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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26화 (526/530)
  • 외전 7화. 천외비처(天外秘處)(2)

    황궁을 나선 운현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내성을 지나 대로에 이르자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제법 좋은 마차였지만 이곳 북경에서라면 오히려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마차였다.

    달칵.

    운현은 문을 열고 마차에 올랐다.

    벽과 지붕 대신 긴 휘장을 친 마차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각, 다각.

    마차는 대로를 따라 거침없이 길을 재촉했다.

    화려한 북경의 번화가와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역을 지나, 운현이 탄 마차는 곧 북경 외곽의 주택가로 들어섰다.

    넓은 정원 사이로 크고 고풍스러운 저택들이 간간이 보이는 이곳은 주로 지방의 부호나 권세 있는 자들이 소유하는, 그러나 정작 살지는 않는 지역이었다.

    지금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각, 다각.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던 마차는 곧 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운현은 마차를 내렸다.

    탁.

    정문 앞에 서 있던 하얀 머리의 늙은 노복이 운현을 향해 공손히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저는 운현입니다.”

    운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늙은 노복은 미소를 머금었다.

    “맹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곽 노라 불러 주십시오.”

    노복은 정중하게 말했다.

    “이리로 오시지요.”

    운현은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벅.

    저택은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주택가 한복판인데도 새소리가 들려왔고, 고풍스럽고 단아한 저택의 조경은 북경의 주택가가 아니라 한적한 휴양지에라도 온 것 같았다.

    저벅, 저벅.

    흰머리의 노복은 운현을 저택 후원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벅.

    “오, 어서 오시오. 맹주.”

    후원에 들어서자마자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바로 제갈세가의 군자검 제갈명이었다.

    옆에는 철검 남궁벽과 비검 공손월, 그리고 관일검 모용단천의 모습도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일찍들 오셨군요.”

    운현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표했다.

    서로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제갈명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주 자리를 물려주었더니 할 일이 없지 않겠소? 북경도 오랜만이고 해서 바로 왔소.”

    “할 일이 없다니 부럽소이다.”

    옆에 앉아 있던 비검 공손월이 나지막이 말했다.

    “공손세가는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데 말이오.”

    한때 가세가 크게 기울었던 공손세가는 창룡맹 개파대전 이후 빠르게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고 있었다.

    잠시 중단되었던 본가의 재건도 다시 시작되어서, 공손세가는 대단히 바쁘고 분주했다.

    “세가가 바쁜 것이지, 비검께서 바쁜 건 아니지 않소?”

    제갈명의 지적에 공손월은 당연한 듯 말했다.

    “그야 당연하오. 나는 이제 가주가 아니니까. 물러났으면 확실히 비켜 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소?”

    공손월은 운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맹주. 모용 소저가 맹주를 계속 기다리더군.”

    “비, 비검님.”

    모용미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지만 이미 말이 나온 다음이다.

    운현은 웃으며 모용미에게 말했다.

    “기다리게 했군요. 제가 지부로 가서 함께 올 걸 그랬나요?”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모용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냥 일찍 나섰어요. 일도 빨리 끝났고, 이곳도 궁금하고 해서요.”

    이 저택은 천하제일루의 누주인 월향이 준비한 곳이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과하지 않은 조경과 단아하게 서 있는 정자, 그리고 세심하게 마련된 탁자와 의자들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정말 좋은 곳이네요.”

    모용미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멋진 것들을 모은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후원의 모습은 이곳을 준비한 월향의 미적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문득 들린 낭랑한 목소리에 모용미는 고개를 돌렸다.

    사박.

    화사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바로 천하제일루의 누주, 월향이었다.

    “감사합니다. 모용 소저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되네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월향이 말했다.

    “아, 누주님.”

    운현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월향은 가만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사로 수를 놓은 옷자락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 우아한 자태는 예인이라기보다 마치 황궁의 귀인 같았다.

    사박.

    발걸음을 멈춘 월향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귀하신 분들께 월향이 인사드립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머리에 달린 작은 장식들이 반짝였다.

    천수 신니는 미소를 머금었다.

    “자네는 볼 때마다 더 아름다워지는군. 과연 천하제일루의 누주일세.”

    화산의 태을 진인도, 무당의 청송 진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월향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한 월향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객옹이 노부인 능세영과 함께 앉아 있는 자리였다.

    사박.

    월향은 객옹에게 다가갔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월향이 예를 표했다.

    객옹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보러 온 것이 아니니 고마워 할 것 없다.”

    월향은 웃음을 흘렸다.

    “알고 있어요. 허나 어르신이 아니셨다면 저도, 천하제일루도 없었겠지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월향이 천하제일루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객옹의 말 덕분이었다.

    그녀에겐 정말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객옹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너를 도우려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현이다. 나는 그저 떠오른 바를 말했을 뿐이니 내게 은혜를 입었다 생각지 마라.”

    “네, 어르신.”

    미소를 지으며 답한 월향은 공손히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그녀는 운현 옆으로 다가왔다.

    “마음에 드시나요?”

    월향의 물음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좋은 곳이군요. 그런데 북경에 이런 저택이라니, 무리하신 것 아닙니까?”

    “무리라니요.”

    월향은 가만히 웃었다.

    “맹주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이곳은 앞으로 ‘예월’의 지부가 될 예정이기도 하니까요.”

    월향은 천하제일루의 누주이자 예월의 수장이다.

    어려운 예인들을 은밀히 돕는 예월의 활동에 북경은 빠뜨릴 수 없는 지역이었다.

    “이곳을 맡길 예인을 따로 세우려 해요. 그때가 되면 한번 찾아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월향은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

    “월주께서 처음 세우신 뜻처럼, 어려운 예인들을 도우세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운현의 대답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월향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막 무어라 말하려던 때였다.

    사박.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에 운현이 눈을 돌렸다.

    그리고 후원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한순간 주위가 환해지는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와 차가운 얼음 같은 분위기를 가진 그녀는 바로 북해의 대궁주였다.

    그녀의 뒤를 무표정한 빙설이 언제나처럼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사박, 사박.

    후원으로 들어선 대궁주는 발을 멈췄다.

    사락.

    일행의 시선 속에 대궁주는 정중히 예를 표했다.

    고개를 든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제가 조금 늦었나 보군요.”

    “아닐세. 우리가 빨리 온 것이지.”

    노부인 능세영이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시게. 드디어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셨군그래.”

    그 말에 모두의 눈길이 일제히 빙설에게 향했다.

    ‘또 다른 주인공’이라는 말은 정확했다.

    전임 가주들과 장로들, 그리고 절정 고수들의 경쟁 끝에 창룡검주 운현과 비무를 하기로 결정된 사람이 바로 빙설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두 번이라니. 불합리하군.”

    군자검 제갈명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빙설은 이미 운현과 비무를 한 적이 있다.

    그런 그녀가 또 다시 운현을 상대할 권리를 쟁취한 것이다.

    “이기시면 되지 않소?”

    철검 남궁벽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인은 결과로 말하는 법이니, 군자검께서 이기신다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오.”

    제갈명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무인의 대결은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게다가 창룡검주 운현을 상대하는 것은, 객옹과의 비무에 버금갈 정도로 모두가 원하는 것이다.

    싸워서 그 권리를 쟁취한 빙설에게 아무리 불합리하다고 말한들 양보할 리가 없었다.

    빙설이 운현의 검에 얼마나 집착하는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월향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우아한 자태로 예를 올린 후 월향은 후원에서 물러갔다.

    운현이 감사의 인사를 잊지 않았지만, 월향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월향을 배웅하고 운현이 몸을 돌릴 때였다.

    사박.

    어느새 대궁주가 옆에 서 있었다.

    “아, 대궁주님.”

    “저는 다시 북해로 떠나려 해요.”

    “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북해빙궁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것이 얼마 전인데, 다시 떠난다니 말이다.

    대궁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여름이 되면 돌아올 테니까요. 약속한 대로요.”

    “아,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초봄이니 여름이면 금방이다.

    약속까지 한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곧 돌아온다니 다행이었다.

    “당분간 북해일문은 삼궁주가 맡을 거예요. 그리고 빙설도 저와 함께 돌아가요. 하지만 돌아올 때는 북해십이비 전부와 함께겠지요.”

    운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빙설이 보여 주는 북해의 무공은 이곳과는 다른 독특한 면이 있었다.

    그런 북해의 무공을 더욱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운현이 눈을 반짝이고 있는 것이다.

    대궁주는 가만히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운현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눈동자로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궁주는 말했다.

    “겨울에 오겠다는 약속도 잊지 마세요.”

    올겨울에 당장 가겠다는 의미로 했던 말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밝은 목소리로 운현은 말했다.

    “다들 기뻐하시겠군요. 북해빙궁이라면 어르신들 모두 흥미로워 하시겠지요.”

    대궁주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금방 사라졌다.

    “네.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거예요.”

    운현은 흠칫했다.

    그 말이 어쩐지 예전의 대궁주를, 무언가 음험한 계략을 꾸미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궁주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운 공자! 비무는 언제 시작하는가?”

    어느새 다가온 금화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가 합류한 금가장은 일약 호남성의 신흥 무가로 떠올랐다.

    오랜 역사를 가진 금가장에 ‘신흥’이라는 단어는 사실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금화영의 무공과 창룡맹의 이름이 더해진 금가장은 하루가 다르게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병약했던 금혜린의 총명한 조언은 물론이고, 호암상단의 든든한 후원 역시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천천히 시작하지요.”

    운현의 말에 금화영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당장이라도 비무를 보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듯 좋은 날에 급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조금 천천히 해도 충분하겠지요.”

    예전에는 몰랐다.

    의형 일충현에게 무공을 배울 때는 그저 하나라도 더 빨리 익히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만일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의형과 이야기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감정과 마음에 공감해 주었을 것이다.

    그때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

    자그마한 그 시간들이 너무나도 귀하다는 것을, 이렇게 가슴 아플 정도로 그리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어, 음……. 그, 그러세.”

    금화영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운현은 시선을 돌렸다.

    전임 가주들과 장로들이 담소를 나누고, 아름다운 대궁주와 단아한 모용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객옹은 언제나처럼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옆에 앉은 노부인 능세영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아.”

    운현은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해가 저물어 가는 하늘이 아름다운 빛을 온 세상에 뿌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미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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