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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24화 (524/530)

외전 5화. 후일담(5)

고요한 달빛 아래, 운현과 대궁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밤의 세상은 조용히 잠들어 있어서, 이 세상에 두 사람만 깨어 있는 것 같았다.

사박.

“……그렇게 해서 독고 제의 가족을 무사히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잠든 이들을 깨울까 염려하듯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대궁주는 문득 예전 북해로 가기 위해 황야를 지나던 때를 떠올렸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라곤 정말로 운현과 자신을 포함한 한 줌의 사람만 있던 때 말이다.

“사실 독고 제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리려 했습니다. 굳이 모용진 대협께 오시라 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갑작스러운 부고가 그들에게 충격을 줄까 염려해서요.”

사박.

발걸음을 옮기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저 때문에 그들이 독고 제를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렇지 않아요.”

조용한 목소리로 대궁주가 말했다.

“북해에서는 한 사람의 전사를 구하기 위해 수십 명의 전사들이 목숨을 거는 일도 흔해요. 한 사람과 여러 사람을 저울질하지도, 손익을 계산하지도 않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전장을 헤쳐 온 자들이니까요.”

사락.

대궁주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달빛 아래 반짝였다.

“그러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독고 대협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게다가 그를 죽인 사람은 인태상이었지, 결코 당신 탓이 아니었어요.”

운현은 가만히 대궁주를 바라보았다.

“허나 제가 생명을 빚졌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를 구하기 위해 독고 제가 죽었다는 사실도요.”

“그 빚은.”

똑바로 운현을 바라보며 대궁주는 말했다.

“당신의 삶을 통해 갚을 수밖에 없어요. 독고 대협의 희생이 가치 있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니까요.”

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네. 그래야겠지요.”

그의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대궁주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누군가의 삶이 가치 있다 해도, 과연 한 사람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인지는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독고랑도 그것을 생각하거나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저 운현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을 뿐이니까.

운현의 슬픈 눈동자 앞에서 대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때에 운현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북해로 오지 않겠어요?”

대궁주가 말했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저는…….”

“북해는 혹독하지만 아름다운 곳이에요. 차가운 겨울이 오면 사람들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따뜻한 여름이 되면 대초원을 달리며 사냥을 하지요. 당신은 푸른 늑대이니, 북해의 모든 이가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할 거예요.”

사락.

대궁주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일렁였다.

운현을 바라보며 대궁주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요.”

달빛 아래 대궁주의 눈동자는 매혹적이었다.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변하셨군요.”

“네?”

“이전의 대궁주셨다면 북해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겠지요.”

“그건…….”

대궁주는 살짝 당황했다.

운현의 지적은 옳았다.

“겨울이 되면 가겠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친구는 어려움의 때에 더욱 필요하니까요. 설령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밖에는 못해도 말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었지만 대궁주의 표정은 살짝 복잡했다.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무래도 운현에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듯했기 때문이다.

“……후우.”

대궁주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 반응에 운현이 당황하는데 대궁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좋아요. 그렇다면 여름엔 제가 오면 되겠네요.”

운현은 눈을 껌뻑였다.

북해일문의 문주인데 여름에 오겠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 이름, 기억하시나요?”

대궁주가 물었다.

운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대답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건 그녀에게 반드시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비록 대궁주는 알지 못하겠지만.

“좋아요.”

대궁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네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운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대궁주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꽃들로 가득한 북해의 대초원을 마주한 듯, 숨 막히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

다음 날, 대궁주는 운현 일행을 아침 식사에 초청했다.

그녀가 돌아온 것을 모르던 모용미는 놀라면서도 흔쾌히 응했고, 객옹은 물론 나중에 합류한 모용진 역시 기꺼이 함께했다.

북해일문에서는 대궁주와 삼궁주, 그리고 사람 좋은 인상의 총관이 나왔다.

정갈한 음식으로 가벼운 아침 식사를 나눈 후, 일행은 향긋한 차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았다.

달칵.

대궁주가 찻잔을 들었다.

“이제 독고 대협의 유족을 찾으셨으니.”

찻잔을 쥔 채 그녀가 운현에게 말했다.

“어찌하시려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이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독고랑의 유족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준 사람이 그녀였고, 그녀라면 이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모용미는 어쩐지 위화감을 느꼈다.

그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다기보다는, 운현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연히 유족분들의 뜻이 최우선입니다만.”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일단은 모용세가에 그분들을 의탁할까 합니다. 모용세가라면 충분히 그분들을 보호할 수 있고, 무엇보다 제가 신뢰할 수 있는 분들이니까요.”

모용미와 모용진을 돌아보며 운현이 미소를 지었다.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모용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 아이들이라면 상아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오라버니께서도 칠부라는 아이를 벌써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걸요.”

청풍검 모용진은 독고랑의 동생, 칠부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칠부가 원한다면 기꺼이 모용세가의 제자로 맞이할 터였다.

“감사합니다. 폐를 끼치는군요.”

운현의 말에 모용미는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요. 독고 대협의 일이라면 저희도 언제든 원하는 바예요.”

모용미의 눈빛은 운현을 향한 신뢰가 가득했다.

“그렇군요.”

대궁주가 차를 음미하고는 말했다.

“하지만 조금 의외네요. 독고 대협의 유족이라면 맹주님께서 직접 나서시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운현에게 독고랑의 의미는 각별하다.

칠부에게라면 운현이 직접 무공을 가르쳐 주는, 상상 못 할 파격조차 이상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만.”

운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창룡검주라는 명호가 그 아이들에게 또 다른 짐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룡검주라는 명호는 온 강호 무림에 쟁쟁했다.

이제껏 그가 이루어 온 일들은 물론이고, 개파대전에서 보여 주었던 무시무시한 기세는 그를 절대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조정의 실권자인 박 공공이 뒤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모두가 보았으니, 창룡검주에 대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이 상황에 창룡검주의 의제, 독고랑의 유족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엄청난 관심이 집중될 것이 뻔했다.

창룡검주라는 명호가 그들에게 큰 짐이 되는 것이다.

찻잔을 매만지며 대궁주는 나지막이 말했다.

“너무 소중해서 오히려 가까이할 수 없는 거로군요.”

그 말은 어쩐지 쓸쓸하게 들렸다.

모용미는 그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궁주가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오다 보니 재미있는 소문이 있더군요. 창룡검주께서 같은 남자조차 반할 절세의 미남이시라고요.”

“네?”

운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도 들었어요!”

옆에 있던 삼궁주가 이때란 듯 말했다.

“보기만 해도 반할 엄청난 미남이래요! 그래서 주변에 미동(美童)들을……. 읍.”

삼궁주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운현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소문을 들었어요.”

모용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들은 건 천계에서 내려온 신선이시라는 이야기였지만요.”

운현은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객옹과 영호준의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리라.

“크흠.”

운현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대궁주에게 말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대궁주님과 북해일문에 큰 빚을 졌습니다.”

진지한 눈빛으로 운현은 말했다.

“보상이라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꼭 해 드리고 싶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창룡검주 운현이, 그것도 공개적으로 하는 말이다.

대궁주가 무엇을 요청하건 운현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또한 기꺼이 이루어 주려 할 것이다.

사람들은 조용히 대궁주를 응시했다.

삼궁주가 눈을 빛내며 무언가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지만 대궁주는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찻잔을 붉은 입술로 가져가며 대궁주는 말했다.

“푸른 늑대께서 기억해 주시는 것으로 충분해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운현이 다시 말했다.

“물론 기억하겠습니다만, 그것으로는 제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잠시 운현과 시선을 마주하던 대궁주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정 그러시다면.”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궁주가 말했다.

“비무를 해 주세요. 빙설만이 아니라 북해십이비 전부와 말예요.”

“북해십이비 전부, 말인가요?”

“네. 푸른 늑대와 비무를 할 수 있다면 북해십이비에겐 더없는 선물이 될 거예요.”

그 말에 운현은 눈을 빛냈다.

‘아.’

모용미는 단번에 깨달았다.

운현이 좋아하는 것은 검, 그리고 고수와의 비무다.

요청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상 대궁주는 북해십이비가 아니라 운현에게 선물을 안겨 준 것이다.

그리고 운현은 대궁주에게 더욱 호의를 갖게 될 테고 말이다.

“좋습니다. 기꺼이 그리하지요.”

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대궁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북해십이비도 이 땅을 밟아 보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녀의 시선이 모용미를 향했다.

모용미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 그 누구보다 강력한 경쟁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용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부끄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네.’

현실을 인식함과 동시에 모용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열기가 솟았다.

모용미 역시 무가의 여인이다.

게다가 운현에 관해서라면 그녀는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파직.

대궁주와 모용미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고 모용진이 흠칫했으며 삼궁주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하지만 때마침 눈을 감고 차향을 음미하던 운현은 북해십이비와의 비무를 기대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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