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520화 (외전) (520/530)

외전 1화. 후일담(1)

마교의 난리로 인해 흉흉하던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정을 되찾았다.

비록 그들로 인한 피해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지만 도시의 재건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에도 더 이상 두려움은 남아 있지 않았다.

“성도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오. 모두 포정사께서 수고하신 덕분이외다.”

사천의 도지휘사 등초범이 말했다.

그는 포정사, 안찰사와 함께 새로 지은 포정사사에 와 있었다.

포정사 왕안민은 찻잔을 쥔 채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오. 도지휘사께서 성도를 탈환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오늘 같은 날이 있었겠소? 게다가 마교의 잔당까지 토벌하셨으니 참으로 공이 크시오. 허허허.”

그러나 도지휘사 등초범은 고개를 저었다.

“그야 운 어사대인께서 도우셨기 때문이 아니겠소?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소이다.”

옆에 있던 안찰사 이윤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도지휘사의 대응이 시의적절했던 것 또한 사실이오. 이제 중앙으로 가시게 되었으니 참으로 축하드리오.”

도지휘사 등초범은 성도를 탈환한 공로로 승진이 확정되었다.

지방대관들의 가장 큰 소원인 중앙 진출이 이루어진 것이다.

등초범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지 않소? 두 분께서도 이미 연락을 받으신 것으로 아오만.”

안찰사 이윤걸과 포정사 왕안민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들 역시 공을 인정받아 중앙 정계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천의 지방 대관 셋이 모두 승진을 하게 된 셈이니 그야말로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포정사 왕안민은 등초범과 이윤걸을 보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성도의 재건이 일단락되면 나도 곧 올라갈 터이니 앞으로도 서로 잘해 봅시다.”

평소라면 얼굴을 굳혔을 안찰사 이윤걸도, 못 들은 척했을 도지휘사 등초범도 이번 만큼은 미소를 머금었다.

세 사람 모두 운현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데다가, 복마전이나 다름없는 중앙 조정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인맥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감숙성은 어찌 되었소?”

왕안민이 안찰사 이윤걸에게 물었다.

이윤걸은 쓴웃음을 지었다.

“감숙성은 대대적인 감찰로 인해 난리도 아니오. 고관들은 물론이고 모든 관리는 한 명도 빠짐없이 조사를 받고 있소.”

“어이쿠, 저런.”

포정사 왕안민은 혀를 찼지만 도지휘사 등초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가 일어났던 감숙 지역은 대대적인 감찰이 이루어졌다.

난리를 진압한 제독 총병관이자 조정의 흔들리지 않는 실세로 자리매김한 박 공공이 직접 명을 내린 데다가, 마교의 발흥을 방치했다는 변명 못 할 과오로 인해 감숙의 관부는 꼼짝없이 감찰을 받아야 했다.

“아니, 감숙의 관리가 한둘이 아닐 터인데 어찌 그들을 모두 감찰한다는 말이오?”

포정사 왕안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방 대관의 자치권 탓에 중앙 정부의 감찰은 그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그 수많은 관리들을 어찌 전부 감찰한다는 말인가?

안찰사 이윤걸은 찻잔을 들며 말했다.

“감찰어사 조관이 박 공공의 명을 받들어 수백 명의 도찰원 관리들을 이끌고 감숙을 감찰하고 있소. 대관들이 북경으로 압송된 것은 물론이고 이미 투옥된 자들도 무수하다 하더이다.”

감찰어사 조관은 수백 명의 도찰원 관리들을 지휘하여 감숙의 관부를 말 그대로 샅샅이 파헤쳤다.

지방 대관들은 북경으로 압송되었고, 오랫동안 지역과 유착 관계에 있던 관리들이 대부분 파면되는 것은 물론이며 죄에 따라서는 투옥되기까지 했다.

한동안 감숙에서는 ‘관리들을 만나고 싶으면 옥으로 가라’는 조소 섞인 농담이 떠돌 정도였다.

“허어. 그럼 지금 감숙은 난리도 아니겠소. 대도시 난주가 불에 탄 데 이어 도찰원의 대대적인 감찰이라니…….”

왕안민은 혀를 찼다.

난주의 소실에 이어진 도찰원의 전면적인 감찰은 말 그대로 재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소.”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윤걸이 말했다.

“박 공공께서 난주를 비롯한 감숙 전역에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하셨소. 노역과 부세를 면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구휼미까지 보내셨다 하오.”

감숙 지역에 베푼 박 공공의 전폭적인 지원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간 관리들의 부패를 보아 온 백성들은 중앙 정부의 감찰을 마땅히 여겼고 오히려 조사에 적극 협조하기까지 했다.

“백성들의 형편이 나아지니 민심이 나쁠 리가 있겠소? 게다가 이번 감찰로 인해 감숙의 관리들은 당분간 자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관리들의 부패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죄가 처벌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감찰을 통해 감숙성의 관리들은 부패에 가혹한 형벌이 따른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변경의 안일하고 느슨한 분위기에 젖어 있던 관리들을 일깨우기엔 충분했다.

후룩.

포정사 왕안민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차를 들이켰다.

감숙성의 감찰이야 어차피 남의 일이고, 자신은 무사히 성도를 재건하고 중앙으로 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황궁이라.’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나라를 움직이는 대관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다니, 이것이야말로 성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박 공공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려야겠지만 그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이상할 것도 없다.

물론 운현에게 은혜를 갚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 공공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면 말이다.

‘뭐, 어차피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운현은 창룡맹의 맹주이자 특별 감찰어사다.

비리라도 저지르지 않는 한 조정에 있는 자신이 운현과 얽힐 일은 없을 것이다.

“후후.”

왕안민은 찻잔을 매만지며 웃음을 흘렸다.

이전보다 더욱 크고 웅장하게 지어진 포정사사의 모습이, 마치 이제부터 열릴 자신의 탄탄대로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왕안민은 매우 흡족했다.

***

숭산, 소림사.

유서 깊은 소림사는 오늘도 천하 각지에서 찾아온 참배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마교로 인해 천하가 소란스럽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지만 이미 난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참배객들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었고, 그간 외출을 삼가던 귀부인과 젊은 아가씨 들도 오랜만에 화사한 옷차림으로 소림사를 찾았다.

그중에서도 한 사람, 모용미의 모습은 모두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박, 사박.

화사하면서도 단아한 자태와 살랑이는 머릿결, 온화한 눈빛과 아름다운 외모는 마치 한 폭의 미인도를 보는 듯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는 지나는 젊은 승려들조차 멈춰 서게 할 정도였다.

비록 그 미소는 옆에 서 있는 문사 차림의 청년, 운현을 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여기도 오랜만이네요.”

모용미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사실 따져 보면 그리 예전도 아닌데, 정말 오래전인 것만 같아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여기서 소저를 만난 때는 영웅맹이 무너지기 전이었으니까요.”

“네. 기혼단이 소림을 좀먹고 있었던 때지요.”

옆에 있던 승려, 혜천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창룡맹에 머물던 그 역시 오랜만에 소림을 찾아온 참이었다.

“만일 맹주님과 객옹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셨다면 어찌 되었을지…….”

혜천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소림만이 아닙니다. 두 분이 아니 계셨다면 천하는 큰 위험과 혼란을 겪었겠지요. 두 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는 불호를 외며 운현과 객옹에게 한 손으로 합장을 했다.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요. 모두가 함께 힘을 모은 덕분이지요. 스님은 물론 모용 소저께서도요.”

혜천의 말처럼 천하의 혼란을 잠재운 것은 바로 창룡맹, 그리고 창룡검주였다.

“저야 별로 한 일도 없는걸요.”

모용미가 웃음을 머금었다.

“게다가 들리는 이야기로는 창룡검주께서 홀로 마교를 무찌르셨다고 하던데요? 잠시 천계에서 내려온 신선이시라고요.”

“그, 그건…….”

운현은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룡검주가 마교를 물리친 이야기는 마치 전설의 영웅담처럼 세간에 회자되고 있었다.

환마가 창룡검주를 보자마자 도망하려 했다거나, 창룡검주가 절세의 무공으로 환마를 무릎꿇린 일은 이야기꾼들을 통해 지금도 온 천하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이야기가 퍼져 나갈수록 더욱 각색이 심해져서, 이제는 아예 창룡검주 운현이 신선이라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의 검 미명이 천계의 신검이라는 말까지 더해져서 말이다.

“그때의 맹주님은 참으로 위엄이 넘치셨습니다.”

혜천이 감탄의 목소리로 말했다.

“개파대전에서 선언하셨을 때 말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맹주님의 말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지요.”

처음 운현이 개파대전의 단상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사람들은 환호로 그를 맞이했다.

신승 불영의 사제이자 정파맹의 맹주로 우뚝 선 젊은 영웅의 등장을 기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곧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한 사람의 무인일 따름입니다.

운현의 조용한 목소리는 대회장 모든 귀빈들의 귀에 똑똑히 울렸다.

그와 함께 사람들은 대회장 전체를 뒤덮기 시작하는 차가운 한기를 느꼈다.

그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츠즈즈즈즈.

운현의 발밑에 때아닌 서리가 번졌다.

햇빛 아래 빛나는 그 아름다운 서리를 대회장의 사람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병기는 무인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검을 뽑는 날에는.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선언했다.

―결코 그대로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쿵.

대회장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무인이건, 관인이건, 혹은 상단의 사람이건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젊은 영웅 따위가 아니라, 강호 무림을 지배하는 절대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과거 무림맹이 무너지고 ‘영웅맹에 대적할 자는 창룡검주 뿐이다’라는 말이 장강에 나돌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저 흔한 소문이라 생각했다.

그가 홀로 창룡맹을 선언하고, 당시 천하를 양분하던 태평맹의 손에서 아미를 구해냈을 때만 해도 신승의 후광 덕분이려니 여겼다.

하지만 영웅맹이 무너지고 영웅맹 맹주인 철혈사왕 염중부의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 천하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창룡검주 운현은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킨다는 사실을.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하를 혼란케 하던 마교의 군세조차 창룡검주를 당해 내지 못했다.

비록 관군의 토벌이 있었다지만, 창룡검주가 마교의 환마를 소멸시켰다는 소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조정의 실권자이자 제독 총병관이었던 박 공공이 단상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운현의 뒤에서 가만히 미소 짓는 박 공공의 모습은 사뭇 섬뜩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와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운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짓누르던 기세도, 차가운 한기도 서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운현은 어떠한 공식 석상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창룡검주 운현의 명호는 온 천하에 쟁쟁했지만 실제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렇듯 사람 많은 소림에 발걸음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런데, 정말 신선이세요?”

모용미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럴 리가 없…….”

운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막 말하려던 때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문득 객옹이 말했다.

모용미와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객옹은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빨리 애 셋을 만들어야 할 게다. 이놈이 안 날아가게 하려면.”

그의 시선은 모용미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모용미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평소라면 농담이라며 웃어넘겼겠지만 객옹에겐 그럴 수가 없었다.

진담이라기엔 너무 허황되지만 객옹이 본래 농담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닌 까닭이다.

“저도 기대가 되는군요.”

혜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법도는 지키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맹주님이시라도 불쑥 아기부터 만드시면 안 되지요.”

그의 표정은 승려답게 사뭇 진지하기까지 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저기, 저는…….”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려던 운현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모용미의 손을 잡았던 적은 있다.

운현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 모용미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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