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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506화 (506/530)

506화. 연이은 재회

운현 일행은 남경의 부두에 내려섰다.

긴 여정 끝인 데다 남경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지만, 일행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중년의 학사, 사일천 때문이었다.

“오랜만일세, 일은.”

노부인 능세영이 친근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일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은은 내 명호가 아닐세. 하지만 오랜만이군. 천일검.”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정말로 낯선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노년의 능세영과 중년의 사일천이 서로 친구처럼 평대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아, 그러고 보니 천일검이라는 명호는 제자에게 물려주었다고 했던가?”

“그래. 저기 있는 천방지축이 내 제자일세.”

능세영이 금화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사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를 닮아서 제자도 미인일세.”

능세영은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기분은 좋군.”

“말도 안 된다니? 본래 제자는 스승을 닮기 마련이라네.”

사일천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문득 객옹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천일검을, 아니 능 여협을 낫게 해 주었다지?”

객옹은 눈살을 찌푸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능세영은 객옹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래. 저 남자가 날 돌봐 주었다네. 내게 혈교를 떠맡긴 어떤 남자와는 아주 다르게 말이야.”

객옹을 향한 능세영의 시선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찌푸렸던 객옹의 눈살이 살짝 펴졌다.

능세영은 다시 사일천을 돌아보았다.

“헌데 자네는 정말 그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뭐 좋은 거라도 먹었나?”

사일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능세영을 지긋이 바라보던 사일천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많이 변했군. 그리도 차갑고 날카롭던 천일검이 말일세.”

“나이가 들었으면 아무래도 좀 둥글둥글해져야 하지 않겠나?”

미소를 머금은 채 능세영이 말했다.

“어린 제자를 키우다 보니 성격이 좀 바뀐 것도 있고.”

사일천은 능세영을 변하게 한 사람이 그녀의 제자, 금화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가? 잘됐군.”

그 말에 노부인 능세영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때 객옹이 문득 말했다.

“네가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냐?”

“놀러 왔네.”

사일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쯤이면 자네들이 이곳에 올 때가 되었다 싶어서.”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사일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나 말고 한 사람 더 있네.”

슥.

사일천은 고개를 돌렸다.

운현과 객옹은 물론 일행들의 시선이 전부 사일천이 바라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곧 운현과 객옹, 그리고 능세영의 표정이 변했다.

저벅.

누군가 건물 사이로 걸어 나왔다.

천하에 누가 그 이름을 모르랴?

마치 노학사처럼 흰 수염을 길렀지만 건장한 체격과 거친 기세,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을 가진 그는 바로 검성 이검학이었다.

“자네들을 기다리다가 만났네.”

사일천이 웃으며 말했다.

“이곳을 거쳐 항주로 가려 한 모양이더군. 어차피 이곳으로 올 터이니 같이 기다리자고 했지.”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장로와 가주 들 그리고 절정고수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르신!”

운현이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벅.

이검학은 발을 멈췄다.

그는 운현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이검학은 고개를 돌려 객옹을 향했다.

“그리고 자네도.”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네도? 내가 덤이냐?”

이검학은 피식 웃었다.

“자네는 여전하군. 그럴 의도는 없었네. 그냥 인사였을 뿐이야.”

그의 말에 객옹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하진 않았다.

슥.

이검학이 장로와 가주, 절정고수 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난폭한 기세가 일행을 향해 다짜고짜 쏟아져 나왔다.

화아아악.

“큭.”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인 데다, 이검학이 뿜어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주와 절정고수 들은 곧 내력을 끌어 올려 이검학의 기세에 대항했다.

“호오.”

이검학의 표정이 변했다.

강렬한 그의 눈빛에 스친 것은 바로 호기심이었다.

“쯧.”

객옹이 혀를 찼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저었다.

훅.

이검학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다.

객옹은 이검학을 향해 말했다.

“그 버릇 좀 고치라고 누차 말하지 않았더냐?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그 말에 이검학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태을 진인과 청송 진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가주나 절정고수 들과 달리 이검학의 기세를 감당해 내지 못한 것이다.

천수 신니의 표정도 그리 좋지 못했다.

“이거 미안하군. 내가 실수했네.”

이검학은 그들에게 사과했다.

장로들과 천수 신니는 도호와 불호를 외며 들끓는 내기를 애써 다스렸다.

“괘, 괜찮소이다.”

천수 신니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한때 스스로 검성과 비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것은 천수 신니만이 아니어서, 다른 가주들과 절정고수들의 표정 역시 그리 좋지 못했다.

“그사이 많이들 변했군.”

이검학이 가주와 절정고수 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괜찮으면 나와 비무를 해 주지 않겠나?”

그 말에 일행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검성 이검학이 그들의 경지를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입니다!”

철검 남궁벽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언제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의 눈빛은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다른 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자검 제갈명은 정중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언제든 좋습니다. 대협.”

비검 공손월과 관일검 모용단천 역시 고개를 숙였다.

“아, 저기 나도!”

금화영이 질세라 얼른 손을 들었다.

이검학은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아. 오랜만에 돌아온 보람이 느껴지는군.”

그 말에 객옹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이라니? 너는…….”

객옹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검학은 바로 얼마 전에 떠난 것 같았지만 생각해 보니 그간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일은을 찾아내고 태평맹의 강남 공략을 무산시켰으며 공동파와 협력하여 혈교와 마교까지 토벌하지 않았는가?

가주와 절정고수들의 변화 역시 검성 이검학이 떠난 후에 일어난 일이다.

객옹은 하려던 말을 끊고 담담하게 물었다.

“갔던 일은?”

“별것 없었다.”

검성 이검학이 말했다.

“차라리 이곳에 와서 일은을 다시 만난 것이 더 놀라웠지.”

이검학은 사일천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역용도 아닌데, 대체 어찌한 것인가?”

사일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행의 시선은 일은을 향해 못 박혀 있었다.

사실 아까부터 모두가 궁금해 하던 것이기는 했다.

검성 이검학이나 객옹과 함께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일은이 이토록 젊다니 말이다.

사일천은 입을 열었다.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세월을 흘려보내니 이리되었다네.”

이검학도, 객옹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로나 가주 들은 곰곰히 그 말을 곱씹고 있었다.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하고.”

사일천이 운현을 향해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갈 셈인가?”

“일단 천하제일루로 가려 합니다. 아, 벌써 가 보셨겠군요.”

“아니, 아직일세.”

“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일천을 바라보았다.

사일천은 천하제일루의 누주인 예인 월향과 아는 사이였다.

애초에 일은의 정체를 알게 된 것도 사일천이 월향을 통해 남긴 단서 덕분이었는데 아직 가 보지 않았다니?

“나도 여기 온 지 며칠 안 돼서. 게다가 이 친구도 만났고.”

사일천은 짐짓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운현은 어쩐지 그가 쑥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렇군요. 마침 저희도 이곳에서 잠시 머물려던 참이니 함께 가시지요.”

운현의 말에 사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다가닥. 다가닥.

사일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마차들이 부두로 다가왔다.

영호준의 연락을 받고 천하제일루에서 보낸 마차였다.

물론 월향은 사일천이 오는 건 모르고 있겠지만 말이다.

“흠, 기루라.”

이검학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기루도 참으로 오랜만이로군.”

“자네 같은 사람도 기루에 간 적이 있나?”

객옹이 핀잔을 주듯 이검학에게 말했다.

검성 이검학은 검에 미친 사람이라고까지 일컬어진다.

그런 그가 기루에 가 보았다고 하니 객옹이 그렇게 물은 것도 당연했다.

이검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고수들 중에는 기행을 일삼는 자가 많아서 하루 종일 기루에 처박혀 있는 자도 있었으니까. 내가 직접 찾으러 갔었네만 기대만큼 고수는 아니었네.”

객옹은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검학이 기루를 가다니 별일이다 싶었는데 결국 그조차 비무 상대를 찾으러 간 것이었다니 말이다.

“그렇다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영호준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보증컨대 천하제일루는 정말로 최고니까요.”

그는 벌써부터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자, 어서 가시지요.”

영호준은 재촉하듯 말하고는 앞장서서 마차로 걸어갔다.

운현은 빙긋 웃으며 일행에게 말했다.

“저희도 가지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일행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푸르른 하늘 아래 고요히 흐르는 장강을 뒤로하고, 운현은 일행과 함께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

천하제일루에 도착한 일행은 언제나처럼 환대를 받았다.

우아한 모습으로 일행을 맞이하던 누주 월향은 사일천을 보고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사일천은 오랜만이라며 부드럽게 웃었지만 놀란 표정의 월향은 결국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그때 당황한 사일천의 표정은 그를 익히 알고 있는 운현조차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월향의 눈물은 잠시였을 뿐, 그녀는 천하제일루의 누주답게 곧 안정을 되찾았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월향은 일행을 대접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직접 칠현금을 가지고 나와 연주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는 칠현금의 소리와 어우러져 사뭇 애절한 느낌을 담아 내고 있었다.

검성 이검학조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한 음률은 역시 목소리로군’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자네의 음률이 예전보다 더 낫군’이라는 사일천의 말에 월향이 더욱 기뻐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월향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일행은 사흘간 남경에서 머물렀다.

사흘 후, 월향의 배웅 속에 일행은 항주로 향했다.

마차에 탄 가주와 절정고수 들의 표정엔 기대와 흥분이 가득했다.

다름 아닌 검성 이검학과 비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동경의 대상이자 거대한 벽이었던 검성 이검학이 비무를 원한다는 것은 곧 그와 검을 맞댈 자격을 인정받은 셈이었으니 말이다.

따가닥, 따가닥.

마차는 항주 창룡맹 총단을 향해 내달렸다.

그렇게 마차가 관도를 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침묵하던 객옹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객옹은 사일천에게 물었다.

“갑자기 이렇게 온 이유가 뭐냐?”

사일천은 빙긋 웃었다.

“자네들을 보러 왔다네. 이미 말했듯이 말일세.”

“그리고 우연히 이검학을 만났고?”

객옹의 말에 사일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피식 웃음을 흘린 객옹은 사일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하는 일에 우연이 어디 있더냐? 말 돌리는 건 그만두고 이제 밝혀라. 네가 왜 이곳까지 와야 했는지 말이다.”

마차 안에는 운현과 객옹, 그리고 이검학과 사일천만이 타고 있었다.

사일천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천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네.”

사일천의 시선이 운현을 향했다.

“이제 곧 일대상인이 움직일 걸세.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테니 자네가 그를 막고자 한다면 서둘러야 할 걸세.”

운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건 놀람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군요.”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그의 눈빛은 단호한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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