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각자의 길
새벽 어스름이 천천히 걷혀 갈 무렵 운현은 여산에 도착했다.
객옹과 일은, 그리고 대궁주와 함께 산을 오른 운현은 고풍스러운 도가 사원의 정문 앞에 서 있는 노부인 능세영과 금화영을 만났다.
“어서 오게.”
노부인 능세영이 일행을 반겼다.
운현은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세. 그리고…….”
능세영은 눈을 돌려 객옹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표정의 객옹이었지만 능세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엄청난 격전을 치르고 온 직후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능세영은 내색하지 않았다.
“자네도 잘 끝냈나? 힘든 일은 없었고?”
“힘들 것 없다.”
객옹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능세영은 빙긋 웃었다.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어떤가? 이곳의 경치가 제법 괜찮다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산 아래 보이는 화청궁과 새벽 안개 속에 잠긴 서안의 모습은 고즈넉한 정취가 가득했다.
“괜찮겠지.”
객옹은 담담히 말했다.
“이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능세영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객옹이 탈진에 가까운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객옹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능세영은 객옹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니, 꺾고 싶지 않았다.
운현이 아무 말 않고 있는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알았네. 그럼 나는 여기 있도록 하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능세영은 말했다.
“나와 약속했으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게.”
“알았다.”
무심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객옹이 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능세영에게는 충분했다.
“우, 운 공자! 자네도 잠시 쉬었다가…….”
“저는 괜찮습니다.”
금화영의 말에 운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시무룩해지는 금화영의 모습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다같이 나들이라도 가지요. 서안은 아주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 그래? 그럼 약속한 걸세!”
금화영은 반색을 했다.
운현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슥.
고개를 돌린 운현은 거대한 도가 사원을 바라보았다.
높고 고풍스러운 정문은 여느 도가 사원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일대상인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역시 운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운현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 그리고 운 공자.”
금화영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안에서 누군가 대결을 벌인 듯하네. 아마도 검 노사가 아닌가 싶은데…….”
그녀가 말하는 ‘검 노사’는 검성 이검학이다.
“쯧.”
객옹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어차피 이검학의 성격에 얌전히 밖에서 기다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혼자 들어갔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여파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기세였네. 혹시 모르니 조심하게.”
말하는 금화영의 눈빛은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스승인 능세영이 없었더라면 금화영은 분명 사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을 터였다.
금화영 역시 검에 관해서라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니까.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 소저.”
운현은 금화영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사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객옹과 사일천 그리고 대궁주가 뒤를 따랐다.
금화영은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스승인 능세영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능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그들은 이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다른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 들이 지금 그러하듯 말이다.
능세영은 아쉬워하는 금화영의 모습에 쓴웃음을 흘린 후 사원 안으로 들어가는 네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객옹은 마지막까지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능세영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운현과 객옹, 사일천 그리고 대궁주는 사원 안으로 들어섰다.
능세영과 금화영에게 당한 듯한 수십 명의 무사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지만 그들에겐 시선도 두지 않았다.
“조용하네요.”
대궁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원 내부는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라지만 평소라면 이미 수도하는 도인들과 열성적인 참배객들이 바쁘게 왕래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원은 기이할 정도의 정적만이 내려앉아 있어서, 운현 일행의 발걸음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아마도 일대상인의 영향이겠지요.”
“네?”
대궁주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경지가 높다 해도 어찌 한 사람의 기운이 이 넓은 도가 사원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러나 대궁주는 곧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운현이 말한 이상 아마도 그것은 진실일 터였다.
설령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저벅, 저벅.
네 사람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중문을 지나 커다란 도관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운현은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검성 이검학이었다.
“어르신.”
운현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이검학은 고개를 돌렸다.
“왔구나.”
묵직한 목소리로 이검학이 말했다.
객옹은 혀를 찼다.
“쯧, 그게 무슨 꼴이냐?”
이검학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머리도 흐트러졌고 옷은 이곳저곳 찢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별것 아니다. 예전의 인연을 만나 잠시 검을 겨루었을 뿐이니까.”
마치 지나가다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이검학이 말했다.
하지만 ‘검을 겨루었다’는 표현이 가진 의미는 컸다.
그건 바로 검성 이검학이 인정할 정도의 상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법 재미있는 놈이더군.”
슥.
이검학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암천무제가 있었다.
비록 두 팔을 늘어뜨린 채 격한 숨을 내쉬고 있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의 검 역시 한 손에 굳게 쥐어진 채였다.
이검학은 암천무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에 갑자기 기세를 더했다. 다들 포기하는 곳에서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깨어 버리더군. 마치 사나운 늑대 같은 놈이야.”
그의 목소리엔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암천무제는 쓴웃음을 흘렸다.
“허나 승패는 분명합니다.”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이검학이 단호하게 말했다.
“한 번의 패배로 쓰러지는 이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는 이도 있다. 비록 흉터는 남겠으나 그 또한 좌절과 절망을 이겨 낸 흔적이 아니겠느냐?”
말하는 이검학의 눈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허나 무인의 패배는…….”
“나는.”
암천무제의 말을 끊으며 이검학은 말했다.
“네 검의 미래를 보고 싶다.”
암천무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의 표정에는 갈등의 빛이 역력했으나 길지는 않았다.
“……다음에는.”
고개를 들고 이검학을 바라보며 암천무제는 말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검학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암천무제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기대하지.”
암천무제의 입가에도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슥.
그는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오. 창룡검주.”
암천무제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대를 기다렸으나 이분께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소. 우리의 비무는 잠시 미루어도 괜찮겠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상관없소.”
“고맙소.”
암천무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려 했다.
하지만 곧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물었다.
격전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었던 까닭이다.
사락.
비련이 즉시 암천무제를 부축했다.
평소라면 거절했을 그녀의 도움을 암천무제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스릉.
이검학이 검을 거뒀다.
그리고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그 말에 객옹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지금 여기서 말이냐?”
평소의 이검학이라면 일대상인과 검을 겨루겠다고 우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검학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충분하다. 그리고…….”
흘깃 사원 안쪽을 바라본 후 이검학은 말을 이었다.
“저런 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객옹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인상을 썼다.
하지만 운현은 이검학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서안에서 뵙겠습니다.”
“없을지도 모른다.”
“안 계시면 떠나신 줄 알겠습니다.”
이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이검학은 걸음을 옮겼다.
그의 존재감이 어찌나 큰지, 그가 떠나자 순간 허전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검학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운현은 고개를 돌려 암천무제를 향했다.
슥.
운현이 예를 표했다.
암천무제 역시 예를 표하려 했으나 두 손을 맞잡는 것조차 힘겨웠다.
결국 암천무제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운현의 예에 답했다.
저벅.
몸을 돌린 운현이 걸음을 옮겼다.
객옹과 사일천, 대궁주 역시 조용히 운현을 뒤따랐다.
저벅, 저벅.
네 사람은 천천히 사원 안쪽으로 멀어져 갔다.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던 암천무제가 고개를 돌려 비련을 향했다.
“연.”
그 말에 비련의 눈빛이 단번에 흔들렸다.
암천무제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을 떠나려 한다. 은혜를 입은 자로서 마땅히 목숨을 바쳐 그분을 섬겨야겠으나, 그분은 내가 따를 수 없는 먼 길을 택하셨구나.”
비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일대상인이 변했다는 건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마교와 혈교에 힘을 전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진혼령을 내리던 그 이전부터 일대상인은 변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분께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라 하셨으니 나는 이제 은원에서 벗어나 온전한 무(武)의 길[道]을 걷고자 한다.”
암천무제가 무엇을 택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무인이었으니까.
“연.”
암천무제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 곁에 있어다오.”
비련은 얼른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목이 멘 탓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응.”
비련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고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할게. 평생 네 곁에 있을게.”
비련의 말투는 지금까지와 달랐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 예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고맙다.”
암천무제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운현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뭉클.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풍경이 일그러졌다.
그것이 그저 착시가 아니라는 것을 암천무제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자. 연. 이제는…….”
암천무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검성의 일검충천이 남긴 여파는 지독할 정도여서, 애써 버텨 내고 있던 암천무제도 결국 의식을 잃고 만 것이다.
스륵.
“천!”
쓰러지는 암천무제를 비련은 얼른 붙잡았다.
비련은 그의 상태를 살피고는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심하게 탈진했을 뿐, 심각한 내상이나 부상 같은 건 없었다.
사락.
비련은 정신을 잃은 암천무제의 뺨을 가볍게 매만졌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비련은 곧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건장한 암천무제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탓.
가녀린 비련은 암천무제를 안은 채 허공으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곧 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지는 그 순간, 비련의 입가에는 더없이 환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