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천외비처(天外秘處)(5)
사내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커다란 체구는 누구라도 짓이겨 버릴 듯했고, 강렬한 눈빛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을 것 같았다.
무복 아래 드러난 단단한 팔뚝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산을 마주한 듯한 존재감은 모두의 이목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땅에 내려선 그는 주위도 돌아보지 않고 똑바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음.”
사내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것이 무엇인지 운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내를 본 순간 운현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인의 본능과도 같은 충동, 곧 호승심이었다.
사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번져 가던 순간이었다.
슥.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때 일대상인이라 불렸던 검은 물체가 있었다.
―끄어어어어.
무저갱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싸늘한 한기가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길지 못했다.
스릉.
사내의 등에 걸려 있던 새카만 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 직선으로 잘려 있는 독특한 모습의 그 대도는 너무나 크고 육중해서, 도(刀)라기보다는 철퇴나 기둥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움직이기조차 힘들 것만 같은 그 커다란 도를, 사내는 가볍게 내리그었다.
후욱.
바람이 일고 허공이 그의 대도 앞에 찢겨 나갔다.
한때 일대상인이었던 검은 물체는 단번에 둘로 갈라졌다.
서걱.
허망하기까지 한 결과였다.
하지만 객옹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한순간 검은 물체의 표면에 일렁이던 강기를, 그리고 그 강기를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는 대도의 모습을 말이다.
털퍽.
둘로 갈라진 검은 물체는 여전히 꿈틀거렸다.
서로 합치기라도 하려는 듯 촉수 같은 것들이 뻗어 나오기도 했지만 잘린 부분은 이미 숯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스릉.
“나는 사자혁이다.”
대도를 갈무리하며 그가 운현에게 말했다.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저는 운현이라 합니다.”
그것은 마치 거인을 대면하는 것 같았다.
키도 그가 컸지만, 절대자의 위엄이라 할 만한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는…….”
그가 무어라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후웅.
빛의 안개가 또다시 흔들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공중에 모습을 나타내는 또 다른 여인을 보았다.
사라락.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펄럭이고 은은한 향이 주위로 번져 갔다.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눈이 확 뜨일 정도의 엄청난 미녀였다.
그리고 운현은 그녀의 복식이 어딘지 북해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박.
여인이 땅에 발을 디뎠다.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슥.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녹아야.”
사일천이 즉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너울로 얼굴을 가린 여인뿐 아니라, 이 여인도 사일천의 어머니라니 말이다.
사박, 사박.
그녀는 사일천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사일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괜찮니? 힘들지는 않았고?”
“네. 괜찮습니다. 어머니.”
미소를 지으며 사일천이 말했다.
“그래. 다행이구나.”
그녀는 손을 풀고 사일천을 대견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건 뭐지요?”
그녀가 사자혁을 보며 말했다.
사자혁 뒤에는 한때 일대상인이었던 검은 물체가 둘로 갈라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모른다.”
담담한 목소리로 사자혁이 말했다.
“알 필요도 없고.”
여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조차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순간 운현은 그녀가 어쩐지 대궁주와 닮았다고 느꼈다.
“뭔지도 모르고 베셨어요? 아빠, 제가 그러지 마시라고…….”
“조용히.”
사자혁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태아가 놀란다. 목소리를 낮춰라.”
여인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
운현을 발견한 그녀의 눈동자가 생기를 띠었다.
아니, 정확히는 운현의 검 때문이었다.
사박.
그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운현에게 다가왔다.
“반가워요. 저는 사수연이라고 해요.”
“아, 네. 저는 운현입니다.”
운현이 예를 표하려 하자 사수연은 웃으며 말했다.
“잠깐 검을 봐도 될까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검, 미명을 정중하게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사락.
그녀는 미명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오랜만이네요. 할아버지께 드렸던 것인데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을 줄은…….”
그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뽑아 보셔도 됩니다.”
사수연의 눈동자가 빛났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제는 당신의 검이니까요.”
슥.
그녀가 고개를 들고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마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당신이 푸른 늑대겠군요.”
운현은 살짝 놀랐다.
“네. 그렇습니다.”
“몇 대지요?”
“이 대입니다. 어머니.”
대답한 사람은 사일천이었다.
사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대? 그렇다면 시간이…….”
“두 번째가 나온 것도 기적이에요.”
너울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북해의 푸른 늑대가 그리 쉽게 나올 수는 없을 테니까요.”
사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현에게 미명을 건넸다.
“보게 해 줘서 고마워요. 좋은 검이지요?”
“네.
운현은 검을 받으며 말했다.
“정말 좋은 검입니다.”
그 말은 운현의 거짓 없는 마음이었다.
사수연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손빈을 보았다.
“빈 랑. 그러면 마검은…….”
후우웅.
빛 안개가 또다시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보며 사수연이 말했다.
“동시에 들어선 것 같은데, 이곳에선 제법 차이가 나네.”
“전혀 다른 세상이니까요.”
너울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말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지요. 형님은 남아 계시는 편이…….”
“동생이 들어갔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그리고 조심해야 하는 건 동생도 마찬가지잖아.”
사수연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 말에 너울을 쓴 여인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휙.
그사이, 누군가 안개를 가르고 모습을 나타냈다.
은사로 수를 놓은 새하얀 옷과 입을 가린 옥빛 부채가 단번에 운현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땅에 내려섰다.
사박.
모습을 나타낸 사내는 엄청난 미남이었다.
같은 남자조차 눈을 떼지 못할 정도여서, 절세의 미남이란 이런 사람이구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남자는 혀를 찼다.
“쯧.”
그는 가볍게 부채를 휘둘렀다.
그의 옥선이 향한 곳은 바로 반으로 갈라져 꿈틀거리던 검은 물체였다.
화륵.
검은 물체는 바로 불길에 휩싸였다.
일반적인 불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아무런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 파란 불꽃은 삽시간에 검은 물체를 집어삼켰다.
그 불꽃은 곧 사라졌지만, 그때는 검은 물체도 더 이상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사락.
옥빛 부채로 입을 가리며 그가 말했다.
“이곳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오자마자 저런 쓰레기를 치워야 하다니, 이래서야 세상을 전부 불태우는 것이 효율적이겠어.”
그의 목소리조차 음악처럼 감미로웠다.
내용은 그렇지 못했지만 말이다.
“특히 저쪽은.”
그는 한쪽을 바라보며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있길래 추악한 악취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지?”
객옹은 흘깃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사내가 바라보는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성한 수풀 너머로 여산의 북쪽 기슭이 자리잡고 있을 뿐, 그가 말한 악취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사이, 사내의 시선은 운현을 향했다.
슥.
운현의 시선이 그와 마주쳤다.
한순간이었지만 옥선으로 입을 가린 사내의 눈에 가벼운 조소가 어리는 것을 운현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곧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가 있나?”
그가 사자혁에게 말했다.
“없다. 보아야 할 사람은 이미 만났으니까.”
“좋아. 그럼 가도 되겠군.”
사내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다.
그는 바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사자혁은 아니었다.
“언젠가.”
강렬한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지.”
그 눈빛은 운현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답했다.
“언젠가, 반드시요.”
“후후.”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웃는 그의 표정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화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의형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게 해서 운현은 가슴이 아려 왔다.
저벅.
사자혁이 몸을 돌렸다.
옥선으로 입을 가린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발을 굴렀다.
휘릭.
가볍게 허공으로 떠오른 사내는 순식간에 빛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사자혁 역시 안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빛의 안개는 또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후웅.
갑자기 누군가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허공에서 유연하게 몸을 돌린 그 사람은 곧 가볍게 땅에 내려앉았다.
탁.
“어? 가깝네? 지난번에는 아주 높았는데?”
그는 갓 소년티를 벗어난 젊은 청년이었다.
눈이 확 뜨일 정도로 잘생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활기찬 청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근데 아저씨들은 어디 있어요? 설마 벌써 사고를 친 건…….”
“방금 돌아가셨어.”
사수연이 말했다.
“여긴 시간의 흐름이 조금 달라. 그래서 엇갈린 거야.”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청년이 운현과 객옹을 발견했다.
그는 손을 모으고 정중한 자세로 예를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서린이라고 합니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분명 처음 보는 청년인데도 자연스럽게 호감이 갔다.
객옹의 표정도 어느샌가 풀어지고 있었다.
“운현입니다. 반갑습니다.”
운현이 답례했다.
“와! 미명이다!”
서린이라 밝힌 청년은 그렇게 외치며 한걸음에 운현에게 다가왔다.
그는 몸을 숙이며 운현의 미명에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오랜만이네. 이 검도.”
눈을 반짝이던 청년은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형이 푸른 늑대예요?”
초롱초롱한 그 눈동자에 운현도 그만 웃음이 번져 나왔다.
“네. 그렇습니다.”
“편하게 말해요. 형이랑 할아버지는 좋은 냄새가 나거든요.”
‘냄새?’
운현이 의아해하는데 서린이 휘릭 몸을 날렸다.
탁.
그는 손빈 옆에 내려섰다.
그러곤 마검을 내려다보며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혈랑이에요? 모습은 달라졌는데 냄새는 여전히……. 우엑.”
서린은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코를 쥐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슬금슬금 뒷걸음까지 쳤다.
“형, 빨리…….”
손빈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잠시만 기다리렴.”
그는 마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쥐었다.
우우웅.
마검이 소리를 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검명과 전혀 달랐다.
마치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듯, 그 소리는 가련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후우우욱.
빛이 그의 손에 뿜어져 나왔다.
마검은 더욱 애달프게 울었지만 손빈은 주저하지 않았다.
콱.
그의 손이 강하게 쥐어졌다.
쨍.
마검이 거울 깨지듯 갈라졌다.
그리고 산산히 부서지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후드득.
파편이 이곳저곳에 흩날렸다.
손빈은 천천히 손을 폈다.
그의 손에 마검은 더 이상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끝났습니다.”
손빈이 운현을 보며 말했다.
그 미소는 무척이나 밝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