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희생의 대가(對價)
수군의 쾌속선이 부두에 정박하고 운현 일행은 배에서 내렸다.
대궁주는 공손히 예를 표했다.
“북해의 푸른 늑대께 대궁주가 예를 표합니다.”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대궁주님.”
“네. 오랜만이에요.”
고개를 든 대궁주가 답했다.
운현은 흘깃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차 옆에는 북해의 무사, 빙혼이 서 있었다.
운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혼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고개를 숙여 답하며 운현이 말했다.
“삼궁주께서는 오지 않으셨나 보군요.”
삼궁주는 대궁주의 동생이자 과거 북해까지 동행했던 소궁주다.
어딘가 허술한 듯하면서도 대궁주를 닮아 귀여웠던 그녀를 운현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대궁주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하게도 외청 부청주는 문파의 일이 바빠 오지 못하였어요.”
외청 부청주는 삼궁주가 북해일문에서 맡은 직책이다.
그 목소리가 어딘지 날카롭게 들려서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대궁주의 시선은 이미 객옹을 향한 후였다.
“다시 뵙는군요. 어르신.”
대궁주의 예에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전부였지만 대궁주에겐 충분했다.
사락.
대궁주가 고개를 들고 몸을 세웠다.
그녀의 눈동자는 검성 이검학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나지막이 대궁주가 말했다.
“네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검학은 담담한 시선으로 대궁주를 바라보았다.
“북해일문의 문주라니, 빙후가 용케 허락을 했군.”
“그분의 허락 같은 건 필요 없었어요.”
가늘게 웃으며 대궁주는 말했다.
“저는 북해의 대궁주니까요.”
“흠.”
이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궁주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먼 과거의 추억이 스쳐 갔으나 그것은 잠시였다.
저벅.
이검학은 걸음을 옮겨 대궁주를 지나쳤다.
대궁주는 살짝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눈을 뜨고 미소를 머금으며 다른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귀한 분들을 환영합니다. 부족하지만 쉴 곳을 준비했으니 함께 가시지요.”
대궁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문득 사일천과 시선이 마주쳤다.
대궁주의 눈동자가 의아한 빛으로 물드는데,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운현이 얼른 나섰다.
“이분은 사일천 학사님이십니다. 제 선배이시며 ‘일은’이라는 명호로 더 잘 알려진 분이시지요.”
‘일은!’
대궁주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북해일문의 문주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사일천일세.”
대궁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사일천의 흥미진진한 눈빛을 마주했다.
“자네가 북해의 대궁주로군. 운 학사가 하도 칭찬하길래 대체 어떤 사람일까 싶었는데, 과연 그럴 만도 하군.”
“서, 선배님.”
운현이 당황하며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대궁주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지고 사일천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군그래.”
순간 대궁주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빙제님을 아시나요?”
사일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과거 북해빙궁에 계셨던 분과 조금 인연이 있었을 따름이네. 그분도 정말 아름다우시거든.”
대궁주는 잠시 의아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빙제가 북해빙궁에 들였던 비빈은 한둘이 아니며 그들이 낳은 자녀들 또한 많다.
강호 무림의 신비인인 ‘일은’이 그들 중 한 사람과 인연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북해와 인연이 있으시다니 정말로 반가워요.”
미소를 지은 대궁주는 일행을 향해 말했다.
“그럼 가시지요.”
사박.
대궁주는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크고 하얀 그녀의 마차 외에도 여러 대의 화려한 마차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박.
운현을 지나치던 대궁주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운현에게 말했다.
“아, 맹주님. 혹시 제 마차에 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물론 괜찮습니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가 대궁주의 마차에 탄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대궁주는 가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혹시 다른 여인의 마차에 타는 것을 꺼려 하시지는 않을까 싶어서 여쭤 봤어요. 요즘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연인을 배려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들어서요.”
“연인요? 아니, 저는 그런…….”
“괜찮으시다니 다행이군요.”
대궁주는 담담한 어조로 운현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박, 사박.
운현은 대궁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아이는 여전하구나.”
문득 객옹이 말했다.
대궁주를 바라보던 객옹의 시선이 운현을 향했다.
“너를 만나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말이다. 그리고 너도.”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대궁주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당황하게 된다.
마치 예전 그녀를 처음 만났던 때처럼 말이다.
“가시지요.”
운현의 말에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막 마차에 오르는 대궁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대궁주를 바라보는 사일천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는 것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
대궁주의 마차에 탄 사람은 객옹과 운현만이 아니었다.
빙설은 물론 검성 이검학과 사일천까지, 마차에는 모두 여섯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각, 따각.
부두를 떠난 마차는 중경 시내를 향해 내달렸다.
운현은 맞은편에 앉은 대궁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궁주는 고개를 돌린 채 밖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지만, 대화를 거절하는 분위기가 역력해서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시지요?”
문득 대궁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이 고개를 들자 대궁주의 눈동자가 보였다.
“설마 무슨 문제가 있나요?”
대궁주의 눈빛은 사뭇 심각했다.
운현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 싶어서…….”
어색한 웃음으로 운현은 말끝을 흐렸다.
대궁주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옅은 웃음을 흘렸다.
“바빴어요. 북해와 교역을 원하는 상단들이 몰려든 데다가, 맹주님께서 명하신 일들도 해야 했으니까요. 게다가 북해일문은 아직 신흥 문파이니 처리할 문제들이 쌓여 있지요.”
준마와 귀금속은 물론 귀한 약재들까지, 북해의 특산물은 모두가 고가로 거래되는 것들이었다.
폐쇄적인 북해의 특성상 교역량이 적고 제한도 많아서, 북해의 물건을 원하는 상단들에 북해일문은 대단히 중요한 거래처가 아닐 수 없었다.
“거대 상단들에 기혼단의 회수를 요청하셨지요? 처음부터 저에게 말씀하셨다면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물론 상단들에는 이미 압력을 넣어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말하는 대궁주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대궁주는 잠시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시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궁주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빙설에게 기회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는 제가 해야 합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빙설 여협의 도움은 혈교와 마교의 토벌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르신들께도 북해의 무공을 여실히 보여 주었지요.”
빙설을 바라보며 운현이 말을 이었다.
“처음 비무를 할 때도 느꼈지만,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운현의 칭찬에도 빙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성 이검학을 마주할 때만은 빙설의 눈빛도 변했다.
이검학 역시 예전과 다르게 빙설을 보는 시선에 완연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아, 그리고.”
운현이 대궁주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슥.
“늦었지만 설영대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따각, 따각.
말발굽 소리가 마차 안에 울려 퍼졌다.
대궁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운현의 예에 답했다.
“……감사합니다.”
사락.
고개를 든 대궁주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푸른 늑대의 감사를 받다니, 북해의 전사들에겐 분명 커다란 영광이 되겠군요.”
운현은 몸을 바로 했다.
“몇 마디의 말로 그분들의 희생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궁주를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북해일문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굳어있던 대궁주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말을 하셔도 괜찮겠어요? 이곳에는 객옹께서는 물론이고 검성과 일은께서도 계시는데 말예요. 만일 제가…….”
“상관없습니다.”
운현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으니까요.”
대궁주는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군요.”
나지막이 중얼거린 대궁주는 눈을 들었다.
그리고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기억해 주세요. 당신의 뜻을 위해 죽어 간 북해의 전사들이 있음을 말예요.”
“네. 기억하겠습니다.”
운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제가 살아 있는 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해요.”
눈을 빛내며 대궁주는 말했다.
푸른 늑대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북해의 전사들에게는 더 없는 영광이다.
빙제의 예를 받으며 가르침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전설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인물, 그가 바로 북해의 푸른 늑대니까.
“그리고.”
대궁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들에게 목숨을 버리라 명해야 했던 당신의 아픔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운현으로선 지극히 당연한 언급이었다.
운현의 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다름 아닌 대궁주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순간 대궁주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격정을 억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사락.
대궁주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그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따각, 따각.
어느새 마차는 중경의 번화가로 접어들었다.
화려한 중경의 거리가 대궁주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도 감미롭지 않은 그 말에 자신의 가슴이 이렇듯 벅차오를 줄은, 총명한 그녀도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
대궁주가 준비한 숙소는 중경의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고층 누각이었다.
본래 유명한 다루인 이곳을 대궁주가 일행의 임시 숙소로 제공한 것이다.
“좋군.”
천수 신니가 불호를 외며 말했다.
다루 특유의 예스럽고 부드러운 분위기와 은은한 향은 천수 신니의 마음에 쏙 들었다.
화산과 무당의 장로들은 물론이고 제갈명을 비롯한 가주들도 만족스러워 했다.
“어, 그런데 이런 곳은 비싸지 않은가?”
금화영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그녀라도 이곳이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궁주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얼마 전에 북해일문이 사들였으니까요.”
“오오, 그래? 자네 아주 부자인 모양일세.”
대궁주는 조용히 웃음을 머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주들의 눈동자에는 이채가 스쳤다.
중경 한복판의 고급 다루를 부담 없이 인수할 정도라면 북해일문의 재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사이 북해일문이 얼마나 세력을 넓혔을지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신흥 문파들이 겪는 곤란함도, 창룡맹 정식 문파인 북해일문에는 예외였을 테니 말이다.
“혹시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지금 본론을 말해도 괜찮을까요?”
대궁주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장강의 여정이 쉽지 않다지만 이 정도로 피곤해 할 운현 일행이 아니다.
눈을 빛내는 일행의 반응에 대궁주가 빙긋 웃었다.
“기혼단의 제조 장소로 추정되는 곳은 중경 외곽에 네 곳, 그리고 서안 인근에 세 곳이에요.”
붉은 입술을 반짝이며 대궁주는 입을 열었다.
“그중에서 중경의 네 곳과 서안의 두 곳은 사설 약재소나 의원으로 판명되었어요. 물론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하셔도 좋아요.”
“그럼…….”
“네.”
운현의 목소리가 채 이어지기도 전에 대궁주는 말했다.
“기혼단의 제조 장소는, 바로 서안 인근에 있어요.”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얼음꽃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