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皇帝)의 검(劍) - 93 (89/111)

 황제(皇帝)의 검(劍) - 93

 파천의 손에서 서찰은 여지없이 구겨져 버린다. 파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창 은 열려져 있지만 영상은 맺히지 않았다. 눈 속에서는 하늘을 흘러 다니는 구름만이 의미  없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파천의 얼굴은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런 모 습을 대한 독고설란은 영문도 모른 채 불안한 가슴을 쓸어안아야만 했고 개왕 역시나 그리  편치 않은 모습이었다. 머리 위를 흐르던 구름이 시야 끝에 간신히 걸쳐져 갈 때까지도 장 내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바보 같은...... 내 그리도 마음을 주지 말라 했건만,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파천의 눈 속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은 분명히 안타까움의 색깔이었다. 그는 자신을 애타게  주시하고 있는 독고설란을 마주 보았다. 설란의 눈은 염려로 가득했고 그것은 가식이 없는  진실 된 것이었다. 파천은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에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만약...... 설란이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후우, 그래 광마존! 그것이 네가 선택한 길이 라면 나 또한 나무라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왜 그리 바보같이 성급하단 말인가? 최소한 내 게 도움을 구했다면 내가 반대하리라 생각했던가?'

 물론 파천은 반대했으리라.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든 광마존이 납득할 수 있는 대책을 내 놓 았을 것이다. 광마존 역시나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는 힘겨운 길을 선택했을 까?

 '이것이 너 자신만의 일이라 여겼겠지. 이런 일로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광 마존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을 위인이지. 그러나 너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내 게는 목적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있다. 내게 속한 자들을 잃고 싶지 않다는......'

 [지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조치를 취할까요? 아니면 그냥 무시하실......]

 차마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개왕의 표정만 봐도 그 역시 지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있음을 알게 해 준다. 파천의 눈이 개왕에게로 향해졌다.

 [지금 낙양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얼마나 되지?]

 [마황검위대 오개조 오백명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라면 대상벌을 휘저을 수 있을 겁 니다. 이틀 이내에 증원될 수 있는 전력은 나머지 마황검위대 고수들을 포함하여 오천명 정 도가 됩니다. ]

 [......]

 파천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잠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 같았다.

 '마황검위대를 움직여서 대상벌의 본거지를 치게 되면 결국엔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천황부와 혈마천의 촉수에 본교의 움직임이 노출되는 것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광마존이 살아 나올 수 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이나?]

 [그들의 드러난 전력을 감안할 때 그 혼자 만이라면 충분합니다만, 동행이 있다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들 역시나 마냥 허수아비는 아니기에......]

 '그렇겠지. 그럼, 결국 방법은 단 하나밖에는 없군. 어쩔 수 없다.'

 [개왕 지금 즉시 ......]

 파천은 한참동안이나 개왕에게 전음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파천의 전음이 끝나자 개왕 은 서둘러 장내에서 사라져갔다. 경신술을 펼치며 멀어져 가는 개왕을 쫓는 시선엔 복잡한  심경이 맺혀 있었다.

 ★ 어둠은 어디나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빛이 머물다 간 자리에도 어둠은 여전히 남겨져 있 다. 항상 반대쪽을 점유하고 결여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두꺼운 천으로  가려진 방안은 어둠만이 가득한 듯 했다. 그 안에서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

 어찌 들으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흘리는 신음과도 같이 들렸으며 또 다르게 들으면 감내할  수 없는 절망을 이기지 못해 토해내는 영혼의 웅얼거림도 같았다.

 콰당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 실내로 들어섰고 그와 함께 어둠이 한쪽으로 다급하게 숨어버렸 다. 그러나 아직은 어둠이 빛보다는 우세했으므로 방안의 전경이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았 다. 단지 중앙에 커다란 의자가 있고 그곳에 사람이라 짐작되는 형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을 뿐이다. 활짝 열려진 방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빛을 피해 괴영은 온몸을 경직시키며  움찔거렸다.

 "한심한 놈. 대체 이곳에서 뭐하고 있는 거냐?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하던 놈이 단 한번의  실패를 이기지 못하고 이런 추한 꼴을 보이다니...... 어서 일어서거라."

 빛을 등진 사내에게서 흘러나온 다그침에도 괴영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렇다고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잘 들어라. 네가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누구라도 그런 자를 만났다면 불가 항력이다. 그러니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거라."

 마치 후광처럼 빛을 거느리고 선 자는 초량이 분명했다. 그는 웅크리고 있는 괴인의 왼쪽  어깨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고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언제 그랬느 냐싶게 그의 입술을 비집고 쏟아져 나온 음색은 냉랭했다.

 "본부에서 장로들이 오셨다. 그리고......검황께서도 함께 오셨다. 이미 너의 일을 알고들 계 시니 어서 그 분들을 뵙도록 해라. 이렇게 마냥 있는 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무사는 패배 를 당할 수는 있으되 절망하면 안 된다. 우리가 가는 험란한 과정은 언제나 승리만 존재하 지는 않지. 패배가운데 스스로를 일으키지 못하는 자는 결국 도태되고 만다. 아직 너에게는  기회가 있으니 어서 일어서거라."

 웅크리고 있던 괴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저것을 과연 사람의 얼굴이라 할 수 있을까? 

 흉측했다. 두 눈만을 제외하고 얼굴의 전 부분은 깊게 도랑이 파여져 있었다. 이마에서 시 작되어 턱에 이르기까지 칼로 그어 내린 듯한 상처가 세로로 깊게 패여 져 있었던 것이다. 

 얼굴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무수한 선이 틈도 없이 엉겨붙어 있었다.

 "사형...... 나를 이대로 놔두면 안될까?"

 사형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혈수천자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의 왼쪽 어깨에 달려 있어야  할 팔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혈수천자가 분명했다.

 "검황께는 죄송하다고 전해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버린다. 그런 그를 쳐다보는  초량은 처음과는 달리 아무런 말도 없이 뒤 돌아서더니 밖으로 나가버렸고 다시 문은 굳게  닫혔다. 다시 활보하기 시작한 어둠은 금세 실내를 깊은 안식으로 끌어 내렸다.

 "결단코 세상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내게 이런 절망을 준 세상, 사매를 뺏어간 세상, 모두  모두 멸망시켜 버리겠다. 크크크 어둠만이 지배하는 파멸을 보여주고야 말겠다. 크하하하하"

 깊은 절망만큼이나 웃음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 들으면 세상을  조롱하는 광인의 웃음 같기도 했다. 혈수천자! 간신히 생명만을 건져서 도주한 그는 말을  타고 오는 것도 힘겨울 지경이었다. 지혈을 제때 하지 못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도 있었 지만 심적인 충격이 그가 견딜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서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상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는 죽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초량에게로 인도되었을  때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왼팔은 어깨에서부터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었고 얼굴은 륜으로  긁어내린 듯 보기 흉하게 얼룩져 있었다. 이 상태로 살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 였다. 초량은 그를 치료하는 내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그의 손은 부들부들 경련 을 일으켰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열릴 줄을 몰랐다. 보다못한 초량의 수하들이 대신 치료를  하겠다고 나섰으나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 그는 혈수천자의 상처를 홀로 묵묵히 치료 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처소로 사라졌고 혈수천자는 내실에 어둠만 머물게  하고서는 홀로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 "죄송합니다."

 "태공께서 그런 말씀을 할 이유야 있습니까?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중원무림에 그렇게나 강 한 고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정보를 종합해 보면 결코 정도 의 인물로 여겨지지 않건만 그럼 마도련의 고수라도 된단 말입니까?"

 초량은 공손한 어조로 눈앞의 노인에게 대답했다.

 "그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혈마천 이총사가 준 정보에 의하면 그자는 위기에 빠진 천마 서생 파천을 구해간 자이며 그가 사용한 무공은 괴이한 마공이라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천마서생과 연관은 있어도 마도련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그 정도의 초 극고수가 마도련에 존재했다면 이미 전 무림에 알려져 있었을 겁니다."

 "그럼 태공은 그가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천마서생이라는 자 역시나 그 사문이나 소속이 애매한 자입니다. 아마도 그의  실제적인 출신을 가름할 수 있는 열쇠를 지닌 자이겠지요."

 "으음...... 무림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신비세력이라도 존재한다는 말씀이시오?"

 초량은 눈앞의 현의 노인을 깊숙한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오황 중 일인이자 사부님과 혈황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자! 부내의 대소사에는 관심이 없 지만 무공에는 병적일 정도로 집착을 보이는 자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음흉한 속셈을 오 래 전부터 감지해 오고 있었다. 이번의 혈마천과의 혈맹도 사실상 이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황은 검황의 들러리에 불과하다. 아마도 혈마천주와 모종의 묵계가  있었겠지. 그러나 잊지 마라. 내가 있는 한은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심중의 생각과는 달리 초량의 얼굴에는 춘풍과도 같은 훈훈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검황 역시나 속에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애한 미소를 잃 지 않고 있었다.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사제의 일도 그렇고 표물 탈취 건도 그렇고...... 그렇게 생 각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들의 행사가 워낙에 은밀한데다가 또한 측정불가의 고수들인 지라 집중적인 견제가 필요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흐음...... 이것 생각 외로 무림통일의 시기가 멀어지는 것 아닙니까? 혈마천과의 혈맹으로  거칠 것이 없으리라 여겼건만...... 역시나 무림의 저력은 무시할게 못되는군요."

 초량은 속으로 그런 그를 비웃었다.

 '멍청한 자들! 중원무림의 저력은 아직 채 드러나지도 않은 상태다. 당신들이 판단하고 있는  전력은 진정한 힘의 오할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혈마천과 본부의 힘을 전부 쏟아 붓는다 고 해도 솔직히 이긴다는 보장이 힘들건만......'

 "그렇지요. 중원무림의 저력은 엄청나지요. 우리가 전력을 기울인다고......"

 "그래 보았자지요. 솔직히 본부의 전력만으로도 중원무림정도야 얼마든지 깨부술 수 있지  않겠소?"

 초량의 말을 끊어버리는 검황의 말은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에 그 가 데려온 인원은 장로들 중에 7명과 이천에 달하는 검황전의 고수들이었다. 이들은 오황들 의 친위 세력 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럽다 인정되는 천황부의 정예들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검황은 지금의 힘만으로도 중원을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초량이 보기에 한심한 것이었으나 애써 그 생각을 밖으로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어 차피 부딪혀 보면 알 것이 아니었던가?

 "이번에 내가 온 것은 태공도 아시다시피 혈마천과의 공조를 위해서요. 그 쪽에서는 이총사 란자가 책임자로 파견될 것이오. 먼저 무림맹을 한번 두들겨 볼 참이오. 그 다음엔 마도련 이 되겠지요. 우리가 먼저 시작하면 이미 들어와 있는 사황성이나 사사혈교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혼란의 시대가 아니겠소? 흐흐 그 틈바구 니에서 우리의 세력을 구축하고 본진의 세력이 들어오면 감히 그 누가 우리를 막을 수 있겠 소? 그렇지 않소?"

 '망령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렇겠지요."

 정말이지 초량은 더 이상 검황과 대화를 나누기가 싫을 지경이었다. 상황판단도 제대로 하 지 못하는 늙은이와 무슨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잠자코 있었다. 그가 입을 다 물자 검황의 입에서는 중원무림을 오합지졸로 몰아가는 신랄한 비난과 조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말들을 하나로 종합하면 항상 요지는 자신이 잘났다는 말이었다. 초량 이 참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발휘한 인내력만으로도 범인은 상상할 수 없는  초인적인 것이었다.

 "저는 이만 연공 시간이 되어서 나가 봐야겠습니다."

 초량의 말에 검황은 두 눈에 의문을 담았다.

 "아, 그러십니까? 뭐, 특별한 무공이라도 수련하시는가 보죠? 제가 듣기로 태공의 무공은 상 상할 수 없을 경지에 이르렀다던데 또 다른 무공을 연구하시기라도 하십니까?"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맡은바 직무에 비해 너무 부족해서요. 그래서 지닌 무공을 다시 금 다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나중에 장로들과 함께 뵙지요."

 초량이 일어서서 나가려 하자 검황 역시나 일어서서 마중을 했다. 그가 내미는 손길을 마주 잡은 초량은 왠지 서늘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초량이 나가고 나자 검황은 자리에 앉아 홀 로 사색에 잠겨갔다.

 "사류검."

 "부르셨습니까?"

 땅에서 갑자기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의 인영이 검황 앞에 부복했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바닥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태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

 "위험한 인간이야. 천황의 대제자란 신분이기는 하지만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더군다나 진 실 된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가 없으니......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 눈빛도 기분이  나쁘고 말이다. 마주 앉아 있으면 내 속내를 모두 들키는 것 같단 말야. 태공을 미행할 자 신이 있느냐?"

 "불가능한 명이십니다. 그렇지만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속하...... 시행하겠나이다."

 "하긴 저 놈 주위엔 항상 그림자들이 붙어 다니지...... 아직은 부딪힐 이유가 없겠지. 그래  알았다. 너는 대상벌 주위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아라. 전력배치도 염두에 두고......"

 "존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