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천외비처(天外秘處)(3)
황궁, 창룡전.
아침에 출근한 운현은 언제나처럼 하루의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날마다 기록하는 일지를 적고 혹시 연락이 온 것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 운현은 서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 빙설과 한 비무가 여전히 눈앞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빙설 여협의 그 한 수는…….’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흘렸다.
“정말이지 대단했어.”
평소에도 빙설의 무공은 독특하고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북해의 무공은 강호 무림의 일반적인 상식이나 체계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빙설이 보여 준 무공은 더욱 놀랍고 파격적이었다.
후우우욱.
빙설은 하늘 높이 검을 들어 올린 채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고 옷자락이 미친듯이 펄럭였다.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빙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츠즈즈즈즈.
허공에서 서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눈송이 같았지만, 곧 그것은 커다란 얼음 조각으로 변해 갔다.
날카로운 끝을 번쩍이는 얼음 칼날로 말이다.
그 수는 벌써 십여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우웃!”
지켜보던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얼음 칼날들이 나타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모양도 거칠고 크기도 제각각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열 개가 넘는 얼음 칼날들이 운현을 향해 날카로운 끝을 번뜩이고 있었다.
‘나라면…….’
전임 가주와 절정고수 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저런 절기를 선보일 수 있을까?
저 얼음 칼날들을 과연 막아 낼 수 있을까?
아무리 빙설의 내력이 북해의 한빙기공에 기반하고 있다지만 저건 결코 아무나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놀랍군요.”
운현이 탄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의 빙설이라면 자부심에 눈을 빛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 자신의 내력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이 더운 여름이었다면 얼음 칼날을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 이미 탈진하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녀의 의식은 당장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반드시 보여 주고 싶은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었다.
으득.
빙설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검을 내리그었다.
쉭.
그 순간 허공에 떠 있던 십여 개의 얼음 칼날들이 일시에 운현을 향해 쏘아져 갔다.
콰과과곽.
절정고수들은 물론이고 객옹마저 눈썹을 움찔했다.
평소 빙설이 소검 두 자루를 자유자재로 날리던 것과 같은 방식이지만 그 파괴력은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빙설이 치른 대가 또한 컸다.
얼음 칼날들이 운현을 향해 날아드는 동시에 빙설은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십여 개의 얼음 칼날들은 이미 운현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운현은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은 상대에 대한 경의와 함께, 강렬한 호승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웅.
운현의 검, 미명이 나지막이 검명을 흘렸다.
“으음.”
운현은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너무했나?’
짓쳐 들던 십여 개의 얼음 칼날은 운현의 검 앞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
빙설의 절기에 놀라던 사람들이 경악을 넘어 허탈해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운현 역시 강렬한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전력을 쏟아 냈으니 말이다.
이후 빙설은 한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만일 그 자리에 객옹이 있지 않았더라면 빙설은 꽤나 심각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때 이렇게 했다면…….’
이런저런 검식들을 떠올리며 운현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응?”
운현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누군가의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탁탁탁.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발소리의 주인을 이미 알아차린 까닭이다.
“운 학사님?”
밖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게.”
슥.
박 공공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역시 계셨군요.”
붉은 태감의를 입은 박 공공이 창룡전으로 들어왔다.
서탁에서 일어난 운현은 박 공공을 향해 걸어갔다.
“어쩐 일인가? 바쁠 텐데.”
“바쁘면 안 되지요.”
박 공공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제가 할 일이 없어야 나라가 평안한 것이니까요.”
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박 공공의 말이 옳았다.
박 공공이 나서야 할 정도라면 육부의 관리와 고위 환관들도 처리하지 못한 문제라는 뜻이니까.
“어쨌든 잘 왔네. 차라도 한잔하겠는가?”
“좋지요. 아, 그러고 보니…….”
박 공공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문연각 쪽에 작은 탁자가 놓여 있던데, 그리로 가시겠습니까?”
“문연각 쪽에?”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이 그쪽으로 지나왔지만 작은 탁자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건 못 봤는데.”
“그사이에 누가 가져다 놓았나 보지요. 어쨌든 여기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창룡전보다야 바깥이 더 좋다.
이제 슬슬 날씨도 풀리고 있으니 말이다.
“좋네. 가세.”
운현은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었다.
서 있던 박 공공이 얼른 달려와 작은 화로를 챙기고, 두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창룡전을 나섰다.
박 공공이 말한 탁자는 문연각이 보이는 작은 나무 그늘 아래 놓여 있었다.
본래 나무가 없는 외조(外朝)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라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것도, 문연각 앞의 네모반듯한 연못이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달칵.
박 공공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얼마 전에 태자 전하께서 일아영 소저를 만나셨지 않습니까?”
“자네가 말해 주었지 않은가?”
운현의 대답에 박 공공이 빙긋 웃었다.
“일아영 소저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더군요.”
“전하께서?”
“네. 총명하고 활기가 넘치는 아가씨라 하시는데, 아주 기뻐 보이셨습니다.”
운현은 찻잔을 매만졌다.
“실은 아영이도 내게 서찰을 보냈다네.”
북경에 올라온 일아영은 운현에게 서찰을 보내기 위해 창룡맹 북경 지부를 직접 방문했다.
혹여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노출될까 싶어서였다.
일아영은 자신의 서찰이 항주 총단으로 가리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 서찰은 북경에 있는 운현에게 즉시 전달되었다.
“자네와 ‘호군(濠君)’이라는 공자를 만났다고 하더군.”
호군(濠君)은 황태자가 운현을 만났을 때도 썼던 이름이다.
박 공공은 눈을 빛냈다.
“그리고 무엇이라 하시던가요?”
운현은 슬쩍 헛웃음을 흘렸다.
“호 공자가 아무래도 황족인 것 같다고 했네.”
호군이라는 이름 정도로 신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일아영은 제법 눈썰미가 좋기 때문이다.
“설마 황태자 전하를 알아보았단 말인가요?”
“그건 아니네. 아마 황족 중에 황위와 연관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냐고 하더군. 딱히 어려움도 없지만 할 일도 없는 황족 말일세.”
사실 일아영이 쓴 내용은 더 과격했다.
황위와 거리가 먼 황족은 그냥 형편 좋은 한량이나 다름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하긴 황족 중에 그런 분이 안 계신 것도 아니지요.”
박 공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아영의 짐작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황위와 무관한 황족들은 조용히,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하지만 황족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종교에 귀의하거나 혹은 신분을 속이고 외부 활동을 하기도 한다.
물론 정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말이다.
동창 역시 그것을 알지만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대부분 눈감아 주었고 일이 터지는 경우에는 뒤처리를 해 주기도 했다.
그러니 황족이 신분을 감추고 상단의 일에 나서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요? 또 무어라 하시던가요?”
“그게……, 기특해 보였다더군. 황족인데도 무언가 해 보려는 마음이 좋아 보였다고.”
황위와 거리가 먼 황족은 놀고먹으며 세월이나 보내도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호 공자라는 황족은 조금 달랐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상단의 일을 물어보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무언가 하려는 듯 말이다.
그 모습에 일아영은 호감이 갔다.
본래 그녀는 능력 없는 사람은 용서해도, 놀고먹는 사람은 절대 봐주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황족이라는 거부감은 사라지고 일아영도 진지한 자세로 상단의 일을 호 공자에게 알려 주었다.
마치 그의 선친인 일충현이 운현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듯 말이다.
“풋.”
박 공공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네요. 전하를 기특하다고 말씀하신 분은 일 소저가 처음이겠는데요?”
웃던 박 공공은 찻잔을 들며 말했다.
“그래서 전하께서 더욱 마음에 들어 하신 것이로군요. 그분은 가식을 싫어하시거든요.”
“박 공공.”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혹시…….”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박 공공은 나지막이 말했다.
“태자비께서는 건강하시고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들일 비빈들도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다음 하늘이 되실 분의 옆자리가 어찌 간단히 바뀌겠습니까?”
“그렇군.”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 반응이었다.
“허나 황태자께서 보위에 오르시고 흔들림 없는 체제를 갖추시고 나면 사정은 바뀌겠지요.”
차를 음미하며 박 공공은 여유롭게 말했다.
“그때는 가문도, 정치적 계산도, 현 황상의 뜻도 아닌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황후가 되는 것입니다.”
권력 기반을 다진 황제의 뜻은 절대적이다.
오직 황제 한 사람의 의지에 따라 황후가 바뀌고 비빈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 황제가 될 사람이 바로 지금의 황태자다.
“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빨리 아영이를 잊으시기를 바라야겠군.”
“글쎄요?”
박 공공은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원래 젊은 때의 사랑은 잊지 못하는 법 아닌가요? 게다가 이루지 못한 사랑은 나이가 들수록 더 미련이 남게 되지요.”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영이는 황궁의 일에 얽히지 않았으면 했건만…….”
의형 일충현의 죽음을 운현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자신은 비록 창룡전에 들어와 있지만, 일아영은 가능한 황궁이나 무림과 상관없이 살았으면 했다.
“뭐, 연애와 자식 문제는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들 하니까요. 그냥 포기하십시오. 적어도 일아영 소저의 뜻에 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할 테니까요.”
청산유수 같은 박 공공의 말에 운현은 혀를 내둘렀다.
“자네는 그런 걸 잘도 아는군. 누가 들으면 세상을 몇 번쯤 살아본 사람인 줄 알겠네그려.”
박 공공은 웃음을 흘렸다.
“황궁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들리는 게 많아서요. 아, 참.”
찻잔을 내려놓으며 박 공공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말씀 안 해 주셨는데요? 그 일대상인을 해치우실 때 말입니다.”
“아, 그것 말인가?”
운현은 찻잔을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오래지는 않았다.
“사실 이건 나와 객옹 어르신만 아는 것이네만……. 말해도 누가 믿어 줄까 싶어서 말이네.”
운현은 슬쩍 박 공공을 바라보았다.
박 공공의 눈은 이미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이들을 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