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사원의 대결
이른 새벽, 서안 인근 여산(驪山).
고풍스러운 도가 사원은 새벽 어스름에 잠겨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화산의 장로인 태을 진인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대상인이 이런 곳에 있었다니…….”
그는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화산이 지척이었는데도 미처 알지 못했구려.”
그들은 이미 여산에 도착해 있었다.
다른 일행과 함께 서안 인근에서 기다리다가 설영대의 연락을 받는 즉시 여산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은 운현보다 먼저 이곳 도가 사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처 모르고 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요.”
무당의 청송 진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을 지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늘 신경조차 쓰지 못했으니 말이오.”
이 도가 사원이 깊은 산중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산 아래에는 양귀비의 일화가 전해지는,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찾는 화청궁과 화청지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청궁을 방문하며 여산의 풍광에 감탄했지만 그 누구도 그곳에 일대상인의 궁(宮)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슥.
청송 진인은 고개를 돌려 서안 쪽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이미 환하게 밝아 오고 있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서안은 새벽 안개에 싸여 잠들어 있었다.
“일대(一大)상인의 명호가 하늘[天]을 파자한 것이라 하더니, 과연 오만하기 그지없구려. 수많은 왕조들의 도읍이었던 서안을 발아래 놓다니.”
서안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컸다.
역사에 기록된 첫 도읍지가 서안 인근에 있으며, 서안의 옛 이름인 ‘장안’은 지금도 대도시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었다.
비록 예전처럼 융성하지는 않다지만 서안이 가진 상징적 의미만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있었다.
그 서안을 내려다보는 이곳에 일대상인이 있다는 것은 사뭇 의미하는 바가 컸다.
“게다가 감히 도가 사원에 자신의 궁을 두다니.”
태을 진인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는 스스로를 신선과 같다 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도가 사원의 궁은 신선들을 모시는 곳이다.
그러니 두 진인들이 느끼는 일대상인의 오만함은 말 그대로 치가 떨릴 정도였다.
옆에 있던 관일검 모용단천은 묵묵히 두 진인의 대화를 들었다.
그 역시 일대상인이 오만하다는 것에는 동감했으나,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 않는 일대상인의 대담함은 내심 감탄스럽기도 했다.
‘허나 그것도 여기까지지.’
모용단천은 도가 사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로써 일대상인이 가지고 있던 이점 중 하나인 은밀함은 사라졌다.
이제 일대상인은 말 그대로 천하의 공적(公敵)으로 지목될 것이 분명했다. 오늘을 넘길 수 있다면 말이다.
탁탁탁탁.
문득 들리는 발소리에 모용단천의 상념이 끊어졌다.
두 진인이 고개를 돌리고 모용단천의 눈동자가 빛났다.
도가 사원에서 수십 명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이미 예리한 검이 날을 빛내고 있었다.
“누구냐!”
흉흉한 목소리로 무사가 말했다.
“감히 이곳이 어디인 줄 알고 함부로 침입하려는 것이냐! 어서 썩…….”
후우우욱.
엄청난 기세가 모용단천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무사의 안색이 단번에 변했다.
비록 무사의 경지도 낮지 않았으나 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모용단천에게는 감히 비할 수 없었다.
모용단천은 강렬한 눈빛을 쏟아 냈다.
“착각하고 있구나.”
내력이 담긴 묵직한 음성에 무사들이 움찔했다.
모용단천은 그들을 노려보았다.
“침입자는 바로 너희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모용단천의 눈빛은 무시무시했다.
평소의 진중한 모습도, 온화하던 표정도 더 이상 없었다.
으득.
무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힘의 차이는 명백했으나 이미 내려진 명은 지엄했다.
“쳐라!”
파바박.
한 줄기 외침과 함께 무사들은 일제히 땅을 박찼다.
짓쳐 드는 수십의 무사들을 바라보며 모용단천은 검을 들었다.
두 진인 역시 송문고검을 뽑고 자세를 잡았다.
“끝까지 어리석구나.”
청송 진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우웅.
모용단천의 검이 나지막한 울음을 흘렸다.
그의 검에는 이미 완연한 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달려드는 무사들의 기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아아아아!”
무사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짓쳐 들었다.
우우우웅.
“내 오늘 너희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마.”
태을 진인이 무사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모용단천은 여전히 침묵했지만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
저벅, 저벅.
검성 이검학은 무심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뒤에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쓰러져 있었지만 이검학은 시선도 두지 않았다.
운현이 오기까지 이 도가 사원을 포위하고 있기로 했다는 것도 이검학은 상관하지 않았다.
“음.”
공손세가의 가주 공손월은 이검학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그도, 그리고 아미의 천수 신니도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저벅, 저벅.
이검학은 산책이라도 하듯 사원의 경내를 거닐었다.
도인 차림의 몇몇 사람들과 멀리서 마주치기는 했으나 그들은 이검학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도망쳤다.
이 사원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 역시 고개를 숙이고 급히 모습을 감췄다.
저벅.
이검학이 걸음을 멈췄다.
고색창연한 도관 앞의 넓은 공간에 일 남 일 녀가 서 있었다.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는 남자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연약해 보이는 한 사람의 여인.
그들은 바로 암천무제와 비련이었다.
검성 이검학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역시 여기 있었군.”
이검학의 시선이 암천무제를 똑바로 향했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비련의 표정이 변할 정도였지만 암천무제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자네를 찾았다기보다는.”
이검학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검을 상대할 만한 자를 찾고 있었네. 보아하니 제대로 찾은 것 같군.”
암천무제의 표정이 굳었다.
“저는 창룡검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암천무제는 알고 있었다.
이검학이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말이다.
“상대를 가리면 좋은 무인이 될 수 없다네.”
담담한 목소리로 이검학이 말했다.
“아니면 자네의 주군을 위해 현이의 힘을 빼놓겠다는 의미인가? 그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지. 본래 사람은 벽에 부딪혀야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법이거든. 자네의 주군 역시…….”
“제 주군께서는.”
암천무제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한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런가?”
이검학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다면 나와 검을 겨루지 못할 이유가 없겠군.”
그의 눈빛은 이미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검학이 어째서 검에 미쳤다는 말을 듣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습니다. 아니, 어쩌면.”
암천무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눈빛 역시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저 역시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는 살아 있는 검의 전설, 검성 이검학이다.
암천무제 역시 이검학에 대해 알고 있었고, 어쩌면 오래전부터 그와 검을 마주할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천하의 수많은 무인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좋아.”
이검학이 웃으며 말했다.
“이로써 천산에서 끝내지 못한 승부를 결할 수 있겠군.”
후우욱.
검성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기세에 비련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의 기세도 범상치 않았는데, 그조차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
문득 들린 목소리에 비련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암천무제를 돌아보았다.
그가 비련을 ‘연’이라 부른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하지만 암천무제는 비련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 승부가 끝나면 네게 할 말이 있다.”
슥.
암천무제의 시선이 비련을 향했다.
“기다려 주겠느냐?”
비련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천무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사라져 버렸다.
저벅.
암천무제는 앞으로 나섰다.
뒤에 남은 비련은 입술을 깨문 채 암천무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벅, 저벅.
걸어 나온 암천무제는 거리를 두고 이검학과 마주 섰다.
아직 검을 뽑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치 폭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기세가 충돌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검학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시작해 볼까?”
“네.”
암천무제가 강렬한 눈빛으로 말했다.
“시작하지요.”
카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의 검이 허공중에 이를 마주하고 있었다.
우우웅.
이검학의 검, 한월과 암천무제의 검이 서로 맞부딪힌 채 나지막이 울음을 흘렸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매우 성급하시군요.”
암천무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성급하지 않을 수 있겠나?”
이검학은 순순히 인정했다.
“나는 항상 배가 고프거든. 그리고 내 검, 한월도.”
콰과곽.
이검학의 검 한월이 기세를 더하며 암천무제를 밀어냈다.
암천무제는 버티는 대신 유연하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실책이었다.
카아앙.
한순간의 틈이었지만 이검학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기세로 미는 듯하던 그는 순식간에 연격을 퍼부었다.
카강, 캉, 카앙.
엄청난 빠르기의 쾌검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비련조차 제대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이검학의 연격은 날카롭고 매서웠다.
게다가 속도에만 치중하는 다른 쾌검과는 달리, 그의 검격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내력을 담고 있었다.
마치 검이 아니라 거대한 도끼로 내려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암천무제도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하아!”
콰아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탁.
이검학은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대단하군.”
놀란 표정으로 이검학이 말했다.
그는 암천무제를 바라보며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내 연격을 힘으로 밀어낸 상대는 처음일세.”
“저도 놀랍습니다.”
검을 든 암천무제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제 혼신의 일격조차 검성께는 통하지 않는군요.”
이검학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자네의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암천무제의 표정이 변했지만 이검학은 상관하지 않았다.
마치 권유하듯 이검학은 말했다.
“자, 이제 자네의 전부를 내게 보이게.”
“기꺼이.”
암천무제가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사락.
순간 바람이 멈췄다.
암천무제의 검을 중심으로 사방에 팽팽한 긴장이 번져 갔다.
그것은 마치 주변의 공간 전체가 암천무제의 기운에 침식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검학의 눈빛도 변했다.
“후후.”
웃음과 함께 이검학의 눈빛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의 검 한월이 울었다.
마치 이검학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수많은 생사의 순간 그와 함께했던, 유일한 이해자이자 벗인 한월의 그 부름에 이검학은 기꺼이 응답했다.
“그래.”
이검학이 나지막이 말했다.
“가자, 한월.”
훅.
순간, 지켜보던 비련은 눈을 크게 떴다.
한월은 여전히 검성의 손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검학의 전부가 담긴 그 검은 이미 검성 이검학 자신이었다.
‘아.’
비련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그 검은 바로 검성 이검학의 절기이자 전부인 일검충천(一劍衝天)이었다.
콰과과곽.
아직 검이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아!”
두 사람이 동시에 기합을 내질렀다.
한 자루 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채, 그들은 서로를 향해 부딪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