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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28화 (528/530)

외전 9화. 천외비처(天外秘處)(4)

운현은 죽은 일대상인의 시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가슴에 박혀 있던 작은 소검을 뽑았다.

슥.

피는 뿜어 나오지 않았다.

운현은 손에 든 작은 소검을 바라보았다.

칼날에 가득하던 선혈이 그의 눈앞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칼날이 피를 빨아들이는 듯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새 피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예식에나 쓰일 법한 매끈한 형상의 소검이 운현의 손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주게.”

문득 들린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사일천이 굳은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락.

그가 건네는 소검을 사일천은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끝이냐?”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객옹이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네.”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끝입니다. 다행히 시간 전에 맞출 수 있었군요.”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간 전이라니? 그럼…….”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우우웅.

나지막한 울림에 운현과 객옹은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운현과 객옹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사일천이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이 순간이 왔구나.”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냐? 일대상인의 죽음으로 끝이 아니란 말이냐?”

사일천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객옹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대상인이 말하지 않았더냐? 때가 이르렀다고. 그가 기다리던 때는.”

사일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바로 지금이다.”

그 눈빛은 낯설기 그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황궁의 학사도, 강호 무림의 신비인 일은도 아니었다.

객옹은 문득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과 전혀 다른, 이질(異質)적인 존재를 마주한 것에서 오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후우웅.

사일천을 주시하던 객옹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허공이 요동하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허공 그 자체가 떨고 있는 것이다.

마치 감당 못 할 무언가에 저항하듯 말이다.

하지만 그 저항은 길지 못했다.

훅.

가느다란 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휘장 사이로 비치듯 새어 나온 빛은 곧 안개처럼 흩어지며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객옹은 낯선 냄새를 느꼈다.

‘향?’

그것은 향(香)이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처럼 싱그럽고 청아한 향이 번져 가고 있었다.

객옹의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들끓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오랜 미망에서 지금 막 깨어난 것 같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무것도 없는 허공 사이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라락.

옷자락이 펄럭이고 하얀 너울이 허공에 휘날렸다.

비록 너울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냘프고 유려한 곡선은 상대가 젊은 여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선을 빼앗는 것은 바로 너울 아래 일렁이는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이었다.

사박.

그녀의 발끝이 땅에 닿았다.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은빛 머리카락도, 하얀 너울도 조용히 가라앉았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너울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객옹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대단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무언가 해 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객옹조차 긴장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진 사일천의 말은 객옹과 운현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

“어머니!”

“뭐라고?”

객옹은 자신도 모르게 말하며 사일천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사일천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여인 앞으로 다가갔다.

척.

그는 군례를 올리듯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뵙는군요. 어머니.”

사일천의 태도는 마치 주군을 대하는 신하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여인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사락.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사일천의 머리를 매만졌다.

마치 아이를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사일천을 매만지던 여인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고생했구나. 녹아야.”

사일천은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런데.”

여인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 앞에서 무릎 꿇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니?”

“아.”

사일천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도 예전이라 그만…….”

“그래.”

여인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구나. 사랑스러운 녹아가 이렇게 변할 정도로 말이야.”

그녀는 사일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했어. 정말로 고생했구나.”

사일천의 눈빛이 떨렸다.

그는 빙긋 웃음을 지었지만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는 그저…….”

“그래서 너를 위해 음식을 준비했단다.”

순간 사일천이 움찔했다.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아이가 나보다 나이 들어 보이게 할 수는 없지 않니? 게다가 머리색도 다시 되돌려야 하고.”

사일천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어머니. 혹시 그 음식을 직접…….”

“그래.”

여인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천의 표정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홍아도 이미 먹었어. 맛은 잘 모르겠지만 효과는 확실할 거야.”

“그, 그야 어머니께서 만드셨다면 당연히…….”

사일천은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했다.

객옹은 그의 눈동자가 공포로 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쩐지 통쾌한 마음에 객옹이 미소를 짓는데 여인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사락.

객옹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너울 너머로 마주친 시선만으로도 객옹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고수다.

그것도 객옹조차 감당 못 할 정도의 고수 말이다.

여인은 운현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말없이 쳐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객옹을 바라보았다.

“……당문?”

그녀가 물었다.

객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그립네.”

그것이 전부였다.

여인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객옹은 그제야 나지막이 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사일천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저, 어머니. 그 약은, 아니 음식은 나중에 천천히…….”

“안 돼. 먹는다는 것은 신성한 의식이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리고 사일천의 대답도 바로 튀어나왔다.

“네.”

고개를 숙이며 사일천이 말했다.

‘네’라는 말 대신 ‘존명’이라고 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켜보는 객옹은 쓴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저 여인이라면 사일천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으니까.

“어머니. 검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사일천은 자신의 검을 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공손히 여인에게 건넸다.

여인은 검을 받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물었다.

“내 소월(素月)은 도움이 되었니?”

“네. 충분히요.”

“그래, 다행이구나.”

사락.

여인은 손을 내밀어 검을 받았다.

그리고 운현과 객옹은 알 수 있었다.

이미 여러 번 보았던 사일천의 검이, 그 여인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완전히 다른 기운을 뿜어내는 것을 말이다.

외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느낌은 전혀 달랐다.

마치 두꺼운 휘장이 젖히고 이제야 본래의 모습을 본 것 같을 정도였다.

그녀가 소월(素月)이라 부른 소검은, 본래 이런 검이었던 것이다.

사일천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헌데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사일천이 막 무언가 말하려 할 때였다.

훙.

안개 사이로 또 다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박.

옷자락을 펄럭이며 한 사내가 내려섰다.

조금 전 떠돌았던 청아한 향이 더욱 짙어지고, 사내의 주위로 은은한 빛이 번져 갔다.

‘저 빛은!’

객옹은 이미 그 빛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운현이 공동파의 복룡복마전에서 뿜어냈던 서광(瑞光)이었다.

만마를 굴복시키고 올바름을 드러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상서로운 빛 말이다.

사락.

서광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때마침 들려온 사일천의 목소리는 객옹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아버지!”

객옹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라고?’

사내의 옷차림은 이국적이고 낯설었지만 아무리 봐도 그는 운현과 비슷한 연배였다.

도저히 사일천의 아버지 같지는 않지만, 옆의 여인을 어머니라 했으니 한편으로는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녹아야.”

사내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온화한 분위기가 주위를 감싸 안았다.

객옹은 그런 느낌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현이와 분위기가 무척이나 비슷하군.’

슥.

사일천이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났을 테니까 말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정(情)이 가득 담겨 있었다.

“수고했다. 어려움은 없었니?”

“크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슥.

사일천이 고개를 돌려 운현과 객옹을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들도 만났으니까요.”

“그러니?”

사내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운현과 객옹을 바라보았다.

슥.

사내가 손을 모으고 예를 표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손빈이라 합니다.”

운현은 급히 예를 표했다.

“아, 저는 운현입니다. 반갑습니다.”

객옹은 그저 슬쩍 고개를 끄덕인 것이 다였다.

손빈이라 밝힌 사내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새로운, ……시군요.”

한순간 잡음이 낀 듯 객옹은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운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미소 짓던 사내는 고개를 돌려 사일천을 바라보았다.

“마검은?”

“여기 있습니다.”

사일천은 운현에게 받았던 소검을 두 손으로 건넸다.

그 모습은 매우 정중했지만 동시에 소검을 매우 경계하고 있었다.

슥.

사내는 소검을 가볍게 손에 쥐었다.

“……빈 랑.”

말없이 서 있던 여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사내는 빙긋 웃었다.

“괜찮소.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니…….”

바로 그때였다.

꿈틀.

쓰러져 있던 일대상인의 시신이 경련했다.

운현은 물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대상인을 향했다.

머리가 터져 나간 일대상인의 시신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슥.

여인이 즉시 자신의 검, 소월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사내는 가볍게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했다.

“내가 하겠소. 부인.”

“네.”

여인은 즉시 검에서 손을 떼고 다소곳이 뒤로 물러났다.

아까 사일천을 대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사이 일대상인의 시신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꿈틀, 꿈틀

일대상인의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머리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팔과 다리조차 눌어붙은 듯 구분할 수 없어서, 마치 시커먼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대체 저게 무슨…….”

객옹이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사자소생일세.”

대답한 사람은 사일천이었다.

객옹이 돌아보자 사일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의 불완전한 깨달음이 스스로를 저렇듯 추악한 존재로 전락시킨 것이지. 저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네.”

그 말에 객옹은 일대상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스스로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존재라 했다.

하지만 운현은 ‘죽음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속인 것뿐이다’라고 답했다.

그건 이런 상황을 이미 알고 한 대답이었을까?

객옹이 흘깃 운현을 바라보았지만 운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아니 처연한 눈빛으로 한때 일대상인이었던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슥.

손빈이라 했던 사내가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안개가 흔들리고 강렬한 진동이 전해 왔다.

그 진동에 일대상인이었던 것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끄어어어어.

입도 없는데 괴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오싹한 한기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마치 무저갱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그 소리는 슬픈 후회 같기도 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집요한 욕망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욱.

그때 안개를 가르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도 크고 장대한, 마치 태산과도 같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년의 사내.

팔뚝까지 드러나는 무복을 입은 그의 등에는 자신만큼이나 크고 거대한 대도가 걸려 있었다.

쿵.

사내가 발을 디뎠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바람이 변했다.

짙은 눈썹 아래 보이는 그의 강렬한 눈빛은 마치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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