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516화 (516/530)

516화. 천태상

중문을 지난 운현 일행은 일대상인의 궁 앞에 이르렀다.

도가 사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일대상인의 궁은 외관부터 일반적인 도관과 달랐다.

고색창연한 모습과 장엄미를 추구한 건물의 외양은 마치 옛 왕조의 궁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역사 속의 한때로 돌아간 것 같은 그 궁 앞에 도사의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저벅.

운현이 발을 멈췄다.

도사들이 흔히 드는 불진 대신 학우선을 쥔 노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바로 천태상이었다.

천태상은 고개를 들고 운현을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러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귀인께서 이곳까지 오셨는데 예로 맞이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허나 청하지 않은 객이시니 양해를 부탁합니다.”

그의 말에는 힐난의 기색이 역력했다.

운현은 그의 예에 답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청하지 않았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의 주군이니까요.”

“그 말씀은 제가 아는 것과는 다르군요.”

천태상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허나 지금 그것을 논할 이유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당신이 내 앞을 막아선 것이 헛일이듯 말입니다.”

천태상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운현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천태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는 달라졌군요.”

“그렇습니까?”

담담한 표정으로 운현은 말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쏴아아.

바람이 흐르고 운현의 옷자락이 일렁였다.

그 모습에 천태상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예전에 운현이 일대상인 앞에서 펼친 검은 천태상조차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엄청난 무위에도 불구하고 운현이 일대상인에게 위협이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이제껏 수많은 일들이 그러했듯이, 운현 역시 일대상인의 대업을 위한 또 다른 안배라고 여겼을 뿐이다.

천태상이 보는 일대상인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하늘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선 운현의 모습은 달랐다.

마치 자신의 주군인 일대상인을 대하는 것 같은 존재감을 천태상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천태상은 확신했다.

눈앞에 서 있는 운현은 일대상인에게 명확하고도 치명적인 위협이다.

자칫 일대상인의 대업 그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끔찍한 위협 말이다.

“아무래도 당신은.”

사락.

학우선을 가볍게 내밀며 천태상이 말했다.

“여기서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후우우욱.

순간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모래바람이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눈앞에 있던 천태상은 물론 일대상인의 궁조차 모래바람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궁주는 물론 빙설마저 눈빛이 변하는데 객옹이 문득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미혼진이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바람과 섞여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진이라고요? 이것이?”

대궁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진이라 하면 군대가 전장에서 이루는 진형이거나, 혹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미로 같은 효과를 내는 수법이었다.

그런 진법이 이렇게 놀라운 천지조화를 일으킨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사방에 부는 모래바람과 어두워지는 하늘이 어찌 진법 때문이라 믿을 수 있을까?

“미혼진에 법력을 더한 듯하다. 도사의 차림이 그저 겉치레가 아니었군.”

객옹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런 강력한 미혼진은 객옹조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과연 삼태상 중 첫째를 차지할 만한 실력이었다.

후우웅.

모래바람은 점점 더 거세어졌다.

이제 주변 사물은 물론이고 하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대궁주는 손으로 모래바람을 막으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이 진을…….”

스릉.

문득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현이 미명을 뽑는 그 소리는 세차게 부는 바람 사이에서도 똑똑하게 들렸다.

우우웅.

미명이 검명을 흘렸다.

곧게 뻗은 칼날에 푸른 검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대궁주는 운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운현의 검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천지조화 앞에서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걸까?

그때였다.

미명을 들고 있던 운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검을 내리그었다.

마치 모래바람을 가르려는 듯이 말이다.

서걱.

‘아!’

대궁주는 물론 빙설도 눈을 크게 떴다.

결과는 놀라웠다.

휘몰아치던 모래바람이 운현의 검 앞에 둘로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모래바람은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훅.

거짓말처럼 시야가 트이고 하늘이 밝아졌다.

대궁주는 자신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때 나지막한 신음이 들려왔다.

“큭.”

신음을 흘린 사람은 천태상이었다.

조금 전 여유롭던 표정과 달리 그는 이를 악문 채 운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반으로 갈라진 학우선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턱.

“어떻게……. 쿨럭.”

입을 열던 천태상이 허리를 굽히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번져 가는 피를 가릴 수는 없었다.

진이 깨어지고 법력이 강제로 해제되면서 그 충격이 술사에게로 역류한 것이다.

그는 애써 몸을 세우며 물었다.

“……법술을 익혔더냐?”

이를 악물며 그가 물었다.

그 말투는 조금 전과 확연히 달랐다.

“법술 같은 건 모릅니다.”

스릉.

검을 거두며 운현이 말했다.

“그저 흐름의 근원을 잘라 냈을 뿐이지요.”

천태상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곧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흐름을 본다던 지태상과 인태상의 말은 들었으나 설마 내 법술마저 꿰뚫어 볼 줄은…….”

천태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몸을 세워 운현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일이 이리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내 비록 이 자리에서 죽을지언정…….”

―멈춰라.

갑자기 커다란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그 소리에 대궁주는 귀를 막았고 빙설과 객옹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저 목소리만으로도 그들의 내력이 크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그로 오게 하라.

그 목소리는 사방에서 울리는 듯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다.

“허나 주군!”

천태상은 무엇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일대상인의 목소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격이 있다.

천태상은 이를 악물었다.

허나 일대상인의 명은 그에겐 절대적이다.

털썩.

천태상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말하는 천태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벅.

운현은 발을 옮겼다.

그는 고개 숙인 천태상 앞을 말없이 지나쳤다.

객옹은 물론 대궁주와 빙설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사일천은 잠시 천태상을 내려다 보았지만 그뿐, 그 역시 운현을 뒤따랐다.

저벅, 저벅.

운현 일행은 일대상인의 궁을 향해 멀어져 갔다.

천태상은 그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툭.

피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천태상의 몸은 천천히 옆으로 기울었다.

털썩.

천태상은 쓰러졌다.

운현이 베어 버린 것은 단지 미혼진만이 아니었다.

천태상이 평생 쌓아 온 법력은 이미 모래처럼 흩어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것이 운현이 말했던 ‘흐름의 근원을 잘랐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새어 나가는 법력을 끌어모아 펼치려 했던 동귀어진도 일대상인의 명으로 무산되었으니, 이제 천태상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슥.

시야에 가득한 하늘을 보며 천태상은 손을 들어 올렸다.

생명의 기운이 꺼져 가는 듯, 들어 올린 그의 손이 푸들푸들 떨렸지만 상관없었다.

천태상의 시야에 가득한 푸른 하늘의 기운은 이미 크게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휘몰아치는 천기를 보며 천태상은 탄식했다.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때가 눈앞에 있었다.

그저 손만 움켜쥐면 잡힐 것처럼 가까이 말이다.

하지만 천태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툭.

생명이 다한 천태상의 손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의 주름진 손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색창연한 궁에 들어서자 커다란 대전들이 보였다.

다른 도관들과 달리 일대상인의 궁에는 여러 채의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잘 꾸며진 나무와 이곳저곳에 자리 잡은 기묘한 돌 들은 마치 황궁의 은밀한 곳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저벅.

운현이 발을 멈췄다.

대전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었기에 대궁주는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대궁주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대궁주는 대답을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까지 온 것은 운현의 배려와 빙설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해빙궁 역시 일대상인에 의해 혼란을 겪었지만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기다리지요. 당신의 뜻대로.”

대궁주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예전 북해의 밤하늘 아래에서 그러했듯 말이다.

“감사합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말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저벅.

운현은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객옹과 사일천이 그 뒤를 따르고, 대궁주는 빙설과 함께 운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대궁주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빙설.”

“네.”

빙설이 즉시 답했다.

“나는 운 학사님의 부탁을 지키려 해요.”

빙설은 묵묵히 대궁주의 말을 기다렸다.

대궁주는 운현의 뒷모습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내 편이 되어 주겠어요?”

그건 이곳에서 기다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락.

빙설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그것이 푸른 늑대의 뜻이라면.”

빙설의 대답은 파격이었다.

비록 ‘푸른 늑대의 뜻’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해도 북해십이비의 첫째인 빙설이 대궁주의 편이 되겠다고 말하는 건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 이 순간 빙제의 자리에 앉을 다음 사람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해제일지조차 이루지 못했던,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북해 여제(女帝)의 전설이 기나긴 시간을 넘어 대궁주를 통해 재현되는 것이다.

“고마워요.”

대궁주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 대화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시선은 오직 운현의 뒷모습에 못 박혀 있었다.

훙.

문득 그녀의 시야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보이는 것보다 운현이 더 멀어지고 있다는 건 그저 대궁주의 느낌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대궁주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운현이 향한 대전, 바로 그곳에서부터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주위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기운은 이곳 사원에 들어온 이후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녀가 믿는 것은 이제껏 자신을 지켜 주었던 스스로의 지혜와, 저 멀리 보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락.

빙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대궁주의 곁을 지켰다.

대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또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절정고수조차 어찌할 수 없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