혀서는 안 될 악마의 도법이다. 그러니 어서......"
"호, 이제 보니 이것을 익히느라고 연공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거군. 이 사실이 알려지면 반 응들이 굉장하겠는걸. 사부님이나 오황이 이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후후 이것을 알리지 않고 홀로 익히고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지는군."
초량은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불타는 시선으로 사제인 혈수천자를 응시했 다.
"네 말대로 난 그것을 익히고 있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수련은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되었 다. 악마가 되어봐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혈수천자의 감겨진 붕대사이로 뻐끔 드러나 있는 입술이 꿈틀거리며 찌그러져 갔다.
"흥, 좋아. 그럼 이것은 내가 접수하지. 사형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니깐 내가 가지겠어. 물 론 이의는 없을 거라 생각되는데 어때?"
"뭐라고? 그것만은 안 된다. 어찌 네가 망가지는 모습을 나더러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어 서 다오. 그것을 익혀봐야......"
초량의 다음 말을 막아서며 혈수천자의 말이 뒤를 이었다.
"이것을 익히면 빙화를 그렇게 만든 놈에게 복수 할 수 있겠지. 난 그걸로 만족할 수 있어.
흐흐흐 역시 죽으란 법은 없군. 그 다음에 내가 악마가 되더라도 난...... 후회 따위는 안 할 거야. 되었지? 사형이 익힐 생각이 없다면 내가 익히겠어. 받은 데로 돌려주고야 말겠어. 그 상대가 누구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