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507화 (507/530)

507화. 불안의 여파

운현 일행이 탄 마차는 항주 창룡맹 총단을 향해 내달렸다.

쭉 뻗은 관도를 지나 총단 정문에 도착한 일행을 맞이한 것은 다름아닌 대외총괄 모용미의 환한 미소였다.

달칵.

마차 문이 열리고 영호준과 운현이 내려섰다.

“어서 오세요. 맹주님.”

모용미가 웃으며 말했다.

운현 역시 미소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모용 소저. 굳이 나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제가 나오고 싶었으니까요.”

모용미는 마차에서 내리는 객옹에게도 예를 표했다.

그러다 검성 이검학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네.”

운현이 웃으며 모용미에게 말했다.

“검성이십니다.”

사락.

모용미는 즉시 이검학에게 예를 표했다.

“검성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모용세가의 모용미라고 합니다.”

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다들 네 칭찬이 자자하더군.”

“감사합니다. 어르신들께서 좋게 보아주신 덕분이지요.”

모용미는 고개를 들고 웃음을 머금었다.

운현이 모용미에게 사일천을 소개했다.

“아, 그리고 이분은 사일천 학사님이십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일은’으로 더 잘 알려진 분이기도 하고요.”

“네?”

모용미는 당황했다.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일은’이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자 그 누구도 보지 못한 신비인이 눈앞에 있으니 아무리 모용미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용미는 곧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사일천 님이시군요. 저는 모용미라 합니다.”

고개를 든 모용미는 미소를 지었다.

“운 학사님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특히 예전 황궁에 계실 때 이야기를요.”

“후후. 나도 가끔은 그때가 그립다네.”

사일천 역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일천일세.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요.”

인사를 마친 모용미는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맹주님. 갑자기 죄송하지만 일아영 소저가 맹주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일아영 소저가요?”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의형의 딸이자 호암상단의 총감찰인 일아영이 이곳까지 찾아온 건 의외의 일이었다.

“네.”

모용미가 조용히 말했다.

“중요한 일이에요.”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모용미가 내용을 밝히지 않은 것은 일행이 있기 때문이리라.

“알겠습니다.”

운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총군사 영호준을 돌아보았다.

“어르신들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총군사께서도 곧바로 와 주십시오.”

“네, 맹주님.”

영호준은 즉시 운현의 명을 받들었다.

“자,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총군사 영호준은 미소를 지으며 일행에게 말했다.

일행이 영호준의 안내를 따라 창룡맹 총단 안으로 들어가고, 모용미는 그들에게 공손히 예를 표했다.

객옹은 당연하다는 듯 운현 옆에 남았다.

일행이 창룡맹 총단 안으로 사라지자 운현과 객옹은 모용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무슨 일입니까?”

걸음을 옮기며 운현이 물었다.

모용미는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답했다.

“……기혼단이 나타났어요.”

순간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운현의 표정도 굳었다.

화산과 무당의 많은 제자들을 폐인으로 만들었으며 몇몇은 끝내 이지를 상실한 괴물로 전락시켰던, 잠시 사라졌던 기혼단이 기어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가자.”

객옹은 그렇게 말하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모용미가 얼른 걸음을 재촉하고, 운현 역시 굳은 표정으로 객옹을 뒤따랐다.

***

운현과 객옹, 모용미는 맹주전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들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영호준과 일아영이 거의 동시에 맹주전으로 들어왔다.

“운 숙부.”

일아영이 웃으며 말했다.

운현 역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영아.”

일아영은 단정한 모습으로 운현에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운현 역시 정중하게 답했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모용 언니로부터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일아영은 운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느새 친해졌는지 일아영은 모용미를 언니라 부르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 많으셨다던데,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고마워. 형수님은 건강하시고?”

“네. 덕분에요.”

운현은 빙긋 웃으며 일아영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아영과 영호준이 자리에 앉자 시녀가 차를 가져왔다.

부드러운 차향이 피어오르고 운현은 찻잔을 들었다.

“중요한 일이라던데, 무슨 일이지?”

달칵.

일아영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얼마 전부터 시중에 수상한 약이 은밀히 나돌기 시작했어요. ‘소생단’이라고 해서 죽을 목숨조차 한 번은 살려 준다는 물건이었지요.”

운현의 눈이 빛났다.

일아영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민란과 마교의 군세에 대한 소문으로 민심이 워낙 흉흉하던 터라 소생단은 암암리에 퍼져 나갔어요. 소규모 불법 상단들을 통해 은밀하게 거래되어서 세간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최근 이 소생단이 갑자기 공개적으로 나돌기 시작한 거예요.”

사락.

일아영은 작은 목함 하나를 꺼냈다.

한눈에도 조잡한, 나름 고급스럽게 보이려고 새긴 문양이 오히려 더욱 이상한 느낌을 주는 목함이었다.

“이게 바로 그 소생단이에요.”

그 목함을 보는 순간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아영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혹시 일전에 말씀하셨던 기혼단이 이것 아닌가요?”

달칵.

운현은 손을 뻗어 목함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카만 기혼단이 목함 안에 놓여 있었다.

탁.

운현은 목함을 닫고 일아영에게 물었다.

“……세간에는 얼마나 퍼졌지?”

“생각보다 많지는 않아요.”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많지 않다고?”

“네. 갑자기 여기저기서 유통되기 시작했지만 의외로 거래량은 적어요. 공급도 꾸준하지 않고요. 아마도 이걸 취급하던 불법 상단들이 자신들의 물량을 던져 버린 것 같아요.”

“던지다니? 그럼…….”

“네. 급히 처분했다는 뜻이지요.”

일아영은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운 숙부께서 마교의 군세를 물리치고 난주를 회복하셨으니까요.”

“아!”

옆에 있던 모용미가 탄성을 흘렸다.

“그렇군요. 마교의 군세가 토벌되니 가격이 폭락할 것을 예상하고 한 번에 물량을 풀어 버린 건가요?”

좋은 가격을 받고 싶은 것은 상인의 본능이다.

난주가 수복되고 마교의 기세가 토벌되니, 그간 사람들의 불안 심리에 편승하여 비싼 값을 받던 상단들이 너도나도 기혼단을 처분하려 하는 것이다.

마치 물건을 던져 버리듯이 말이다.

일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호암상단에까지 물건이 들어오게 된 거예요.”

작은 목함을 노려보며 일아명은 말을 이었다.

“본래라면 이런 물건에는 관여하지 않았겠지만 제 권한으로 명을 내려 보이는 대로 전부 사들이도록 했어요. 물론 호암상단이 아닌 다른 이름을 빌려서요.”

바스락.

일아영은 품에서 얇은 서찰을 꺼내 탁자에 펼쳤다.

서찰에는 글 대신 간략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 물건을 입수한 상단들의 영역을 표시한 거예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장강 유역, 그중에서도 중경과 서안에 몰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운현은 일아영이 꺼낸 지도를 바라보았다.

일아영은 손가락으로 중경과 서안 인근을 짚었다.

“중경과 서안은 마교의 군세가 일어났던 감숙과 가까워요. 그러니 이곳에 기혼단이 퍼진 것도 어쩌면 당연할 거예요.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도 있지요.”

“기혼단의 공급 자체가 중경이나 서안 부근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 말이군요.”

모용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언니 말대로예요.”

일아영은 눈을 들었다.

“호암상단이 전력을 다해 회수하고는 있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어요. 어쩌면 이 기혼단은 마교의 군세보다 더 큰 위협일지도 몰라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아영은 말했다.

그 강직한 눈빛은 그녀의 선친이자 운현의 의형, 일충현과 똑같았다.

“운 숙부. 이것들을…….”

“그래. 알았다.”

빙긋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말했다.

“이것들은 내게 맡겨라. 반드시 뿌리를 뽑을 테니까.”

일아영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머금었다.

“고마워요. 운 숙부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일아영은 찻잔을 들었다.

한동안 못 본 사이 일아영은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운현은 가만히 찻잔을 매만졌다.

“아영아. 혹시 괜찮으면 북경에 가 줄 수 있을까?”

차를 마시던 일아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운 숙부의 부탁이라면 시간이야 얼마든지 내겠지만……. 갑자기 북경을요?”

“응. 황궁에 있는 분이 널 만나 보고 싶어 하셔서.”

일아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궁요? 아, 박 공공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리고 다른 사람도 같이 만날 거고. 주로 상단의 활동이나 관행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신다더구나.”

황태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황실의 일이 본래 기밀이기도 한 데다, 혹시 일아영이 너무 부담감을 느낄까 싶어 배려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가요? 그럼 괜찮아요.”

일아영은 미소를 지었다.

“운 숙부 덕분에 황궁 구경도 다 해 보겠네요. 언제 가면 돼요?”

“아마 정식으로 초청이 오지 않을까 싶은데?”

박 공공이 하는 일이니 분명 정식으로 사람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간을 낼 준비를 해야겠네요. 아, 운 숙부.”

차를 마시던 운현이 일아영을 바라보았다.

일아영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환관들은 목소리도 가늘고 행동도 여자 같다던데, 정말 그래요?”

운현은 하마터면 차를 뿜을 뻔했다.

“크흠.”

헛기침을 한 후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사람도 있지만 아닌 사람도 있지. 그런 걸로 선입견을 갖는 건 좋지 않은 일이란다.”

“참 내. 누가 선입견을 갖는다고 그래요? 그냥 물어보는 건데.”

“우리에겐 별 의미 없는 말이라도 듣는 사람에겐 상처가 될 수 있거든.”

운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일아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으. 이럴 때 보면 운 숙부도 정말 옛날 사람이라니까요. 알았어요.”

살짝 기분이 상한 듯 고개를 돌리던 일아영은 옆에 있던 모용미와 눈이 마주쳤다.

“언니도 고생이네요. 이런 운 숙부와 함께 일하려면요.”

그건 운현을 놀리기 위한 말이었지만 모용미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전 그래서 더 좋은걸요.”

일아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내가 잘못 물었네.”

“그건 그렇습니다.”

조용히 있던 영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 매가 무슨 짓을 해도 내 눈에는 그저 귀여워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묻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은 말을 영호준은 짐짓 자랑스레 말했다.

일아영은 어이가 없었다.

강호 무림을 울리는 창룡맹 총단에, 그것도 맹주인 운현 주위에 어째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창룡맹의 총단이라면 보기만 해도 무서운 기세를 지닌 사람들이 가득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나마 그 인상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바로 객옹이다.

일아영은 슬쩍 객옹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보기에도 객옹의 분위기는 남달랐다.

하지만 눈이라도 마주치면 아무 이유 없이 꾸중이 날아올 것 같은 기세여서, 일아영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차를 홀짝였다.

객옹 역시 담담히 차를 음미했다.

그러나 아까부터 그의 시선은 탁자에 놓인 목함에 못 박혀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