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화. 결전
운현은 일대상인이 있는 대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객옹과 사일천 역시 담담히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하는 대전은 황궁에 비하면 절대 크다고 할 수 없었지만, 일반적인 저택들보다는 훨씬 규모가 컸다.
사방을 두른 높은 나무들에 둘러싸인 대전의 고풍스러운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저벅.
운현은 문득 발을 멈췄다.
그들의 눈앞에서 대전의 커다란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턱.
황색 비단에 새겨진 커다란 용무늬, 금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화려한 옷은 마치 옛 황제의 황룡포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용포조차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위압감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땅에서 단 한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입을 수 없는 황룡포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사람.
그저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거대한 체구의 그는 바로 삼태상과 암천무제의 주군, 일대상인이었다.
슥.
일대상인은 뒷짐을 졌다.
그것만으로도 객옹이 움찔했다.
고수들의 기세나 투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마치 산을 앞에 둔 듯한 존재감이 객옹을 압도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일대상인이 담담히 말했다.
그 목소리는 모두의 귓가에 강렬하게 메아리쳤다.
운현을 바라보며 일대상인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제 네 검이 하늘을 가를 수 있게 되었더냐?”
그의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객옹의 얼굴이 굳어 갔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늘을 가를 필요는 없습니다.”
운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을 구하는 데는 작은 용기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당신은 그토록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자신의 사람들을 구하지 않습니까?”
암천무제 때도, 독요나 천태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일대상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음에도 말이다.
“하늘이 사람을 구하더냐?”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대상인은 말했다.
“세상이 초개와 같이 불탄다 하더라도 하늘은 아무도 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길을 갈 뿐이지. 언제나처럼 말이다.”
일대상인의 눈동자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에 객옹조차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지만 정작 그 시선을 마주한 운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 운현은 말했다.
“여전히 자신을 하늘 위의 사람이라 여기고 있군요.”
“그렇지 않다.”
일대상인이 말했다.
웅.
나지막한 울림 속에 일대상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하늘 위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을 다스리는 자다.”
객옹은 이를 악물었다.
하늘 위의 사람은 사람의 경지를 벗어난 자라는 의미다.
그러나 하늘을 다스린다는 건 스스로 신격(神格)을 자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내 사람들을 구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냐? 대답은 간단하다.”
일대상인은 웃음을 머금었다.
우우웅.
“나는 삶과 죽음마저 다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일으키면 그만이거늘 내가 어째서 죽음 따위에 연연하겠느냐?”
일대상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모두를 옭죄어 왔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운현을 내려다보았다.
웅우우웅.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점점 더 강해졌다.
이젠 그저 울림 정도가 아니라 귀를 찌르는 귀곡성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객옹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스릉.
청명한 소리와 함께 운현의 검, 미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거짓말처럼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슥.
운현은 검을 들었다.
“아니, 틀렸습니다.”
미명을 똑바로 세운 채 운현은 말했다.
“당신은 죽음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속인 것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문왕의 죽음을 이토록이나 슬퍼할 수 있단 말입니까?”
꿈틀.
순간 일대상인의 눈썹이 경련했다.
그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주위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일대상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틀린 것은 너다.”
일대상인은 운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내린 진혼령은 그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을 진혼하려는 것이니까.”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세상을 진혼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평소의 객옹이라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일대상인의 말이라면 다르다.
객옹의 등을 타고 서늘한 한기가 번져 나갔다.
“이제 때가 이르렀으니.”
일대상인의 눈동자가 빛났다.
“너를 죽이고 세상을 진혼한 후에는 나 스스로 하늘을 찢고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다. 오직 강한 자만이 존재하는, 하늘 위의 세상을 말이다.”
마치 선언하듯 일대상인이 말했다.
사람의 심령을 뒤흔드는 그의 명에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제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그 말은 단지 운현의 지인들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일대상인도 그것을 알았다.
운현을 내려다보던 일대상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여전히 어리석구나.”
그 목소리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싸늘했다.
“허나 어쩔 수 없겠지. 그것이 하늘이 택한 너의 운명이니까.”
“하늘은.”
운현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도 택하지 않습니다. 운명을 정해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저 모두에게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살라고,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운명이라는 말에 독고랑과 신승 불영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운현 자신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게는 하늘이 그러하더냐?”
가느다란 조소를 머금으며 일대상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막아 보아라.”
후우욱.
무시무시한 기운이 사방에 휘몰아쳤다.
그것은 한 사람의 기세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마치 폭풍과도 같은 기운이었다.
“내가 이 세상을 멸하는 것을 말이다.”
일대상인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웅웅거리듯 들려왔다.
마치 당장이라도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그때, 운현은 조용히 검을 들었다.
츠즈즈즈.
운현의 발밑으로 서리가 번져 갔다.
그리고 그의 검, 미명이 하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사박.
한 발을 내디디며 운현은 그대로 검을 그어 내렸다.
서걱.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리고 육중한 충격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쿵.
마치 커다란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폭풍같이 몰아치던 일대상인의 기세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운현의 검이 일대상인의 기세를 베어 버린 것이다.
사락.
운현이 검을 세웠다.
백색 검기를 머금은 미명의 칼날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웅.
“이제 유희는 그만하시지요.”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당신이 기다리던 때는 이미 이르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후후.”
일대상인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향해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스릉.
그의 검, 천하(天下)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풍스럽고 묵직한 천하의 칼날은 그 주인만큼이나 패도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우우웅.
“처음이구나.”
묵직한 검명과 함께 일대상인이 말했다.
“내가 거둔 이후 천하가 이토록 기뻐하는 것은 말이다.”
우우우웅.
천하의 칼날이 우는 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그에 답하듯 운현의 검, 미명 역시 검명을 흘렸다.
두 자루의 검이 흘리는 검명 속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일대상인이었다.
그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콰과과곽.
일대상인의 검이 뿜어낸 파괴적인 기세가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 궤적을 따라 땅이 패이고 돌과 흙이 흩날렸다.
그러나 운현은 오히려 자신의 검, 미명을 높이 들어 올렸다.
츠즈즈즈.
하얀 서리가 운현의 발밑으로 번져 갔다.
그리고 미명의 칼날이 백색의 광채를 뿜기 시작했다.
마치 장엄한 태산과도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
그것은 바로 백호실전검 제삼식, 중검이었다.
훅.
우뚝 솟은 운현의 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운현을 향해 짓쳐 들던 파괴적인 기세는 그 검 앞에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했다.
콰작.
일대상인이 날린 기세가 종잇장처럼 부서졌다.
그러나 운현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 운현의 검에서 뻗어 나온 백색의 광채가 일대상인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앙.
폭음과 함께 대전의 지붕이 들썩였다.
땅이 요동치고 육중한 충격이 사방으로 내달렸지만 운현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후드득.
지붕에서 파편이 떨어졌다.
그러나 일대상인은 건재했다.
우우웅.
일대상인의 머리 위에서 천하가 울음을 흘렸다.
그가 검을 들어 운현의 중검이 일으킨 충격을 막아 낸 것이다.
“훌륭하다.”
일대상인이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때보다 더욱 나아졌구나. 허나 이것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스륵.
그의 검 천하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대상인은 하늘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검기도, 검명도 없었다.
하지만 그 빛나는 칼끝이 그리기 시작하는 것은 분명 커다란 원이었다.
‘저건!’
객옹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분명 운현의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이었다.
과거 운현이 객옹의 천향접을 처음 파훼했던 그 검이, 지금 일대상인에게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락.
운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미명의 검 끝은 어느새 허공중에 원을 그려 가고 있었다.
‘아.’
그건 객옹에게도 무척이나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운현의 움직임을 깨달은 순간, 이미 두 개의 원은 완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시간이 중간에서 잘려 버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두 자루의 검이 그리는 원이 완성된 순간.
화악.
푸른 빛이 쏟아져 내렸다.
운현과 일대상인은 물론 미명과 천하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가득한 것은 오직 달빛처럼 은은한 푸른 광채뿐, 마치 모든 것이 사라진 것 같은 고요함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 광경은 길지 않았다.
쿠우웅.
묵직한 충격음이 여운처럼 멀어져 갔다.
그리고 객옹은 보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고풍스러운 대전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쿠르르릉.
커다란 건축물조차 두 사람의 검격이 일으킨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일대상인이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건물 일부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모습도 객옹의 시선을 붙잡지는 못했다.
타닷.
일대상인이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옷자락 하나 상하지 않은 채로 일대상인은 자신의 검을 들고 운현에게 쏘아져 갔다.
운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건물마저 무너뜨린 충격이었지만 운현은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았다.
마치 두 사람만이 충격의 여파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훅.
운현의 모습이 한순간 허공을 가로질렀다.
객옹조차 그 모습을 놓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누구라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콰광.
폭음과 함께 또 한번 충격이 터져 나왔다.
운현과 일대상인의 격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