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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12화 (512/530)

512화. 마음대로

사방은 조용했다.

격전의 충격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새벽 어스름 속에 보이는 주변에는 파괴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슥.

객옹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텅 빈 그의 손에 남아 있는 것은 독기공의 잔향이었다.

조금 전 사일천이 알려 준, 객옹 자신조차 모르던 독기공 말이다.

“대단하군.”

생각에 잠겨 있는 객옹의 귓가에 사일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객옹은 고개를 돌렸다.

‘일은’ 사일천이 객옹을 보며 말했다.

“역시 자네의 천향접은 참으로 아름답네. 정말 놀라워.”

“당연하다.”

사락.

손을 내리며 객옹이 말했다.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절기라 하겠느냐?”

“그래.”

사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를 보면 아름다움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지만 말일세.”

객옹의 세 번째 천향접이 직격한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태상이나 지태상의 시신은 물론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아서 혹시 도망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주변의 잔해들 속에 쓰러져 있는 반쯤 삭아 버린 지태상의 대검은 이 대결의 결과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제 인태상과 지태상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건 무엇이었더냐?”

객옹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일천이 알려 준 독기공에 대해 묻는 것이다.

세 번째 천향접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사일천 덕분이었다.

지극히 정순하고 너무나도 단호한, 예술적인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던 그 내력 운용은 지금도 전율이 일 정도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독기공의 최고수 객옹이 말이다.

“당연히 독기공이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사일천의 대답에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묻는 건 그것이 아니다. 대체 누가 그런 괴…….”

‘괴물 같은 독기공’이라 말하려던 객옹은 멈칫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일천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어머니께서 창안하신 것일세.”

그의 표정엔 은은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객옹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지만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엄청난 독기공을 창안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존중을 받아 마땅하니까.

인상을 구기고 있는 객옹을 보며 사일천은 피식 웃었다.

“신경 쓸 것 없네. 어차피 자네라면 빠르든 늦든 그 경지에 도달했을 것이네. 자네가 세 번째 천향접을 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자네의 독기공이 완벽에 근접해 있었다는 증거니까.”

객옹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건 네가 알려 준 독기공이 가장 완벽하다는 뜻이냐?”

“물론. 세상에 그 이상의 독기공은 없다네.”

사일천은 대답을 주저하지 않았다.

잠시 인상을 쓰던 객옹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를 포기한 객옹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한 것 없다.”

객옹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언제고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니까.”

이겼다고 해서 과거의 패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태상의 두려움과 경악으로 물들었던 눈빛만으로도 객옹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기혼단을 만들어 낸 자는 어떻게 되었느냐?”

“도주했습니다.”

대궁주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예상한 대로지요.”

객옹이 두 태상과 격전을 벌이는 사이 기혼단의 제작자인 의노는 수하와 함께 도주했다.

그들이 도망할 것은 애초부터 예상한 바였으며 또한 운현 일행이 노리던 것이었다.

“이미 설영대가 따라붙었으니 그들이 어디로 가건 곧 알게 될 거예요.”

“흠.”

객옹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곳에 일대상인이 있다면 좋겠군.”

“네. 저도요.”

정중하게 대답한 대궁주는 운현을 돌아보았다.

“이만 떠날까요? 여긴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사실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기혼단을 제조하던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궁주의 말은 정확했다.

이제 이곳은 불태워질 것이고, 사방으로 흩어진 이곳의 약사들은 설영대에 의해 남김없이 포박될 터였다.

더 이상 운현이나 객옹이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지요.”

사뭇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눈빛은 결연했다.

다시 일대상인을 마주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

새벽 어스름이 점차 걷혀 가던 시간.

천문을 살피던 천태상의 표정이 문득 어두워졌다.

“음.”

그는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조금 전 인태상과 지태상의 기운이 흐트러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려 했지만 이미 하늘은 희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게다가 천기가 요동치고 있었던지라 달리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아무래도…….”

천태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주의하라고 단단히 이르고 지태상까지 동행토록 했지만 그들의 명운은 여기까지였던 모양이다.

천태상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리며 깊은 회한에 빠졌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휙.

천태상은 몸을 돌렸다.

지금 당장 일대상인을 만나야 했다.

일대상인의 처소에 발을 들인 순간 천태상은 보았다.

암천무제가 일대상인 앞에 이미 부복하고 있는 모습을.

요사스러운 독요는 물론이고 암천무제를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는 비련 역시 용좌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천태상이 천문으로 알아차린 사실을 일대상인 역시 느낀 것이다.

사박.

조심스럽게 용좌 앞으로 다가간 천태상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군. 지태상과 인태상이 명운을 다한 듯합니다.”

일대상인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침묵은 지태상과 인태상이 그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천태상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또한 천기의 요동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천문을 흐릴 정도이니 곧 때가 이를 것입니다.”

“안다.”

일대상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번쩍.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리고 동시에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사방을 뒤덮었다.

‘큭.’

천태상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그것은 살기도, 기세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일대상인은 주변의 존재들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무저갱처럼 말이다.

일대상인의 위압감에도 불구하고 암천무제와 비련의 표정은 여전했지만, 독요의 눈동자에는 희열이 번득이고 있었다.

“이제 곧 그들이 올 것이다.”

묵직한 목소리로 일대상인이 말했다.

“또한 문서의 주인이 나를 찾을 터이니,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이로구나.”

일대상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빠르게 사라졌다.

독요의 표정이 질투로 일그러지는 것을 흘깃 본 후, 천태상은 공손히 물었다.

“주군, 명을 내려 주십시오.”

일대상인은 말없이 천태상을 내려다보았다.

그 엄청난 위압감은 천태상조차 견디기 어려웠다.

“없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천태상을 짓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일대상인은 천태상과 암천무제, 그리고 비련과 독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희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라. 그것이 나의 명이다.”

쿵.

천태상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소신, 목숨을 바쳐 주군의 명을 준행하겠나이다.”

쿵, 쿵.

세 번 이마를 찧은 천태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공손히 예를 표하며 천천히 물러났다.

슥.

암천무제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일대상인에게 무인의 예를 올렸다.

일대상인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지만 암천무제는 상관하지 않았다.

휙.

암천무제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비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일대상인에게 예를 표했다.

일대상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살짝 회한이 깃들었으나 그 역시 길지 않았다.

사락.

비련은 암천무제를 따라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독요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빛나는 눈동자로 일대상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죽여도 되나요?”

누군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대상인도 묻지 않았다.

슥.

일대상인은 독요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이제까지와 달리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빠르게 사라졌고, 일대상인은 묵직한 어조로 답했다.

“뜻대로 하라. 허나 또다시 죽을 필요는 없다.”

독요는 ‘또다시 죽을 필요 없다’는 일대상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환희로 물들었다.

“네.”

독요는 사뭇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대상인의 대답은 마치 그녀가 특별한 존재라고 말하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사락.

천천히 독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요사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지극히 공손하게 예를 표한 독요는 조용히 일대상인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녀의 입술이 불빛 아래 새빨갛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

의노는 수하와 함께 화급히 서안으로 도주했다.

마차를 타는 건 어림도 없었고, 말에 탄 수하의 뒤에 매달리시다시피 한 채 의노는 서안 북동쪽에 있는 여산(驪山)으로 향했다.

가파른 여산의 정상 인근에 있는 거대한 도가 사원.

평소에는 열성 참배객만이 드나드는 한가로운 그 사원의 가장 깊은 곳에 바로 일대상인의 궁(宮)이 있었다.

콰당.

의노는 수하의 부축을 받으며 대전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들 앞에 기다렸다는 듯 천태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일입니다!”

수하가 다급히 외쳤다.

“지금 기혼…….”

“안다.”

천태상이 수하의 말을 막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인태상과 지태상은?”

“모, 모릅니다. 저희가 떠났을 때는 아직…….”

“됐다.”

천태상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의노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는 의국에 가서 피신할 준비를 하게. 만일 관에 붙잡히게 되거든 즉시 자진하고.”

“차라리 여기서 날 죽이는 건 어떤가?”

의노의 말에 천태상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의노는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자진이라니, 내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단 말이냐? 아무리 어리석은 독충이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죽으려면 마땅히 날 놀라게 할 정도의 독이어야지. 내 피를 태우고 살을 썩게 할 정도의 극독 말이다.”

의노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쯧.”

천태상은 혀를 찼다.

그는 수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서 침입에 대비해라. 기혼단 제조소에 대한 보고는 더 이상 안 해도 좋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반문은 허락되지 않는다.

수하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네.”

그는 몸을 돌려 바깥으로 뛰어갔다.

천태상이 내린 특급 경보로 인해 사원은 이미 들썩이고 있었다.

저벅.

몸을 돌린 천태상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길을 의노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나는 어찌해야 하느냐?”

천태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 뜻대로 해라.”

슥.

의노를 돌아보며 천태상은 말했다.

“살든지 죽든지 상관하지 않겠다. 피하든 숨든 마음대로 해라. 허나 다음에 나를 만나게 되면.”

천태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의노를 노려보았다.

“반드시 네 목숨을 거두겠다. 독이 아닌 검으로 말이다.”

말뿐이 아니라는 듯 천태상의 허리에 걸린 검이 흔들렸다.

도인들이 파사나 축귀를 위해 가지고 다니는 검이었지만 천태상의 검은 단순한 의식용이 아니었다.

의노는 입술을 비죽였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슥.

노려보던 천태상은 몸을 돌렸다.

천천히 멀어져가는 천태상을 바라보던 의노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

피식.

“마음대로 해야겠군.”

의노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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