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천외비처(天外秘處)(1)
항주, 창룡맹 총단.
창룡맹 총단의 정문은 늘 열려 있었다.
사람과 물자가 쉼 없이 왕래했고, 온갖 용건과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천하 각지에서 이곳을 찾아왔다.
그래서 창룡맹 총단에서 일하는 이들은 항상 바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창룡맹은 군림하지 않는다지만, 강호 무림과 연관된 사람들은 언제나 창룡맹을 의지하고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마치 하늘이 세상을 말없이 굽어보듯 말이다.
“일은 끝났소?”
문사 차림의 덩치 큰 청년이 말했다.
그는 창룡맹 서기, 안수재였다.
“끝이 다 뭐요. 지금부터 다시 시작인데.”
깔끔한 인상의 문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는 과거 무림맹의 서기였던 편어두였다.
“아는 사람의 부탁이라서 상단 일까지 때려치우고 왔더니, 너무 일이 많은 것 아니오?”
“그래도 월봉은 많이 주잖소?”
옆에 있던 조두식이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시간이 끝나면 무조건 퇴근이고. 상단 일보다야 훨씬 낫지 않소? 그때처럼 신분을 감출 필요도 없고 말이오.”
편어두는 인상을 썼지만 반박하지는 못했다.
상단 소속인 그가 신분을 감추고 무림맹 서기로 들어왔던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안 형도, 조 형도 마찬가지잖소.”
신분을 감춘 사람은 편어두만이 아니었다.
사실 조두식은 다른 거대 상단 출신이었고 안수재는 무려 관의 소속이었다.
무림맹의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서기로 들어온 것인데, 그 기간에 운현과 친분을 쌓은 것이 문제였다.
창룡맹의 맹주가 된 운현이 그들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총군사 영호준이 자신을 찾아왔던 그 순간을 편어두는 잊을 수가 없었다.
―순순히 제 일손……, 아니 맹의 서기가 되어 주신다면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편어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창룡맹 총군사 영호준이 마음만 먹는다면 편어두 정도는 상단에서 내쫓기고도 남을 테니 말이다.
조두식과 안수재 역시 신분을 감췄음을 확인한 것도 그때였다.
어차피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기에 놀라진 않았다.
가장 비밀이 많아 보였던 운현이야말로 실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말이다.
“그렇게나 일이 많으면 좀 편한 곳으로 옮겨 달라 하시오. 자그마치 맹주님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 아니오?”
안수재의 말에 편어두는 얼굴을 구겼다.
“만날 수가 있어야 청탁이라도 하지 않겠소? 맹주님은 처음에 얼굴 한 번 본 게 다요. 아니, 그리고 대체 당문의 눈꽃께서는 왜 여기 있는 거요? 무서워서 총군사를 만날 수가 없지 않소?”
총군사 영호준 옆에는 언제나 당설련이 있었다.
당문의 눈꽃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그녀의 독한 성정은 무림맹 시절부터 이미 유명했다.
소심한 편어두로서는 그녀와 마주치는 것조차 무서울 정도였다.
“대외총괄이신 모용 소저께서 계실 때는 좀 편했는데…….”
편어두가 한탄하듯 말했다.
대외총괄 모용미는 총단의, 아니 항주의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인기인이었다.
그녀의 온화한 태도와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뛰어난 업무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였다.
“북경 지부로 가셨던가?”
안수재의 말에 편어두는 한숨을 쉬었다.
“가셨소. 그 추운 북경으로. 그것도 갑자기 말이오.”
창룡맹에 많은 여협들이 드나들지만 모용미 같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예의 바른 사람은 없었다.
낙담하는 편어두의 등을 안수재가 웃으며 두드렸다.
“어쨌거나 여기가 월봉은 많이 주지 않소? 얼른 마감하고 술이나 한잔합시다. 그 유명한 소월이 취선루에서 연주를 한다니까.”
편어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옆에 있던 조두식은 반색을 했다.
“오, 소월 말이오? 참으로 오랜만이로군. 얼마 전엔 황궁의 창음각에서 공연을 했다던데.”
본래 취선루에 속해 있던 소월은 창룡맹 개파대전에서 놀라운 연주를 선보였다.
수많은 귀빈들이 그녀의 연주에 감동받았고, 소월의 이름은 곧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후 천하제일루로 옮긴 소월은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았으며 심지어 황궁에서까지 연주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번 소월의 연주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분명했다.
천하에서 이름난 남경 천하제일루에서도 그녀를 보기란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편 형은 안 갈 거요?”
안수재의 말에 편어두가 늘 그렇듯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안 간다는 말은 안 했소만.”
그 말에 조두식과 안수재가 웃었다.
두 사람의 작은 웃음 속에, 창룡맹 총단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황궁, 창룡전.
창룡전에는 정해진 출근 시간이 없었다.
조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감독하는 상급 기관조차 없지만 누구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본래 창룡전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아니 아예 잊혀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창룡전도 몇 가지 변화를 맞이했다.
첫째는 출퇴근 시간이 생긴 것이다.
그래 봤자 유일한 학사인 운현이 창룡전에 들어서는 때가 출근 시간이고 나서는 순간이 퇴근 시간이긴 해도 말이다.
하지만 성실한 운현의 성격 덕분에, 유명무실할 것 같은 창룡전의 출퇴근 시간은 비교적 성실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사락.
운현은 책장을 넘겼다.
이전에 읽었던 경서지만 세상을 겪은 지금은 보이는 것이 크게 달랐다.
예전 같으면 ‘너무나 당연한 말을 왜 이리 길게 하나?’ 싶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당연한 일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던 참담한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위대한 성현들께서 세상 속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고 말이다.
“응?”
책장을 넘기려던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창으로 들어오던 햇살은 이미 한낮의 기세를 잃었고 창룡전 내부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운현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불을 밝히고 독서를 계속해도 되겠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다.
때마침 퇴근할 때도 된 지라 운현은 독서를 중단하기로 했다.
탁.
책을 덮으며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퇴근 시간이 되었다는 건 기쁘군.’
운현의 일과는 단순했다.
창룡전에서 책을 읽다가 가끔 공터에 나가서 백호수련검을 펼치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여유로운 근무라 해도 퇴근은 기뻤다.
평소 총군사 영호준이 왜 그렇게도 퇴근하고 싶어 했는지 절로 납득이 될 정도였다.
달칵.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탁을 정리한 운현은 의관을 정돈하고 간단한 소지품을 챙겼다.
그리고 창룡전을 나섰다.
저벅.
운현의 발걸음은 곧장 북문을 향하고 있었다.
창룡전에 생긴 두 번째 변화는 바로 운현이 궁 밖에 정식으로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었지.’
운현은 잠시 추억에 잠겼다.
장원급제한 운현이 학사로 임명받고 하려 했던 일은 바로 북경에 보란 듯 집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도 당시 머물던 객잔이 너무나도 최악이었던 탓이겠지만, 그 소원을 이루는 데 이토록 오랜 세월이 걸릴 줄은 누가 알았으랴?
‘뭐, 어쨌거나 이루었으면 된 것이지.’
운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북문이 가까워 오자 문을 지키는 금의위가 보였다.
황궁을 출입하는 것은 간단치 않았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궁성을 나서면 깊은 해자가 나오고, 넓은 돌다리를 지나면 다시 내성 성벽이 나온다.
그 모두를 무사히 지나야만 황성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운현이 다가가는 북문만 해도 금의위 위사와 교위 들이 살벌한 눈빛으로 지키고 서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조금도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멈춰라.”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젊은 위사가 무서운 눈빛으로 운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데 함부로 이곳을 나서려 하느냐? 당장 물러나서 신분패를…….”
“멈추게.”
위사의 말을 끊은 사람은 금의위의 교령이었다.
금의위 위사를 통솔하는 교위, 그리고 그보다 상급 무관인 교령은 북문의 수비를 관할하는 총책임자였다.
중년의 교령은 운현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실례했습니다, 운 학사님.”
교령은 무서운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위사의 첫 임무라 운 학사님을 알아보지 못했나 봅니다. 지금 퇴청하십니까?”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등청을 안 했는데 어찌 퇴청을 하겠습니까? 할 일도 끝났기에 퇴근하는 중입니다.”
“그러시군요.”
교령은 휘하 위사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신분패는 보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통과하시지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운현은 그렇게 말하며 처음 말했던 위사를 돌아보았다.
위사는 대체 무슨 상황인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사고를 쳤다는 낭패감에 표정이 굳고 있었다.
“운 학사님의 신분은 제가 이미 알고 있거늘 어찌 신분패를 보이라 하겠습니까? 개의치 마십시오.”
교령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자신이 신분패를 꺼내면 괜히 일만 커질 것이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운현은 교령에게 예를 표했다.
교령 역시 정중하게 답했다.
“살펴 가십시오. 운 학사님.”
“네. 수고하십시오.”
운현은 그대로 북문을 지나쳤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지날 때는 예전에 이곳에서 박 공공과 이별했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 감상에 젖기도 했다.
하지만 곧 운현은 발길을 재촉했다.
그의 뒷모습이 내성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교령은 눈을 떼지 않았다.
“저기, 저분은 누구십니까?”
위사의 목소리는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중년의 교령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창룡전의 학사시네.”
“학사요?”
위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금의위의 표본과도 같은 교령이 정중히 예를 표하는 상대가 학사라는 말도 놀라웠지만 창룡전이라는 이름은 더욱 생소했다.
자금성의 모든 궁과 대전, 전각의 명칭을 외우고 있는 위사도 처음 듣는 곳이었다.
“창룡전이 대체 무슨…….”
“모르는 것이 좋네.”
교령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위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 황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말일세. 내 말 알겠나?”
교령의 눈빛은 어느새 살벌하게 변해 있었다.
그건 황궁의 안위를 수호하는 비정한 금의위의 눈빛이었다.
위사는 움찔했다.
하지만 그 역시 금의위다.
“……알겠습니다.”
황궁은 복마전이고 쓸데없는 호기심은 명을 단축시킬 뿐이다.
위사는 곧 창룡전에 대한 궁금증을 덮어 버리고 임무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운 학사’를 잊는 일은 없을 터였다.
슥.
교령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운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아직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큰일 날 뻔했군.’
교령의 생각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황궁에는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절대의 권력을 쥔 황제와 다음 하늘이 될 황태자, 그리고 두 사람의 전적인 신임과 함께 환관 조직과 관료 조직을 장악한 동창 병필태감 박 공공.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바로 창룡전의 학사, 운현이다.
예전에 창룡전은 잊혀진 곳이었다.
그 존재를 알게 된 이들도 내막을 듣고 나서는 대놓고 창룡전을 무시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창룡전을 잊는다.
그 존재를 말하지 않으며 근처로 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특히 고관대작들처럼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천하의 그 누구라도 감히 용의 역린을 건드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오죽하면 육부의 최고 관리들 사이에서 ‘개시장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창룡전을 건드리지 말라’는 조언이 은밀히 나돌 정도일까?
“후우.”
교령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늘 위의 하늘이라는 이곳 자금성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天外秘處], 그곳이 바로 창룡전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운현이 온 이후 일어난 창룡전의 또 다른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