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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21화 (521/530)

외전 2화. 후일담(2)

와불의 초막은 언제나처럼 허름한 모습이었다.

앞에 놓인 평상도, 그 위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는 꾸부정한 와불의 모습도 여전했다.

탁.

찻잔을 내린 와불은 고개를 돌렸다.

“거기 서서 뭐 하는 거냐?”

불퉁한 어조로 와불이 말했다.

오랜만의 방문이었지만 와불은 상관하지 않았다.

“손님이 왔으면 차를 내야지. 뭘 멍하니 서 있어?”

운현은 빙긋 웃었다.

“제가 손님입니다만.”

“네가 무슨 손님이냐? 늙은이 밑천까지 털어 간 도둑놈이지.”

와불은 입술을 비죽였다.

“헛소리 말고 너는 차나 내와라. 모처럼 고운 손님께서 오셨는데 기다리시게 하지 말고.”

그 말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모용미를 돌아보았다.

와불에게 손님은 모용미뿐인 듯했다.

옆에 선 운현이나 객옹은 안중에도 없고 말이다.

사락.

모용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단아한 자태로 예를 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사님. 저는 모용미라고 합니다.”

와불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한 손으로 합장을 하며 불호를 외웠다.

“와불이라네. 아리따운 처자께서 이렇게 찾아 주시니 초막마저 환해지는 것 같구먼. 흘흘흘. 어서 이리로 올라오시게.”

운현은 입을 딱 벌렸다.

와불의 모습은 온화한 노승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언제 저런 환한 웃음을 보여 준 적이 있었는가?

게다가 평소라면 찻잔에서 찻잎을 긁어내 우물거렸을 와불이 지금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득도에 이른 고승 같아서, 낡고 허름한 가사마저 위엄 있게 보일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선사님.”

모용미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소곳이 평상에 앉았다.

와불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운현을 바라보더니 인상을 썼다.

“뭐 하냐? 어서 차 안 가져오냐?”

노골적인 차별 대우에 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와불에게서 신승 불영이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사제지간이니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천천히 해도 돼.”

어서 가져오라더니 와불은 바로 말을 바꿨다.

하지만 운현은 얼른 초막 뒤로 향했다.

늦으면 늦는 대로 또 무어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탁탁.

운현이 초막 뒤로 사라지자 와불은 객옹에게 시선을 돌렸다.

“넌 왜 거기 서 있냐? 눈에 거슬리니 아무 데로나…….”

“말씀드렸던 약이 곧 준비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와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객옹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의노라 하는 자가 당문에 들어왔습니다. 지나치게 편항되어 있기는 하나 재주만큼은 뛰어나니 말씀드렸던 약도 머지 않아 완성되겠지요.”

일대상인을 떠난 의노는 당문에 모습을 나타냈다.

당설련이 즉시 객옹에게 알렸고, 객옹의 뜻에 따라 의노는 아무도 모르게 당문으로 받아들여졌다.

의노는 객옹의 절독들을 탐닉하는 것과 동시에 이제껏 자신이 연구해 온 것들을 당문에 전부 풀어놓았다.

비록 일부 분야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의노의 지식과 기술은 당문조차 놀랄 정도였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재건에 바쁜 당문의 의원들은 밤잠을 설쳐 가며 연구에 열을 올려야 했다.

그 성과 중 하나가 곧 결실을 맺는 것이다.

“흘흘, 아주 좋구나.”

와불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객옹에게 말했다.

“뭐 하고 섰냐? 어서 이리 와서 앉지 않고.”

말투는 조금 전과 비슷했지만 내용은 확연히 달라졌다.

객옹은 말없이 평상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불은 고개를 돌려 모용미를 바라보았다.

“그래, 아가씨는 집이 어디라고?”

“모용세가입니다.”

“아하, 모용세가!”

와불의 얼굴이 밝아졌다.

모용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 가문을 아시나요?”

“모르네.”

와불은 조금도 주저 없이 말했다.

소림이 모용세가를 모를 리 없건만, 이미 세속의 인연을 지워 버린 와불의 기억엔 남아 있지 않는 듯했다.

모용미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데 와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허나 자네처럼 참한 여식을 길러 냈다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분명 훌륭하고 좋은 가문일 게야.”

빙긋 웃으며 와불이 말했다.

모용미의 얼굴이 환해졌다.

“네. 정말 그래요. 감사합니다. 선사님.”

“흘흘흘.”

그렇지 않아도 좋던 분위기가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모용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이건.”

사락.

모용미는 작은 꾸러미 하나를 와불 앞에 내려놓았다.

와불은 눈을 크게 떴다.

“어이쿠. 이건 찻잎 아닌가?”

포장을 열지도 않았는데 와불은 내용물을 알아차렸다.

모용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사께서 차를 즐기신다기에 가져왔어요. 항주의 용정입니다.”

“용정! 그 귀한 것을!”

한 번의 사양조차 없이 와불은 찻잎 꾸러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은 와불의 표정이 환해졌다.

“진품이군. 게다가 황제에게 진상한다는 최고품이야.”

와불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헐렁한 가사 안으로 찻잎 꾸러미를 감춘 와불은 모용미를 향해 웃음을 머금었다.

“고맙네. 이 늙고 별 볼 일 없는 땡중까지 신경을 써 주다니, 자네는 마음씀이 외모만큼이나 곱구만.”

“기뻐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그때 운현이 차를 가지고 왔다.

이미 찻주전자가 끓고 있던 덕분이었다.

“차를…….”

“그거 말고.”

와불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귀한 손님에게 내가 마시던 걸 내놓을 셈이냐? 뒤쪽에 잘 찾아보면 따로 놓아둔 찻잎이 있으니 그걸로 가져와.”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어차피 비슷한 차인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와불은 눈을 부라렸다.

“안 가냐? 이젠 이 땡중의 말이 우습다 이거야?”

“아, 아닙니다.”

운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와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잘 찾아봐! 꼭꼭 숨겨 놨으니까! 어지르지 않게 조심하고!”

운현이 초막 뒤로 사라지고, 와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모용미가 어색한 웃음을 짓는데, 옆에서 객옹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이가 할 말이 있을 겁니다.”

“안다.”

운현이 사라진 초막 뒤를 바라보며 와불이 말했다.

“들으나 마나 뻔하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을 보았다거나, 뭐 그런 이야기 아니겠냐?”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운현과 객옹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와불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네놈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다. 나는 평생 쌓은 내력을 포기하고서야 간신히 엿볼 수 있었던 것을…….”

와불은 인상을 쓰며 객옹에게 말했다.

“너는 아니냐? 보나 마나 현이 옆에 있다가 그냥 얻어걸렸을 텐데.”

객옹은 쓴웃음을 지었다.

와불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에잉, 부조리한 세상 같으니. 될 놈들은 따로 있다니까?”

와불은 못마땅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모용미가 앞에 있다는 것도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차를 마시려던 와불은 찻잔이 빈 것을 깨달았다.

그는 초막 뒤를 향해 외쳤다.

“뭐 하냐! 아직 멀었어?”

“금방 갑니다!”

운현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차피 빨리 오지는 못할 것이다.

아직도 찻잎을 찾고 있을 테니까.

와불도 그것을 알아서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네가 금방 간다 해 놓고 진짜 금방 오는 건 한 번도 못 봤다.”

그 말에 모용미는 웃음을 머금었다.

와불과 운현의 모습이 마치 사이좋은 조손 같았기 때문이다.

투덜거리던 와불은 모용미를 돌아보았다.

“그래, 자네는 현이와 무슨 사이인가?”

모용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운 학사님은 저희 가문의 은인이세요. 그리고 저는 창룡맹의 대외총괄직을 맡아…….”

“내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 특별히 알려 주겠네만.”

모용미의 말을 끊으며 와불이 말했다.

“저놈은 눈치가 없어서 그렇게 무작정 기다리고 있다간 큰일 날 걸세. 여자로서 자존심은 좀 상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상하지 않아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모용미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기다리고 싶어요. 운 학사님의 마음이 움직이실 때를요.”

“남자 마음이야 예쁜 여자를 보면 다 움직이는 거지.”

와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다가 언제 저놈 아이를 데려온단 말이냐? 나 죽고 나서?”

“그, 그건…….”

모용미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직 연인도 되지 못했는데 와불까지 아이 얘기라니 말이다.

“그러다 꽃다운 시절 다 지나고 혼자 남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언제나 젊을 줄 알면 오산이니라.”

와불의 말투는 어느새 평대로 바뀌어 있었다.

모용미가 어찌 대답해야 할지 곤란해 하는데 문득 객옹이 말했다.

“혼자 남지는 않습니다.”

와불이 눈살을 찌푸리며 객옹을 보았다.

“미아를 손주 며느릿감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가주들이 많으니까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

대끔 객옹의 말을 끊으며 와불이 말했다.

“현이가 몰라준다고 이 아이가 냉큼 딴 남자에게 갈 것 같으냐? 평생 혼자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다른 남자를 돌아볼 아이가 아닐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지.”

답답해하는 와불의 말은 옳았다.

과거 모용세가가 기울어 갈 때도 모용미는 자신의 혼사 같은 건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팔을 걷고 나서서 집안을 돌보았고, 쓰러져 가는 가문을 지탱하느라 전력을 다했다.

그런 그녀가 이제 와서 좋은 혼처 같은 걸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걸 단번에 파악한 와불의 눈썰미는 참으로 대단했다.

“그러니 네가 그 나이 먹도록 여자가 없는 것 아니냐? 너는…….”

“있습니다.”

와불의 말을 끊으며 객옹이 말했다.

핀잔을 주던 와불이 움찔했다.

“……뭔 소리냐?”

객옹은 대답하지 않았다.

와불은 객옹의 말이 절대 농담이나 허세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 이놈이…….”

앙상한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와불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어.”

땅이 꺼져라 한탄한 와불은 허탈한 표정으로 불호를 외웠다.

“이 무뚝뚝한 놈에게도 여자가 생기는데 나는 왜…….”

모용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출가한 승려에게 여자가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

탁탁.

그때 운현이 찻주전자와 찻잔을 가지고 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찻잎을 찾아 기쁜 운현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아주 좋은…….”

“가라.”

운현은 움찔했다.

와불의 표정이 전에 없이 허탈해 보였기 때문이다.

“다 필요 없다. 인생무상이요 색즉시공이니, 좋은 차가 무슨 소용이며 아리따운 처자가 무슨 의미겠느냐? 너희는 청정 도량을 어지럽히지 말고 어서 속세로 가거라.”

운현은 어리둥절했다.

“저, 갑자기 그게 무슨…….”

“다 가라고.”

와불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운현은 움찔했다.

하지만 어느새 객옹은 물론이고 모용미마저 다소곳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선사님. 나중에 또 찾아올게요.”

인상 쓰던 와불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언제든지 오게나.”

운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와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품 속에 항주 용정차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

객옹이 운현에게 말했다.

운현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시 오겠습니다.”

“킁. 그러거나 말거나.”

와불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 모습이 평소의 와불다워서 운현은 그만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세 사람은 다시 소림사 경내로 돌아왔다.

오가는 참배객들을 바라보며 혜천을 기다리는데 문득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슥.

평범한 참배객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운현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그는 바로 북해일문의 설영대 중 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지요?”

운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설영대의 무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대궁주께로부터 전언이 있습니다.”

“대궁주께서요?”

북해일문의 대궁주는 이미 북해빙궁으로 떠났다.

그런 그녀에게서 전언이라니,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운현에게 설영대 무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독고 대협의 유족을 찾았습니다.”

운현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

“……정말입니까?”

설영대에게 그런 물음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운현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생명을 주고 간 어리석은 동생, 우제(愚弟) 독고랑.

그가 남기고 간 유족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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