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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30화 (외전 완결) (530/530)
  • 외전 11화. 네? 무림이라고요?

    마검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은 잠시 반짝이다가 곧 빛을 잃었다.

    신음 같던 검명도 씻은 듯 사라지고 사방에는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후우.”

    서린이라 하는 젊은 청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끝났네요. 스승님의 뜻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래.”

    마검을 부숴 버린 청년, 손빈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야. 진인께서도 편히 쉬실 수 있겠지.”

    “그렇다면.”

    문득 객옹이 말했다.

    “이제 마검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손빈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검은 또다시 나타나겠지요. 다만 이번은 조금…… 특이했을 뿐입니다.”

    “특이하다고?”

    객옹이 반문했지만 손빈은 그저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대상인이 말하던 천기가…….”

    객옹은 말을 멈췄다.

    겉모습은 운현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지만 그는 사일천의 부친이다.

    잠시 호칭을 고민하던 객옹은 사일천을 돌아보았다.

    “자네의 아버님을 말하는 것이었나?”

    사일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네. 그가 말하던 천기는 바로.”

    슥.

    고개를 돌린 사일천이 허공에 떠 있는 빛의 안개를 바라보았다.

    “이것을 말함이었다네. 정확히는 지금 이 사건 자체를 이르는 것이지.”

    “사건?”

    “그렇네. 문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오시는 건 아주 파격적인 일이거든.”

    자랑스레 말하는 사일천의 모습에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그럼 일대상인이 노리던 바가 무엇이란 말이냐? 그는 대체 무엇을 위해…….”

    “문을 넘으려는 것입니다.”

    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객옹이 고개를 돌리고 사일천 역시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가 말했듯이 하늘을 찢고 새로운 하늘을 여는 것이지요.”

    객옹의 표정이 굳었다.

    그저 비유라고 생각했던 일대상인의 말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형. 이제 돌아가요.”

    옆에 있던 서린이 말했다.

    “그래. 돌아가자.”

    손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현을 향했다.

    “혹시 외사(外史)가 아직 남아 있습니까?”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외사’라면 정식으로 기록된 정사 외에, 알려지지 않은 내막에 대한 기록을 일컫는 용어였기 때문이다.

    대답은 사일천이 했다.

    “외사는 없습니다. 제법 오래 유지되긴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그렇구나.”

    손빈의 표정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사일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뜻있는 사람은 또다시 나타나는 법이지요.”

    슥.

    운현을 돌아보며 사일천이 빙긋 웃었다.

    “그가 아버지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예월이라는 곳을 돕고 있지요. 예전의 예원처럼 말입니다.”

    손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운현을 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건 정말 기쁜 일이군요.”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연이 닿았을 뿐,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게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손빈은 미소를 머금으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군요. 제가 잠시 보여 드릴 것이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빈은 가볍게 웃으며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스릉.

    아름다운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객옹은 흠칫했다.

    손빈의 검은 대단히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객옹조차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이 검로는.”

    손빈은 조용히 말했다.

    “제가 제대로 펼친 첫 번째이자, 가장 자랑스러운 검로입니다.”

    슥.

    그가 검을 들어 올렸다.

    두 손으로 검을 잡고 앞으로 뻗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자세였다.

    하지만 그 순간 번져 가는 팽팽한 긴장을 객옹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이 공간 전체가 저 일검에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검 끝이 빛났다 싶은 순간.

    훅.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유려한 선을 그리며 내리그은 칼날은 부드럽게 위로 솟았다.

    그리고 또다시 아래로 향했다.

    하지만 그 검로는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중간에서 그 움직임이 멈췄기 때문이다.

    그저 그것뿐인, 일 초 반 식의 채 완성되지도 않은 검로.

    하지만 운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객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후우.”

    손빈은 나지막이 숨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스릉.

    매혹적으로 빛나던 검이 그 모습을 감췄다.

    “그건…… 무엇입니까?”

    운현이 물었다.

    그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옥룡역린참이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빈이 말했다.

    “다음번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말입니다.”

    운현은 대답을 주저하지 않았다.

    “네. 반드시 그리하지요.”

    손빈은 만족한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두 여인들에게 말했다.

    “돌아갑시다.”

    “그래요. 빈 랑.”

    사수연이 답하고 너울을 쓴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린은 운현과 객옹을 향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또 봐요, 형! 할아버지도 안녕!”

    그 밝은 모습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굳어 있던 객옹의 표정도 슬쩍 풀리고 있었다.

    탁.

    서린이 먼저 발을 굴렀다.

    빛의 안개가 부드럽게 그를 감싸 안고, 서린의 모습은 곧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손빈과 사수연, 그리고 너울을 쓴 여인이 그 뒤를 따랐다.

    타닥.

    후욱.

    세 사람의 모습은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사일천뿐이었다.

    “나도 가 보겠네.”

    그가 운현과 객옹에게 말했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네만 자네들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 아, 천일검에게도 안부 전해 주게.”

    그가 말하는 천일검은 노부인 능세영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명호는 이미 제자인 금화영이 물려받았지만 말이다.

    “후후후. 능 할머니가 뭐라 하실지 기대되는군. 자신의 후예가 나를 도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말이야.”

    그는 혼잣말처럼 말하며 가볍게 웃었다.

    객옹이 무슨 말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지만 대답은 듣지 못했다.

    휙.

    사일천이 몸을 날렸다.

    그의 모습은 안개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사방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잠시 침묵하던 객옹은 나지막이 신음을 내쉬었다.

    “음, 이게 대체…….”

    그때였다.

    후우웅.

    안개가 일렁이더니 또다시 빛을 뿜었다.

    운현과 객옹은 굳은 표정으로 안개를 바라보았다.

    휘릭.

    작은 체구를 가진 누군가가 안개 속에서 날아내렸다.

    탁.

    땅에 내려선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왜 아무도 없어?”

    그는 작은 키의 노인이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길게 기른 흰수염과 새하얀 눈썹은 마치 신선이라도 보는 듯했다.

    비록 말투와 인상은 신선과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그가 주위를 휙 돌아보고는 혀를 찼다.

    “이런. 벌써 끝난 게로군. 그러니까 빨리 간다고 했더니 영 매도 별 걸 다 챙겨 주느라고…….”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휙.

    그가 운현을 돌아보았다.

    “별일 없지? 당문도 잘 있고?”

    갑자기 튀어나온 ‘당문’이라는 말에 객옹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잘 있다만, 자네는 누군가?”

    “당문의 여자와 같이 사는 사람”

    조금도 주저 없이 말한 노인이 피식 웃었다.

    “존경스럽지 않나?”

    당문의 여인들은 기가 세다. 게다가 당문은 독심(毒心)으로 유명하니, 존경스럽지 않냐는 말도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노인은 문득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그렇게 따지면 나보다 빈이가 더 존경스럽긴 하지. 대체 어떻게 그런 부인들을 데리고 웃으며 사는지……. 어휴.”

    그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그러곤 곧 몸을 돌렸다.

    “빨리 가야겠군. 늦으면 또 영 매가 걱정할 테니까.”

    그가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어르신.”

    운현이 불렀다.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노군이라고 불러라. 그런데 왜?”

    사락.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어찌하면 무도(武道)의 극의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은 충동적이었다.

    손빈이 보여 준 일 초 반 식의 검로가 운현이 가진 무인의 본능을 크게 자극한 것이다.

    노군이라 밝힌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피식 웃었다.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하지 않더냐? 나도 모르니 물어보지 마라.”

    묵직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네 길은 네가 찾는 것이다.”

    운현을 바라보는 노군의 눈빛은 강하고 부드러웠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번져 갔다.

    “또 보자.”

    휙.

    그는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렸다.

    안개는 그를 부드럽게 받아들였고, 노군의 모습은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안개 역시 잠시 빛을 내더니 어느 순간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운현도 객옹도 말이 없었다.

    위태롭게 기운 대전의 모습과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숲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조금 전 그 일들이 모두 꿈인 것처럼.

    “……가자.”

    객옹이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이제 이곳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호오.”

    박 공공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정말 믿기 힘든 일이로군요.”

    “하지만 사실일세. 내가 창룡맹을 떠나 이곳으로 올 결심을 한 것도 그 때문이고.”

    운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창룡맹 총단보다야 여기가 훨씬 조용하고 좋지요. 후후.”

    박 공공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곤 곧 무언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빨리 아이를 낳으셔야겠군요.”

    운현은 살짝 당황했다.

    지금 이야기와 아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게 무슨…….”

    “그래야 훨훨 날아가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그분들과 다시 보겠다고 세 번이나 약속하셨다면서요. 그러면 아이를 셋, 아니 넷은 낳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박 공공은 듣는 와중에도 횟수를 세고 있었나 보다.

    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네를 두고 가진 않을 테니 걱정 말게.”

    박 공공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정말이시지요?”

    “그래. 정말이네. 그리고 무엇보다…….”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여기가 좋다네.”

    사락.

    부드러운 봄바람이 운현의 뺨을 스쳤다.

    황금빛 이중 지붕의 궁과 전이 그 장엄함을 뽐내고, 끝없이 이어진 붉은 담벼락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과 함께 찾아온 봄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어서 자금성 곳곳이 봄기운으로 가득했다.

    “꼭 심산유곡에 있어야만 세상을 피해 숨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하는 운현의 얼굴에도 화사한 봄이 피어나고 있었다.

    “조금은 심심해도 말일세.”

    “후후.”

    박 공공은 웃었다.

    “네. 그렇습니다. 좋은 곳이지요.”

    환한 미소와 함께 박 공공은 말했다.

    “심심하긴 하지만요”

    붉은빛[紫]의 금지된[禁] 성(城).

    권력과 부귀가 맥동하는 그곳에서, 박 공공과 운현은 느긋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

    “후우.”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젊은 문사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이 늦은 것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무슨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

    운현은 젊은 문사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박 공공은 ‘신입입니다. 잘 키워 보셔요. 후후후.’라고 말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일도 없는 창룡전에 신입이라니,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세워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자네.”

    “네, 넷!”

    젊은 문사가 움찔하며 답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짐짓 목소리를 깔며 물었다.

    “혹시, 무림이라고 들어봤나?”

    젊은 문사는 눈을 껌뻑였다.

    하늘 같은 선배 학사 앞이라는 것도, 자신이 지각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잊었다.

    “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무림이라고요?”

    <외전 완(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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