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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22화 (522/530)

외전 3화. 후일담(3)

운현과 모용미, 객옹은 마차를 타고 소림사를 떠났다.

혜천은 소림사에 잠시 더 머물다가 따로 창룡맹 총단으로 가기로 했다.

따각, 따각.

운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운현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마차가 관도를 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 아이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북해일문에 부탁했었더냐?”

문득 객옹이 물었다.

그 역시 독고랑의 기개와 실력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북해일문에 부탁한 것은 일대상인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일로 폐를 끼칠 수는 없었으니까요.”

객옹을 돌아보며 운현은 말했다.

“허나 반드시 알아보려 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맹이 안정되고 난 후에요.”

일대 정파맹으로 우뚝 선 창룡맹이지만 신생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총군사 영호준의 노력으로 단기간에 방대한 조직이 구성되었다 해도 효율적으로 기능하려면 아무래도 담당자들이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성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문과 북해일문, 남궁세가, 제갈세가와 파격적인 수준의 정보 공유를 하고 있으나 운현의 개인적인 일까지 맡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렇듯 갑자기 대궁주가 전언을 통해 알려 온 것이다.

“조사를 시작한 곳은 많았어요.”

모용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북해일문이나 당문, 어쩌면 남궁세가와 제갈세가도 독고 대협에 대한 것을 알아보고 있었을 거예요. 아마도 영웅맹이 무너진 이후부터요.”

“네?”

운현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모용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장강을 호령하던 영웅맹조차 무너지고 말았어요. 그러니 천하에 그 어떤 문파가 감히 창룡검주를 대적할 수 있겠어요?”

영웅맹이 무너지자 강호의 세가와 문파들은 창룡검주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천하를 양분하던 영웅맹마저 무너뜨리는 그를 감히 어떤 문파가 대적할 수 있을까?

태평맹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용세가와 제갈세가가 이탈하며 중원을 잃었지만 태평맹은 감히 창룡검주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남을 향했다.

그조차 공손세가가 돌아서는 바람에 사실상 실패로 끝났지만 말이다.

“그러니 찾기 시작한 거지요. 창룡검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예요.”

‘아.’

운현은 모용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협상이든 선물이든 혹은 위협이든, 상대와 거래를 하려면 반드시 패가 필요하다.

하지만 창룡맹의 맹주이자 신승의 사제이며 조정의 특별 감찰어사인 운현에게 그 어떤 패를 내밀 수 있을까?

그들이 독고랑을, 창룡검주의 제자이자 의제이며 삼전무적이라는 명호로 유명한 그를 떠올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비록 이제는 죽어 없더라도 그의 유족만 찾을 수 있다면 창룡검주에게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패가 될 테니 말이다.

“저도 그걸 예상했어요. 그래서 모용세가에서도 자체적으로 독고 대협에 대해 수소문하기 시작했지요. 적이 무엇을 노릴지 알고 있는데 대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운현은 조금 놀랐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영호준 총군사께서도…….”

“네.”

나지막한 목소리로 모용미는 말을 이었다.

“영호준 대협도 알고 있었어요. 혹 운 학사님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조심스러워했고요.”

모용미가 운현에게 말하지 못한 이유 역시 같았다.

운현에게 독고랑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랬군요.”

따각, 따각.

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모용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모용미는 말했다.

“그만큼 운 학사님이……, 저희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니까요.”

‘저에게’라고 말하지 못한 건 부끄러움 탓이리라.

와불이 ‘적극적으로 나가라니까!’라고 귓가에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모용미는 그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붉혀야 했다.

무엇보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적극적’이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모용 소저.”

운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표정은 아직도 살짝 굳어 있었지만 눈빛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모용미의 상념은 그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북해일문에서는 어찌 찾았다더냐?”

객옹이 물었다.

당문이나 남궁세가조차 찾지 못한 독고랑의 유족을 북해일문이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상단을 통해서 알아냈다고 하더군요.”

“상단요?”

모용미가 되물었다.

“네. 독고…….”

말하던 운현의 목소리가 멈췄다.

단지 호칭을 말하는 것뿐인데도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운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독고 제가 상단과 거래를 한 모양입니다.”

자신의 두 손을 꼭 쥐고 운현은 말을 이었다.

“최근 북해일문이 다양한 상단들과 거래를 시작했는데, 그중에 독고 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더군요.”

북해의 특산물을 원하는 상단은 많았다.

내로라하는 온갖 상단들이 북해일문을 찾았고, 북해일문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알려 주었다.

그들 중에 ‘고독객 독고랑’과 거래를 한 상단이 있었던 것이다.

바스락.

운현이 품에서 얄팍한 서찰을 꺼냈다.

설영대 무사에게서 건네받은 그 서찰에는 대궁주 특유의 정확한 서체로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독고 제는 상단에 돈을 맡기고 일정 금액을 다달이 누군가에게 전하도록 계약을 맺었습니다. 처음에는 맡긴 돈이 별로 크지 않았는데, 점차 액수가 늘자 상단에서 혹 범죄에 연루된 것이 아닌가 두려워 신상을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더군요.”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부르는 의제의 호칭은 좀 더 쉬웠다.

운현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 밝힌 명호가 바로 ‘고독객’이었습니다.”

모용미는 운현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운현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말했다.

“그래서 알게 된 겁니다. 독고 제에게 남은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요. 정말, 얼마나 다행인지…….”

‘유족’과 ‘다행’이라는 단어처럼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을까?

그러나 운현에게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난 줄 알았던 의제에게 남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만분의 일이나마, 드디어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정말로…….”

운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따각, 따각.

마차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운현은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눈물을 흘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철석간담의 무인이라도, 천하의 고수라 해도 가슴에 흐르는 뜨거운 정(情)은 이길 수 없으니 말이다.

사락.

움켜쥔 운현의 손 위에 모용미의 부드러운 손길이 살며시 닿았다.

하지만 운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물로 얼굴이 엉망일 테니까.

모용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운현의 손을 잡은 채, 모용미는 그저 조용히 운현의 곁을 지킬 뿐이었다.

***

독고랑의 유족은 산서성 태원에 있었다.

안휘성에 처음 나타났었고 운현의 서찰을 받은 후 은거하다가 산동성에 다시 나타나 혈전을 벌였던 독고랑이 사실은 산서성 출신이었던 것이다.

태원에 도착한 운현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바로 삼궁주였다.

북해빙궁으로 떠난 대궁주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맹주님.”

낭랑한 목소리로 삼궁주가 말했다.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예전의 어리숙한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삼궁주님.”

운현의 말에 삼궁주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언니를 닮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참으로 영광이에요.”

“그렇게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예전의 허술하던 삼궁주가 보여 주는 예의 바른 모습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예전처럼 편하게 부르세요.”

“정말요?”

삼궁주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하지만 곧 아차 싶은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 하지만 푸른 늑대님께 무례히 행했다고 언니에게 혼날…….”

“괜찮습니다.”

운현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례는 비례라 하니까요.”

과한 예는 예가 아니라는 뜻이다.

맹주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삼궁주의 예도 당연하지만, 운현은 그런 예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죠? 역시 서기 오빠는, 아니 맹주님은…….”

말하던 삼궁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뭐라고 불러요? 이젠 서기 오빠도 아니고, 맹주님이라고 부르면 너무 아저씨 같은데.”

말이 서툴던 그녀가 이제는 어감까지 알고 있었다.

“그, 글쎄요?”

운현은 조금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호칭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공자님이라고 부르세요.”

옆에 있던 모용미가 중재에 나섰다.

“맹주님이라 부르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테니, 공자님이라 부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거 좋네요.”

삼궁주는 배시시 웃었다.

태평맹에서 만났던 모용미를 삼궁주는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역시 대외총괄께서는 지혜로우시네요.”

웃으며 말하던 삼궁주가 그제야 객옹을 발견했다.

그녀는 흠칫하더니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어르신.”

객옹은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삼궁주는 혹시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싶어 연신 객옹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삼궁주에게 운현이 말을 건넸다.

“대궁주께서 보내신 서찰을 받았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독고 제의 유족이 있다고 들었는데,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 네.”

삼궁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멀지 않아요. 따라오세요.”

자신 있는 눈빛으로 삼궁주가 말했다.

일행을 귀빈실로 모시고 차를 대접하려던 예정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후였다.

삼궁주의 안내를 따라 운현 일행은 마차에 올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대도시 태원의 외곽에 있는 낡고 작은 집이었다.

여느 서민들의 집처럼 마른 억새로 지붕을 올렸고, 엉성한 나무 울타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겨울이 긴 산서성에서는 특히나 허름한 집이 아닐 수 없었다.

“병든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이 살고 있어요.”

삼궁주가 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멀찍이 선 그녀는 운현 일행과 함께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원에게 보였지만 쉽게 낫는 병이 아니래요. 아이들은 근처 객잔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해요. 그래도 다달이 상단에서 보내 주는 돈으로 큰 어려움은 겪고 있지 않나 봐요.”

운현은 묵묵히 삼궁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두 아이가 나왔다.

소년 정도의 남자아이와 자그마한 여자아이였다.

“엄마! 갔다 올게요!”

마치 합창하듯 아이들이 외쳤다.

“그래. 조심하고.”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답했다.

“네!”

아이들은 크게 외치고는 문을 꼭 닫았다.

“가자.”

“응! 작은 오빠.”

남자아이의 말에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름한 옷이지만 아이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 모습에 모용미는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아이들의 표정이 어두웠다면 차마 운현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테니까.

탁탁탁.

두 아이는 손을 잡고 뛰어갔다.

아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궁주가 운현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보시겠어요?”

“아니오. 필요 없습니다.”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들이 나타난 순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 아이들의 얼굴이 독고 제와 똑같으니까요.”

확인할 필요도,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독고랑이 그대로 어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아이들의 모습은 이미 길 너머로 사라졌지만, 운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가슴에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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