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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11화 (511/530)

511화. 세 번째

저벅.

허공에서 내려선 객옹의 발이 땅을 디뎠다.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객옹만이 아니었다.

사락.

객옹의 뒤로 세 사람이 내려섰다.

그들은 바로 운현과 대궁주, 그리고 사일천이었다.

인태상은 이를 갈았다.

으득.

“어느 놈이 못된 장난을 쳤나 했더니, 바로 네놈이었구나.”

운현을 노려보며 인태상이 말했다.

그러나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슥.

객옹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이 자리의 주인은 객옹 어르신이십니다. 저는 그저 지켜볼 따름이지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물론 그렇다고 기혼단까지 모른 척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말의 의미를 인태상은 분명히 알아차렸다.

그건 객옹 혼자 인태상과 지태상을 막겠다는 뜻이었다.

“흐.”

인태상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객옹에게 말했다.

“내 일권에 네가 종잇장처럼 나뒹굴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이었거늘 벌써 그 일을 잊었나 보구나.”

후욱.

날카로운 기세가 인태상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객옹을 향한 노골적인 살기였다.

“감히 네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미치기라도 했더냐?”

인태상의 살기가 객옹을 향해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러나 객옹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객옹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절정의 경지에 이르겠느냐? 허나 그런 나라도 자신의 작품에 손을 대는 건 싫어한다. 특히 기혼단 같은 뛰어난 작품이라면 더더욱.”

담담한 목소리로 객옹이 말했다.

“이곳을 망쳐 놓으면 주인이 튀어나올 것을 예상했다. 네가 바로 기혼단을 만든 자였군.”

객옹은 의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일시적으로 강한 힘과 내력을 허락하지만 결국에는 이지와 인성까지 철저하게 파괴하는 환약.

비록 모든 것이 악의로 똘똘 뭉쳐 있었으나 기혼단은 말 그대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독과 약을 다루는 자라면 누구나 감탄할 만한, 고도의 지식과 예술적인 감각까지 집약된 ‘작품’ 말이다.

의노의 눈이 빛났다.

그는 사뭇 담담한 표정으로 객옹에게 말했다.

“당신도 대단하군. 단 한 번의 하독으로 이곳을 완전히 못쓰게 만들다니.”

“별것 아니다.”

객옹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남에 갔을 때 시독과 장독을 연구하며 잠시 흥이 올라 만들어 본 것뿐이니까.”

의노는 눈을 반짝였다.

운남이라면 북부의 설산과 남부의 밀림이 공존하는 곳이자 다양한 독물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의노의 눈빛이 변했다.

“……혹시 이런 독이 더 있나?”

“물론.”

객옹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것만 해도 백 가지는 넘는다.”

그 눈빛은 결코 과장이나 허세가 아니었다.

객옹은 독선이자 동시에 약선으로 불리는, 삶과 죽음의 주관자이니까.

“흐흐흐.”

의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지금 무슨 짓이냐.”

인태상이 의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시선엔 살기마저 일렁였지만 의노는 그저 눈살을 찌푸린 것이 전부였다.

“……쯧.”

혀를 찬 의노가 고개를 돌렸다.

슥.

의노를 노려보던 인태상은 객옹을 돌아보았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개를 치면 주인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지.”

인태상은 의노와 기혼단을 서슴없이 개에 비유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말이다.”

후우욱.

인태상의 옷자락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네가 과연 개 주인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리 생각했어야 했다.”

콰과곽.

분노한 인태상이 쏟아 내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그 기세는 운현에게 있어서 가장 참혹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운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던 때였다.

“괜찮아요.”

대궁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자가 당신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갔다지만, 당신 역시 그가 귀하게 여기던 것을 부숴 버렸으니까요.”

사락.

대궁주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 절망을 안겨 줄 예정이지요. 그러니 승자는 당신이에요.”

“설령 그렇다 해도.”

운현은 여전히 인태상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든 것들은 떠나기 마련이에요.”

운현의 눈썹이 움찔했다.

하지만 대궁주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은 훌륭히 복수를 했고 또한 저자의 죄를 벌하고 있어요. 그러니 고개를 들고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세요.”

슥.

대궁주의 시선이 인태상을 향했다.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떠올랐다.

“누군가 당신을 비웃는다면, 당신 역시 그를 비웃어야 하지 않겠어요?”

운현은 대궁주를 바라보았다.

인태상을 향한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싸늘했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대궁주의 시선이 문득 운현을 향했다.

“왜요?”

“……아닙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미숙함을 속으로 잠시 탄식한 후, 운현은 눈을 들어 인태상과 객옹을 바라보았다.

콰아아아.

인태상의 기세는 여전했다.

지태상과 무언가 전음을 나누는 듯했지만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가슴에 들끓던 분노와 회한은 어느새 잦아들고, 운현은 서늘한 시선으로 눈앞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검 늙은이, 너도 끼어라.

인태상의 전음에 지태상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운현이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상 이것은 객옹과 인태상의 대결이다.

하지만 인태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런 늙은이 정도야 혼자서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저놈이다.

지태상의 시선이 슬쩍 운현을 스쳤다.

지금 운현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지태상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주군인 일대상인을 대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눈앞의 늙은이를 치우는 것과 동시에 저놈을 기습해야 한다. 그러려면 네놈이 반드시 필요하단 말이다.

인태상은 객옹과 운현을 한꺼번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운현은 끼어들지 않겠다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자신과 지태상의 합격이라면 객옹 정도는 손쉬울 테니, 그 직후의 빈틈을 노려 단번에 운현까지 기습하려는 것이다.

―명심해라. 지금은 네놈의 고집을 내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이 일격에 주군의 안위가 달려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인태상의 전음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겉으로는 객옹을 비웃고 있었지만 인태상은 단 한 순간도 운현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핑.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날카로운 기세가 인태상을 향해 짓쳐 들었다.

인태상은 즉시 손을 내저었다.

파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짓쳐 들던 기세가 사라졌다.

“이놈이 감히!”

인태상은 이를 갈며 객옹을 노려보았다.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 거냐?”

객옹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인태상을 바라보았다.

“네 상대는 나다.”

그 시선은 사뭇 오만하기까지 했다.

으득.

인태상은 이를 갈았다.

“오냐. 네놈이 그리도 죽음을 재촉하고 싶다면.”

탓.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태상이 땅을 박찼다.

“못 들어줄 것도 없다!”

콰과곽.

인태상의 갈퀴 같은 손이 객옹을 향해 짓쳐 들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객옹은 즉시 두 손을 뻗었다.

파바바박.

절기인 난홍십이엽이 그의 손에서 빗발치듯 쏟아져 나왔다.

인태상은 즉시 두 팔을 교차하여 충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난홍십이엽이 노린 대상은 인태상이 아니었다.

카가가강.

지태상의 대검에 난홍십이엽이 무수히 직격했다.

짓쳐 들던 지태상은 검을 들어 막아 냈지만 지체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태상과 지태상의 합격이 깨어진 것이다.

“놈!”

분노한 인태상이 일갈했다.

그에게도 난홍십이엽이 날아들었지만 많지는 않았다.

파박.

두 팔을 펼치며 난홍십이엽의 기세를 쳐 낸 인태상은 객옹을 향해 섬전처럼 짓쳐 들었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일렁이는 그의 손은 당장이라도 객옹을 부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객옹의 한 손은 이미 인태상을 향해 내밀어져 있었다.

마치 무엇을 내어 주는 듯 펼친 객옹의 손.

그 손바닥에 떠오르고 있는 것은 영롱한 한 마리의 나비였다.

사락.

인태상은 똑똑히 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객옹의 무심한 눈빛을.

‘헉!’

콰아앙.

인태상의 눈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폭음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기세가 사방을 휩쓸고, 휘날리는 흙먼지가 객옹과 인태상의 모습을 가렸다.

휘릭.

흙먼지를 뚫고 두 사람이 뒤쪽으로 솟구쳤다.

그들은 바로 인태상과 지태상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 지태상이 끼어들어 자신의 대검으로 천향접을 막아 낸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혹독했다.

“검 늙은이!”

인태상은 다급히 지태상을 부축했다.

탁.

두 사람은 땅에 내려섰다.

지태상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그러나 인태상은 그의 상태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그 날개는 바로 객옹의 두 번째 천향접이었다.

화아악.

밤하늘을 뒤덮을 듯 펼쳐진 날개를 올려다보며 인태상은 이를 악물었다.

으득.

“하아아아아!”

비명 같은 기합을 외치며 인태상은 즉시 하늘을 향해 쌍권을 내질렀다.

마치 무너져 내리는 하늘을 떠받치려는 듯이 말이다.

콰아아아앙.

우르르르.

땅이 흔들리고 건물들이 삐걱거렸다.

객옹의 연이은 천향접이 휩쓸고 간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저택 이곳저곳이 부서진 것은 물론이고, 기혼단이 보관되어 있던 건물은 반 이상이 무너져 내렸다.

파편과 흙먼지가 휘날려 주위의 모든 것을 덮어 버린 것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태상과 지태상은 살아 있었다.

“흐흐흐.”

인태상이 웃음을 흘렸다.

그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였다.

한 팔은 힘을 잃은 듯 늘어뜨렸고, 다른 팔에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옷이 여기저기 찢어진 것은 물론 머리카락도 흐트러졌다.

“대단하구나. 이 정도라면 네가 우리 앞에 감히 모습을 드러낼 만도 하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경지에 다다른 것이냐?”

그의 감탄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인태상은 곧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허나 두 번이 전부로구나.”

그의 시선은 객옹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객옹은 인태상을 향해 여전히 한 손을 뻗은 채였다.

그러나 그 손바닥에 더 이상 반짝이는 나비는 없었다.

저벅.

쓰러져 있던 지태상이 몸을 일으켰다.

첫번째 천향접을 막아 낸 지태상의 상태는 인태상만큼이나 처참했다.

그러나 더 이상 천향접을 날리지 못하는 객옹보다는 나았다.

“큭큭큭.”

인태상은 웃음을 흘렸다.

그는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운현을 노려보았다.

“안타깝구나. 내 힘이 부족하여 비록 도련님의 복수는 하지 못하나.”

인태상의 시선이 객옹을 향했다.

“죽음의 길동무로 저놈의 목숨은…….”

“두 번이 전부라고.”

객옹이 인태상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누가 그러더냐?”

우웅.

객옹의 손에 내력이 모여들었다.

인태상과 지태상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비록 이전과는 달리 대단히 더뎠지만 지금 객옹의 손에 모여드는 기세는 분명 천향접의 그것이었다.

팟.

인태상과 지태상은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한 팔을 쓸 수 없는 것도, 대검에 제대로 된 기세가 실리지 않았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후우웅.

짓쳐 드는 인태상과 지태상 앞에서 객옹은 침착하게 내력을 모았다.

그러나 나비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객옹은 결국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락.

한 사람이 객옹의 뒤에 섰다.

“잘했다.”

사일천은 나지막이 말했다.

“당문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적들로 두려워 떨게 해야 하는 법이지.”

두 사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덤벼드는 인태상과 지태상의 눈동자에 가득한 감정은 분명 두려움이었다.

슥.

사일천은 자신의 손을 객옹의 등에 가져갔다.

내력 같은 건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객옹은 즉시 알 수 있었다.

사일천의 기운이 그리는 혈맥과 기맥의 궤적을.

그리고 자신의 독기공이 더욱 정순하게, 그리고 그만큼 파괴적으로 변해 가는 것을 말이다.

후우욱.

더 이상 생각할 틈은 없었다.

어느새 객옹의 손바닥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한 마리의 나비가 떠오르고 있었다.

웅.

나비가 울었다.

마치 어서 날아오르게 해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객옹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번쩍.

세 번째 천향접의 찬란한 빛이 사방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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