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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15화 (515/530)

515화. 독요(毒妖)

운현은 도가 사원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일대상인의 궁으로 걸어갔다.

처음 온 곳이었지만 운현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곳 여산에 들어섰을 때부터 일대상인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벅.

운현이 일대상인의 궁으로 들어서는 중문(中門) 앞에 막 이르렀을 때였다.

사삿.

두 개의 살기가 소리도 없이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운현이 자신의 검을 검집째로 들어 올렸다.

파박.

검집에 박힌 것은 두 개의 가느다란 침이었다.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을 정도였지만 은침을 살필 겨를은 없었다.

쉭.

운현은 즉시 검을 뽑았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대궁주를 향해 휘둘렀다.

카앙.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궁주는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두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단검이 날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빙설과 운현의 검, 그리고 대궁주를 향해 떨어져 내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손에 들린 단검이었다.

새카만 단검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대궁주를 노리며 파르르 떨고 있었다.

“흥.”

짧은 코웃음과 함께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즉시 몸을 뒤로 날렸다.

그사이 빙설은 대궁주를 지키듯 그녀 앞에 섰다.

휘릭.

붉은 옷자락의 여인은 허공에서 유연하게 몸을 틀었다.

그리고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탁.

그녀는 바로 독요였다.

노출이 심한 붉은 옷을 입은 독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뒤로 넘겼다.

“네가, 창룡검주구나.”

붉은 입술을 반짝이며 그녀가 물었다.

그저 그뿐인데도 요사한 기운이 넘실거리듯 흘러나왔다.

아름다움이나 매력과는 전혀 다른, 보는 사람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의 교태였다.

하지만 운현은 검을 거두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릉.

“그렇습니다. 내가 창룡검주입니다.”

운현의 검 미명이 모습을 감췄다.

붉은 옷의 여인, 독요가 물었다.

“왜 검을 거두는 거지? 나는 네 적이잖아.”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단검이 들려 있었다.

운현은 독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노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야 네가 괴로워할 것 같아서.”

독요가 미소를 머금었다.

어색하던 예전과 달리 대단히 자연스러운 미소였지만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저 여자를 죽이면 네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절망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야.”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독요가 말했다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독요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니면 저 여자로는 부족한 걸까?”

운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침묵하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독요.”

독요는 서슴없이 답했다.

“그게 나야. 상인께서 주신 내 이름이자 생명, 그리고 나의 모든 것.”

그녀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켜보던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독요의 눈빛은 자랑스러움이나 기쁨이라기보다는 집착과 광기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너는 상인께 감사해야 할 거야.”

독요가 가늘게 웃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그분이 놓아두라고 하지 않으셨다면 너는 지금쯤 지옥 같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을 테니까.”

운현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독요의 눈빛이 단번에 날카롭게 변했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독요가 말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지긋이 독요를 바라보며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당신은.”

독요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녀는 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날 알아?”

“어차피 상관없지 않습니까?”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금 당신은 독요니까요.”

독요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운현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 따위는 상관없었다.

일대상인에게 받은 이름과 생명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다만 운현의 모습과 말투 하나하나가, 특히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가 기분 나쁠 뿐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야.”

독요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에게서 끈적끈적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독요(毒妖)니까.”

우우우웅.

절정고수들의 기세와 버금가는, 그러나 날카롭고 섬뜩한 그 기운은 가히 요기(妖氣)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독요는 즉시 두 팔을 펼쳤다.

파바박.

수십 개의 은침이 독요의 손에서 쏟아져 나왔다.

“음.”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고 빙설이 즉시 검을 세웠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휙.

나지막한 말과 함께 운현은 검집째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와 함께 쏘아 들던 은침들이 거짓말처럼 방향을 바꿨다.

마치 운현의 검집에 이끌린 것처럼, 은침은 하나도 남김없이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카가가가강.

은침이 소리를 내며 검집에 꽂혔다.

순식간에 쏟아진 은침이 햇빛에 파르르 떨렸다.

“흥.”

독요는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알았지?”

그녀의 은침은 처음부터 운현을 노리고 있었다.

운현은 천천히 검집을 내렸다.

“당신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요.”

독요의 은침은 집요할 정도로 운현의 심장과 얼굴을 노렸다.

그렇기에 막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빠득.

그 모습에 독요는 이를 갈았다.

운현을 향한 그녀의 분노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본래라면 주변 인물을 먼저 노렸을 테지만, 운현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갑자기 치밀어 오른 적의를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얼굴은 왜 노렸느냐?”

문득 객옹이 물었다.

얼굴은 분명 급소이긴 하지만 심장과 달리 즉사할 정도는 아니다.

독요는 움찔하더니 곧 조소를 머금었다.

“꼴 보기 싫어서.”

객옹이 아니라 운현을 바라보며 독요는 미소를 머금었다.

“네 얼굴은 어쩐지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손을 써 버렸어.”

노골적인 그 조롱에 대궁주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정작 운현은 담담하기만 했다.

“당신은 내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운현은 독요를 바라보며 말했다.

“헛되이 목숨을 버리느니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습니까?”

“상대가 될지 안 될지는 겨뤄 봐야 아는 거지.”

낭랑한 목소리로 독요가 답했다.

“하지만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어차피 넌 그분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까 지금 내가 나서는 건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겠지.”

독요의 번뜩이는 시선이 운현을 똑바로 향했다.

“하지만 너 따위가 감히 상인께 대적하는 꼴을 내가…….”

팟.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독요가 땅을 박찼다.

쉬이익.

독요는 순식간에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어떻게 두고 볼 수 있겠어!”

운현은 지체하지 않고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앙.

폭음과 함께 충격이 주위를 뒤덮었다.

대궁주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빙설의 검에도 검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독요의 단검은 운현의 미명에 가로막혀 있었다.

우우웅.

미명이 나지막이 울음을 흘렸다.

독요의 단검 역시 그 새카만 칼날을 빛내며 소리를 냈다.

키이이잉.

칼날을 사이에 두고 독요는 바로 코앞에서 운현을 바라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검명조차 싫은 소리네. 어떻게 넌…….”

휘릭.

독요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그리고 새카만 칼날이 운현에게 짓쳐 들었다.

“하는 짓마다 날 화나게 하는 거지? 대체 어떻게!”

카가가강.

독요의 단검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연격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운현은 그저 미명을 조금씩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 내고 있었다.

‘아.’

대궁주는 말없이 탄식을 흘렸다.

지금의 모습은 이전 서호의 호반에서 운현과 빙설이 벌였던 대결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운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라앉은 운현의 눈빛에서는 절정고수를 상대하는 흥분도, 무(武)에 대한 열의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독요 또한 모를 리 없었다.

아득.

독요는 이를 악물었다.

“하아!”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독요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단검에 요사스러운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새카만 칼날에 어리는 붉은 기운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저건!’

객옹이 순간 눈을 부릅떴다.

모습은 달랐지만 그건 분명 독기공이었다.

당문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독기공이 일은에 이어 이제는 독요에게서까지 나타난 것이다.

콰광, 콰앙.

빗발치듯 쏟아지는 독요의 연격은 하나하나가 치명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운현은 그 치명적인 일격들을 여전한 모습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캉, 카강, 콰앙.

폭음이 터지고 독요가 뒤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이었다.

훅.

운현의 모습이 마치 늘어지듯 허공을 미끄러졌다.

너무나 빠른 탓에 잔상이 남은 것이다.

독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즉시 손을 뻗었다.

푹.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독요의 손에 있던 새카만 단검이 땅에 떨어져 내렸다.

챙강.

“하.”

독요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두 손은 운현을 향해 뻗어 있었지만 닿지 못했다.

운현의 검 미명이 그녀의 단전에 정확히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는 손도 못 대는 멍청이인 줄 알았더니…….”

독요의 시선이 파르르 떨렸다.

“칼로 찌르는 데는 주저함이 없네. 그때처럼 말이야.”

가늘게 웃고 있었지만 운현을 바라보는 독요의 눈빛은 여전히 표독스러웠다.

운현의 목을 향해 뻗은 두 손 역시 먹이를 삼키려는 짐승의 발톱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만일 하얗고 가느다란 그 손에 닿는다면 운현의 목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 것이다.

“지금 뭐라고 했지요?”

운현이 물었다.

그러나 독요는 도리어 반문했다.

“뭐?”

그녀의 눈빛을 보던 운현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슥.

“아흑!”

독요는 움찔 경련했다.

그리고 힘이 다한 듯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운현의 검에 찔린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내력이 거짓말처럼 흩어져 버리고 있었다.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은 독요는 힘들게 숨을 가다듬었다.

빠르게 시선을 움직였지만 자신이 떨어뜨린 단검은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떨어져 있었다.

입술을 깨문 그녀는 고개를 들어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한 거지?”

“상관없지 않습니까?”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대답이 아닐 테니까요.”

독요의 눈썹이 꿈틀했다.

사실 그녀는 운현이 어떻게 이런 일을 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최대한 시간을 끌며 틈을 노리고자 했을 뿐이다.

그래서 물어본 것이다.

상대가 가장 대답하고 싶어 할 만한 물음을 말이다.

“하, 정말이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표독스러운 시선으로 운현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넌 나를 그렇게도 잘 알고 있는 거지? 대체 넌 누구야?”

“나는 운현입니다.”

스륵.

검을 거두며 운현이 조용히 답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당신은 독요니까요.”

“하.”

독요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넌…….”

이를 갈고 노려보려 했지만 독요의 시야는 이미 흐려지고 있었다.

저주의 말을 퍼부으려 해도 이제는 말할 기력조차 없었다.

“……끝까지 나를…….”

독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힘을 잃은 채 스르르 옆으로 쓰러졌다.

털썩.

독요의 눈이 감겼다.

섬뜩한 요기도 요사스러운 교태도 더 이상 없었다.

사방에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 채 독요는 그저 고요히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사락.

운현은 몸을 돌렸다.

대궁주를 지키던 빙설 역시 검을 거두고 쓰러진 독요를 바라보았다.

독요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내력이 흩어진 데다 출혈로 인해 잠시 후면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건 분명했다.

빙설은 대궁주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대궁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실을 운현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운현이 놓아두고자 한다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저벅.

운현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객옹도, 대궁주도, 그리고 말없이 지켜보던 사일천도 운현을 뒤따랐다.

빙설은 마지막으로 흘깃 독요를 바라본 후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그들이 떠나고 쓰러진 독요의 얼굴 표면은 조금씩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그곳에 나타난 것은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눌어붙은 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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