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인연(因緣)
운현은 일아영이 가져온 소식에 대해 즉시 행동에 나섰다.
영호준을 통해 거대 상단에 서찰을 보내 기혼단을 회수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약재 등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곳은 각별히 예의 주시하도록 요청했다.
서안과 중경에서 비교적 가까운 화산파, 무당파, 소림사에 상황을 설명하는 서찰을 보내 만일을 대비했으며 당문과 모용세가는 물론 북해일문에도 알렸다.
“장강 유역을 따라 퍼지는 것도 무시할 수 없어요.”
모용미가 지도를 살펴보며 말했다.
“남궁세가와 공손세가에 특별한 주의를 당부하고 창룡맹 문파 전부에 알려 경계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영호준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가뜩이나 민심이 흉흉하긴 합니다만, 모르다가 당하느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주의를 하는 것이 좋지요. 그냥 주의하라고만 하면 실감을 못 할 테니, 무당이나 화산에서 있었던 기혼단의 폐해도 슬쩍 흘리기로 하지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은 마침 잘됐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이 기회에 맹주님과 어르신들의 공적도 널리 알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자파의 어른이 공을 세웠다는데 싫어할 문파는 없을 테니까요. 자꾸 조심하라고만 하면 반발이 생기니, 이렇게 얼러 주기도 해야지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영호준의 말에 운현도 동의했다.
사람은 사실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문제는 중경과 서안에 누가 가느냐인데…….”
영호준은 슬쩍 운현을 돌아보았다.
“제가 말려도 맹주님은 가시겠지요?”
“네.”
운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제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영호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런 때에는 오히려 맹주님께서 총단에 계시는 편이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도 위험한 일이 다 지나갔다고들 생각할 테니까요. 하지만 맹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말하던 영호준은 객옹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르신께서도…….”
객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준은 다시한번 탄식을 흘렸다.
“이거 연 매에게 혼나겠군요. 왜 어르신을 힘드시게 하냐고.”
무엇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다른 어르신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마 여기 계시지 않을까요?”
운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다들 비무에 바쁘실 테니 말입니다.”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 들은 이미 항주 외곽의 저택으로 향했다.
검성 이검학이 제한 없는 비무를 선언한 탓에 그들은 사뭇 흥분해 있었다.
물론 검성이 내키는 상대여야 한다는 조건은 있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일은까지 함께 있으니 흥분이 안 될 리가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따로 호위는…….”
영호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지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주변 문파의 도움을 얻으면 될 테니까요.”
중경과 서안 인근에는 화산과 무당은 물론이고 당문과 공동파도 있다.
여차하면 언제든 달려올 이들이니 만약의 경우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지만…….”
모용미가 아쉬운 듯 말했다.
“여기서 할 일들이 중요하니 어쩔 수가 없네요.”
총명한 그녀라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민심이 불안정할 때는 창룡맹 대외총괄인 그녀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소저께서 이곳에 계셔 주시니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모르겠군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모용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답했다.
“네. 운 학사님.”
“그럼 이번 일은 두 분만 가시게 되겠군요.”
영호준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창룡맹에 있어야 하는 것은 영호준도 마찬가지였다.
관군을 도와 마교의 군세를 패퇴시킨 소식이 알려지며 강호 무림의 시선이 일제히 창룡맹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대외총괄 모용미만으로는 그 모든 문의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중경과 서안으로 가는 사람은 운현과 객옹으로 결정되었다.
그때만 해도 말이다.
***
항주 외곽.
옛 창룡맹 총단 저택의 후원에는 무당과 화산의 장로들, 그리고 세가의 가주들과 절정고수들이 앉아 있었다.
벌써 비무가 있었던 듯 후원에는 여기저기 참격의 흔적이 가득했다.
사실 이제는 후원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일행은 한쪽 구석에 탁자를 놓고 앉아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래? 중경으로 간다고?”
사일천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방금 운현과 객옹이 찾아와 그간의 일을 말해 준 터였다.
“그럼 나도 함께 가세.”
“네?”
운현은 의외의 눈빛으로 물었다.
객옹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말이냐?”
사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경에 가 본 지도 오래되었고.”
달칵.
찻잔을 놓으며 사일천은 미소를 지었다.
“나라면 기혼단의 제조를 아무에게나 맡기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일세.”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선배님도 그리 생각하셨군요.”
기혼단의 제조는 어렵고 복잡한 과정이다.
고가의 약재를 사용하는 데다가 결코 외부로 새어 나가선 안 되는 일이니, 문왕이나 일대상인이 아무에게나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혼단을 만드는 곳은 어떤 식으로든 일대상인과 직접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 오해는 하지 말게. 내가 나서서 뭘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사일천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하지만 운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럼 같이…….”
“흠.”
옆에서 듣고 있던 검성 이검학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럼 나도 가지.”
“뭐라고?”
이번엔 객옹도 놀랐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검학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검학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대상인은 일전에 만났던 그 암천무제라는 아이의 주군 아니냐? 그런 자라면 나도 당연히 관심이 있지.”
이검학은 빙긋 웃었다.
“제법 기대가 되는군.”
객옹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이검학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검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후.”
결국 객옹이 한숨을 쉬었다.
“좋다. 허나 검을 겨루겠다고 나서서 현이를 방해하지는…….”
“우리도 가겠습니다.”
문득 군자검 제갈명이 말했다.
객옹은 물론 운현마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제갈명의 표정은 단호했다.
“일대상인과 문왕이 강호 무림에 끼친 해악은 참으로 큽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맹주님만의 일이겠습니까?”
비검 공손월과 관일검 모용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의 장로인 태을 진인이 나지막이 도호를 외웠다.
“또한 그들은 이미 문왕과 마교를 통해 각 문파에 크나큰 해를 입혔소이다. 그러니 일대상인과 연관된 일에 우리 역시 무관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오.”
무당의 청송 진인과 아미의 천수 신니도 도호와 불호를 외며 동감을 표시했다.
노부인 능세영도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자들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지만, 혈교가 다시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니 얼굴 정도는 꼭 한 번 보고 싶군그래.”
옆에 있는 금화영은 혹여 자신을 빼놓을까 싶었는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일문의 빙설에겐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운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렇군요.”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여러분의 말씀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 함께 가실까요?”
이의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즐거워하자 객옹은 코웃음을 흘렸다.
“흥. 귀찮은 것들 같으니…….”
하지만 객옹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운현 자신 역시 아까부터 느껴지는 가슴속의 뜨거움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턱.
문득 사일천이 손이 운현의 어깨에 얹혔다.
“잘됐군.”
사일천은 운현을 보며 말했다.
“황궁의 고고한 학사보다야 이런 인연들이 훨씬 낫지. 그렇지 않나?”
운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 가고 있었다.
***
총군사 영호준과 대외총괄 모용미의 배웅을 받으며 운현 일행은 항주를 떠났다.
돌아온 지 겨우 닷새 만의 일이었지만 불만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노년에 이렇게 활약할 줄은 몰랐다’고 너스레를 떨거나 ‘자식들에게 자랑할 일이 생겼다’며 즐거워하기까지 했다.
사일천은 ‘역시 돈이 많으니 여행이 편하군’이라며 좋아했고 검성 이검학 역시 ‘여럿이 다니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객옹은 계속 언짢은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마차를 타고 남경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수군의 쾌속선으로 갈아탔다.
그리고 도도한 장강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촤아아.
수군의 쾌속선은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영호준이 미리 세심하게 계획한 덕에 쾌속선은 장강 주요 지역에 정박하며 휴식을 가졌고, 그때마다 일행은 각 지역의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일행이 모두 가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영호준이 ‘어르신들은 무조건 입이 즐거워야 한다’며 제일 중요하게 고려한 것이 바로 식사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행은 적어도 먹는 것에 관해서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장강을 거슬러 올라간 배가 중경에 다다랐을 때였다.
쾌속선이 천천히 부두에 접근했다.
선원들은 도착 준비로 바빴지만 일행은 느긋하게 뱃전에 서서 중경 시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탓.
“응?”
쾌속선의 뱃전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마치 한 마리 날렵한 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른 그림자는 허공중에서 가볍게 몸을 뒤틀었다.
파라락.
옷자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부두에 내려서는 그녀는 바로 빙설이었다.
‘아!’
운현은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두에 서 있는 크고 하얀 마차는 바로 북해일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락.
빙설이 몸을 낮추고 예를 표했다.
그러자 마차의 문이 열렸다.
달칵.
내려선 사람은 바로 북해의 대궁주였다.
그녀는 빙설을 내려다보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했어요. 빙설.”
그건 북해의 언어였다.
빙설은 고개를 들었다.
“명하신 대로 행했을 뿐입니다. 대궁주님.”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고 낯설었다.
하지만 대궁주는 미소를 지었다.
“좋은 경험이었나 보군요. 당신의 그런 만족스러운 눈빛은 처음 보는걸요?”
빙설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빙설이 운현과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대궁주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궁주는 조용히 말했다.
“일어서도 좋아요.”
사락.
빙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궁주는 몸을 돌렸다.
부두에 접안 중인 쾌속선의 뱃전에는 운현과 객옹, 그리고 일행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흰색 마차도, 빙설도 아닌 대궁주를 향해 있었다.
“……대단하군.”
제갈명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궁주의 미모는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본 그녀의 아름다움은 소문 이상이었다.
투명한 얼음꽃 같은 대궁주의 모습에 모두들 놀란 눈빛이 역력했고 장로들조차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마치 황실의 여인처럼 은은한 기품마저 느껴지니, 천수 신니는 물론 능세영도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금화영은 아예 입을 떡 벌리고 대궁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이제 귀한 분을 환영할 차례군요.”
대궁주가 북해의 언어로 말했다.
“우리의 운명을 쥔 북해의 푸른 늑대께서 찾아 오셨으니 말예요.”
뱃전에 서 있는 운현을 바라보며 대궁주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오고 지나던 사람들마저 발길을 멈췄다.
그녀의 미소는 주위마저 환하게 밝히는 듯했다.
“일대상인의 거처는 찾으셨습니까?”
빙설이 나지막이 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운현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대궁주는 말했다.
“귀한 분께 드릴 예물은 충분히 준비했으니까요.”
빙설은 흘깃 대궁주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아름답고 차가웠다.
하지만 그 눈빛에 어딘가 따뜻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을 빙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철썩.
나지막한 물소리와 함께 쾌속선이 부두에 닿았다.
길고 여유로웠던 장강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