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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10화 (510/530)
  • 510화. 예술의 경지

    다음 날, 운현 일행은 중경을 출발했다.

    기혼단의 제조 장소가 서안 인근으로 추정되는 이상 중경에 오래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천수 신니와 장로들이 마음에 들어 하던 다루를 뒤로하고, 일행은 마차를 이용하여 서안 방면으로 향했다.

    따가닥, 따가닥.

    관도를 달리는 마차 안에서 운현이 말했다.

    “서안 쪽이 기혼단의 제조 장소라는 건 어떻게 확인하셨습니까?”

    “설영대가 침투할 수 없었으니까요.”

    대궁주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곳들은 설영대가 은밀하게 숨어드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어요. 대부분은 일반적인 약재상이거나 가짜를 만드는 곳이더군요. 하지만 서안 쪽은…….”

    “잠깐만요. 가짜라니요?”

    운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궁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기혼단이 고가에 팔리자 뒤늦게 뛰어든 상단 일부가 제조를 시도한 거예요. 물론 결과는 냄새만 비슷한 독약이었지만요.”

    기혼단은 독성이 강한, 희귀하고 비싼 약재가 다량으로 사용된다.

    객옹이 아니면 그 제조법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단들 입장에선 상관없지요. 결과가 어찌 되건 책임질 일은 없을 테니까요.”

    불법으로 약을 제조하는 자들이 책임 같은 걸 질 리가 없다.

    결국 모르고 비싼 값을 치른 사람들만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는 것이다.

    정작 살리고자 하는 목숨까지 잃어 가면서 말이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만일 기혼단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면 피해는 더욱 늘어날 거예요.”

    대궁주의 말은 옳았다.

    기혼단 자체의 중독성과 폐해도 큰데 벌써 이런 부차적인 피해마저 발생하고 있었으니까.

    따각, 따각.

    침묵이 내려앉은 마차 안에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운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대상인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대도시와 역사가 오래된 지역을 중심으로 먼저 시작했어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대궁주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서안과 그 주변 역시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들이지요.”

    과거 장안으로 불리던 서안과 그 주변 지역은 역사에 기록된 첫 도읍지이자 수많은 왕조의 수도였던 곳이다.

    한때는 서역에서 수많은 문물이 서안으로 들어올 정도로 번화한 국제도시였으며 ‘장안’은 큰 도시의 대명사처럼 쓰일 정도였다.

    하지만 몇 차례의 난을 겪으며 서안은 그 위세를 잃고 쇠퇴해 버렸다.

    그래도 그 지리적, 상징적 중요성은 여전해서 지금도 서안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대도시 중 하나였다.

    운현은 처음부터 일대상인이 서안 같은 유서 깊은 대도시에 있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확언할 수는 없어요. 다만 가능성이 높은 건 분명하지요.”

    서안은 넓고 주민은 대단히 많다.

    아무리 설영대의 능력이 출중하다 해도 서안 전부를 살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서안 말고도 살펴야 할 대도시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서안이 아닌 인근의 소도시로 향하는 것이군요.”

    “네. 서안에 들어가는 것은 경솔한 일이에요. 특히 여러분들과 함께라면요.”

    운현 일행에는 각 파의 장로와 가주 들은 물론이고 검성과 객옹을 비롯한 절정고수들이 있었다.

    누군가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알아본다면 그 소식은 순식간에 서안 전역으로 퍼져 갈 것이 분명했다.

    “약재는 어떻게 들여오더냐?”

    문득 객옹이 물었다.

    대궁주는 가볍게 예를 표하고 답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이나 새벽에 들여옵니다. 시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물량이 동일한 것을 보면 어디선가 모아 둔 것을 가져오는 듯 보입니다.”

    “흐음.”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재가 들어오는 때를 알 수 있느냐?”

    “예측은 불가능합니다만…….”

    대궁주는 곰곰 생각하며 답했다.

    “감시 영역을 최대한 넓히면 약재가 제조소에 도착하기 한 시진 전에는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객옹을 바라보았다.

    이검학과 사일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객옹은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따각, 따각.

    관도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일행의 마차는 서안 인근의 소도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콩콩콩.

    의노(醫老)는 언제나처럼 의국에서 약재를 찧고 있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남달랐다.

    똑같은 힘으로 약재를 찧어 가는 의노의 눈빛은 사뭇 섬뜩하기까지 했다.

    덜컥.

    아무런 기척도 없이 의국의 문이 열렸다.

    거칠게 들어선 키가 작고 뚱뚱한 노인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혼단을 만드는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콩.

    의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막 들어온 노인, 인태상을 바라보았다.

    “문제라니? 제조법도 알려 주고 필요한 약재들도 전부 보내 주었는데 무슨 문제란 말이냐?”

    “모른다.”

    인태상은 툭 던지듯 말했다.

    “그걸 알아내는 게 네 일이 아니더냐? 어서 가자.”

    “쯧.”

    의노는 혀를 찼다.

    그는 옆에 있던 천으로 손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놓여 있던 약재들을 정리하고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챙겼다.

    인태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서둘러라. 검 늙은이가 기다리니까.”

    의노는 의아한 표정으로 인태상을 돌아보았다.

    “검옹이 같이 간다고?”

    검옹 지태상이 움직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특히 누군가와 검을 겨룰 일도 없는 이런 상황에는 더더욱 말이다.

    “천태상이 그리하라 하더군.”

    마뜩잖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인태상이 말했다.

    “조심하라고도 했다. 천기가 수상하다고 하니 너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게 좋다.”

    “만일의 경우는 무슨…….”

    의노는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죽을 운명이면 무슨 짓을 하건 다 죽게 마련이지. 이왕이면 내 생전 보지 못한 극독으로 죽었으면 좋겠군.”

    약재와 도구 몇 가지를 챙긴 의노는 몸을 돌렸다.

    성격 급한 인태상은 벌써 의국을 나가고 있었다.

    의노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캄캄한 바깥은 지금이 한밤중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태상, 지태상과 동행한 의노는 서안 바깥에 있는 기혼단 제조소로 향했다.

    그들이 탄 마차는 그리 작지 않았지만 뚱뚱한 인태상과 체격이 좋은 지태상이 자리를 차지한 터라 의노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달빛에 의지하여 마차를 달린 그들은 곧 낡고 오래된 장원에 도착했다.

    유서 깊은 서안의 근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시용으로 지어진 커다란 저택과 쓸데없이 넓기만 한 토지가 딸린 곳이었다.

    의노는 마차를 내리자마자 이곳의 책임자인 수하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냐?”

    “완성된 기혼단에서 썩은 냄새가 납니다.”

    의노의 성격을 아는 수하가 가볍게 예를 표하며 답했다.

    의노는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썩은 냄새라고?”

    “네. 제조 과정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가 보자.”

    의노는 수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수하는 급히 의노를 뒤따랐다.

    주변을 살피던 인태상과 지태상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덜컹.

    의노는 수하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장 기혼단 보관소로 향했다.

    불을 밝히고 호위를 서던 무사들은 의노와 인태상, 지태상을 발견하고는 묵묵히 예를 표했다.

    “으음.”

    인태상은 보관소에 들어서기도 전에 인상을 썼다.

    의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벌써부터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음식물이 썩는 것 같은 역하고 강렬한 냄새였다.

    덜컹.

    문이 열렸다.

    의노의 앞에 은은하게 불을 밝힌 보관소 내부가 보였다.

    검은 기혼단은 윤기마저 흐르고 있었지만 그 냄새는 지독할 정도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의노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하는 역한 냄새에 욕지기가 올라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답했다.

    “만 하루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뭐라고?”

    인태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저기 오래된 것들도 이미 썩고 있는데 만 하루가 안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부패하려면 결코 하루로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기혼단은 금방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곳에 보관된 것들 중 오래된 것은 석 달 전에 제조되어 숙성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들마저 이미 썩은 내를 풍겨 내고 있는데 만 하루가 안 되었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너희가 보관을 허술히 하고…….”

    “하루가 안 된 것이 맞다.”

    의노의 목소리가 인태상의 말을 끊었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기혼단을 들어 올렸다.

    뭉클.

    냄새처럼 기혼단은 반쯤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의노는 그 일부를 손가락을 찍어 서슴없이 입 안으로 가져갔다.

    잠시 맛을 음미하던 의노는 인상을 쓰며 신음을 흘렸다.

    “뭐냐?”

    인태상이 물었다.

    의노는 입안에 있던 것을 뱉고는 말했다.

    “시독(屍毒)이다. 게다가 독기의 발현을 늦춰서 나중에야 효과가 나타나도록 했어. 하지만 일단 부패가 시작되면 그 주변에 있는 것들마저 급속도로 썩게 만들지.”

    슥.

    고개를 든 의노는 보관소 내부를 살펴보았다.

    어두운 불빛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곳저곳에 시커먼 얼룩이 생겨나고 있었다.

    “단단한 목재마저 이러한데 기혼단처럼 섬세한 약은 말할 것도 없다. 이곳의 기혼단 전부가 부패하는 데 반 시진도 안 걸렸을 게다.”

    인태상은 인상을 썼다.

    “그런 독이 대체 어떻게 들어왔단 말이냐?”

    의노는 자신의 손에 묻은 기혼단의 잔해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아마도 약재에 장난을 쳤겠지.”

    “약재에?”

    의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십 단계의 기혼단 제조 과정에서도 전혀 들키지 않고, 이렇게 보관소까지 들어와서 멀쩡한 것들까지 부패하게 만들도록 말이다. 이 정도라면…….”

    의노는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이곳의 기혼단만이 아니다.

    약재에 있던 시독은 이미 이곳 전체로 퍼져 나갔을 것이 분명했다.

    “가히 예술의 경지다.”

    허탈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의노는 말했다.

    의노 일생일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기혼단을 망쳐 버린 상대는 결코 예사 인물이 아니다.

    의술과 약재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기혼단의 약학적 구조를 파악하기 전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기혼단을 만들어 낸 의노 자신조차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제조 작업을 중단시켜라.”

    의노는 담담한 목소리로 수하에게 말했다.

    “지금 있는 약재들을 전부 폐기하고 도구들도 모두 불태워라. 약재를 만진 사람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른 곳으로 데려가 깨끗이 씻기고, 입고 있던 옷들과 소지품도 전부 소각해라.”

    수하는 놀란 표정으로 의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이 제조소 전부를 폐쇄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의노는 말없이 썩어 가는 기혼단을 바라보았다.

    남들에겐 기이한 환약일 뿐이지만 의노에겐 자식 같은 기혼단들이 썩어 가는 이곳은 지금 무덤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다. 시독이 어디까지 퍼졌을지 알 수 없는 이상 여길 다시 사용할 수는 없어.”

    “늦었다.”

    그건 검옹 지태상의 목소리였다.

    의노가 돌아보는데 인태상도 혀를 찼다.

    “쯧.”

    인태상은 인상을 쓰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나타난 것 같군. 약재에 장난을 친 자가 말이다.”

    사락.

    어둠 사이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새카만 허공 속에서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마치 신선인 양 부드럽게 내려서는 한 명의 노인.

    그는 바로 객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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